[질문]

저만의 비밀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약점으로 잡아 수년에 걸쳐 저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적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심각한 대인기피증, 우울증, 공황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제가 타지에 오게 되면서 그들이 물론 잊진 않았겠지만 자연스레 관심이 뜸해지면서 연락도 서서히 끊기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글을 쓰면서도 손이 떨리고 불안함이 가득해요. 그들이 저의 수치스런 비밀들을 폭로하게 된다면 정말 저를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차별과 비난을 받고 부모님과 현재 사귀고 있는 남자 친구조차 저를 버릴지도 몰라요. 제가 궁금한 것은 간절히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억과 입조차 섭리하셔서 저를 수치스럽게 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비밀들을 지켜주셨다는 내용은 확실히 못 본 것 같아서요. 분명 저와 같이 평생 알려져서는 안 되는 끔찍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모든 생각들을 다 아시고 제발 지켜줬으면 좋겠어요. 아무튼 이런 괴상한 질문을 받아본 적 없으시겠지만 제가 용기를 내 글을 적어보았어요.

[답변]

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결코 괴상한 질문이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남들에게 끝까지 비밀로 하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가 있기 마련입니다. 혹시라도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공개하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도 됩니다. 이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자는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신원(伸冤)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남의 비밀스런 약점을 빌미로 수년에 걸쳐 괴롭힌 것은 아주 사악한 죄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더 이상 그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아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기억에서 지워주고 말하는 것조차 막아주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각 사람에게 이성을 주어놓고 다시 빼앗아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악인은 반드시 다시 악을 범하게 되고 그렇게 쌓여가는 악들이 조성해내는 폐해로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롬1:28-31)

다윗이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시12:3,4)라고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가 혀를 끊는다는 것은 기도하면서 상징적 의미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까지 못하게 막지는 않습니다. 악인들은 입술은 자기들 것이니 주관할 자가 없다고 주장한다고 다윗도 인정했습니다. 오직 자기 생각과 기분대로만 말하고 행동하기에 악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를 환난과 죄악에서 구해주시기에 모든 억울한 사정을 주님께 토설하면서 악인의 훼방을 막아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동일한 악을 더 이상 범할 수 없게끔 모든 여건을 조성해주시든지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에게 벌을 주십니다. 성경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난길에 오른 다윗 왕을 사울의 부하였던 시므이가 돌을 던지며 저주했습니다. 다윗의 신하가 왕을 저주하는 그를 죽이려 했으나 다윗은 아무리 저주하더라도 그대로 두라고 명했습니다.(삼하16:5-14) 다윗은 자기 아들도 반역을 일으켜 자기를 죽이려 드는데 하물며 사울의 부하라면 더더욱 그럴 수 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16:12)고 덧붙였습니다. 결국 압살롬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는데 시므이는 다윗 왕에게 급히 나아가 이전 잘못을 백배사죄했습니다. 신하들이 처형해야한다고 다시 권했으나 다윗은 또 다시 그를 살려주는 대신에 거주의 한계를 정해서 연금생활을 하라는 벌을 내립니다. 악인은 본성적으로 다시 악을 범하기 마련이라 시므이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거주지를 벗어남으로써 솔로몬 왕에 의해 처형당합니다.(왕상2:36-46)

신자는 동일한 혹은 그 이상의 보복을 대적에게 자기 스스로 행하려 해선 안 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합력해서 선으로 바꿔주십니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시72:4)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22:23)

그러나 이는 정말로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억울하게 피해본 경우에 해당됩니다. 다윗은 어떻게든 자기를 죽이려 드는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사울의 부하인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할 이유라곤 없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나라의 질서를 잡으려면 시므이를 심판해 마땅한데도 피난 갈 때와 반역이 진압된 후, 두 번이나 용서해주었습니다. 자기가 그에게 잘못한 것이 전혀 없기에 하나님이 시므이로 자기 잘못을 깨닫게 하거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다윗이 당했던 그 억울함을 반드시 갚아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서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부터 회개하라.

남에게 약점을 잡힐 만한 자신만의 수치스런 비밀이 있는 경우는 다릅니다. 그 점을 악용하는 자는 분명히 나쁘지만 본인도 분명히 뭔가 잘못한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마침 다윗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있었고 성경은 그럴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윗이 충직한 부하장수 우리야가 전장에 나가있는 사이에 그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한 사건입니다. 그로 인해 밧세바가 임신하자 다윗은 자기 아들이 아니라 우리야의 아들로 위장하기 위해서 전쟁에 있던 그를 휴가를 주어서 아내와 동침시키려 시도했습니다. 우리야가 전선에서 고생하는 부하를 생각해서 집에 내려가지 않고 신복들과 왕궁 문에서 자는 바람에 다윗 혼자 꾸몄던 그 음흉한 모의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군대장관 요압에게 비밀리에 서신을 보내어 우리야를 가장 위험한 전투에 내보내라고 명해서 적군에 의해 전사하게 만듭니다.(삼하11장)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사실은 궁중 안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야에게 특별휴가를 주어서 자기 아들을 그의 아들로 오인하게끔 하려던 모의는 다윗 혼자만 아는 비밀스런 사악한 계교였습니다. 그것이 실패한 후 우리야를 최고 일선에서 전사시킨 것은 요압과 다윗 둘만 아는 비밀로서 충성된 부하의 생명을 왕이 죽였으니 아주 악한 죄였습니다. 우리야가 죽자 밧세바를 정식 왕비로 맞이했으나 성경은 그래서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11:27)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정말로 완전범죄를 행하여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 쳐도 하나님의 안목은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이 땅의 인간들의 모든 행위를 굽어보시고 각 개별 인간의 깊숙한 심령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사용해 백성들의 눈을 가리거나 입술을 봉할 수는 있어나 일시적으로 인간사회에서만 통할 뿐입니다. 그것도 실은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에서 보듯이 사람들이 왕의 위세에 눌려서 쉬쉬하고 넘어가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이나 백성이 비밀로 하는 죄가 있다면 반드시 그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 혹은 징계하십니다. 다윗만의 비밀을 나단 선지자에게 계시해주었습니다. 나단은 가난한 집의 어린 양 새끼 비유를 들어 에둘러서 다윗에게 숨겨놓았던 그 사악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라고 신랄하게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불륜으로 잉태한 다윗의 자식을 앗아가는 벌을 내렸습니다.(삼하12;1-14)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참으로 엄중하고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야가 전사했고 밧세바도 왕비로 맞았으니 다윗으로선 떳떳하게 자기 아들로 내세울 수 있는 왕자를 하나님이 죽게 만들었습니다. 다윗더러 네가 네 아들을 죽이려 한 죄가 얼마나 크고 중한지 깨닫고 또 네가 원한 그대로 죽여줄 테니까 네와 밧세바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겪어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나단은 왕의 권위에 손상가지 않게 하려고 다윗과 단 둘이 만나서 간언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왕권으로 얼마든지 나단을 죽여서 입을 봉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견책을 듣자마자 진정으로 회개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궁급한 경우에는 자신의 뜻을 버리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에 온전히 맡겼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밧세바와 간음한 뒤처리를 자기 생각대로 손쉽게 하려 시도했으나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단과 요압을 통해서 간음, 위계, 살인 등 다윗이 저지른 죄를 온 천하에 드러나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잠시 안락한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더니 유혹에 못 이기고 너무나 큰 인생의 오점을 남겼습니다.

다윗은 이 한 번의 잘못을 빼고는 항상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구약에서 최고로 신실한 종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종도 얼마든지 엄청난 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또 그래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로만 의로워질 수 있다는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이 사건에 계시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 믿은 신자도 남들에게 끝까지 감추고 싶은 너무나 부끄러운 잘못이나 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 앞에 그 죄를 들고나가 하나에서 열까지 진솔하게 고백하고 진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다윗이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하면서 시편 51편과 139편을 지었습니다. 천천히 묵상하면서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피하지 말고 부딪혀라.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질문자님도, 이미 그러셨겠지만, 다윗처럼 모든 비밀스런 잘못을 주님께 토설하고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단순히 잘못했다고 말로만 시인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선 안 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잘못한 일이라면 그분께 찾아가서 진정어린 사죄를 하고 응분의 충분한 보상을 해주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행한 잘못된 버릇이나 악행이라면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완전히 끊으셔야 합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순결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신자의 경우 인간세상에서 행한 모든 죄는 물론, 다른 이에게 아무리 작은 실수라도 상처를 입히게 만들었다면, 나아가 자신에게 행한 나쁜 버릇까지 모든 잘못은 하나님께 행한 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분 앞에서 깨끗하게 씻은 후에 순전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꿔 말해서 질문자님이 다른 곳으로 이사 간 것으로는 이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심각한 정신질환이 생길 정도였다면 현실적으로 멀리 가버리는 것이 긴급하고도 선한 조치이긴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불안해서 저에게 질문했듯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습니다.

모든 죄 허물 약점 실수 등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새롭고도 거룩하게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런 것들로 현실적인 어려움 생기거나 내적으로 죄책감과 자괴감이 자꾸 든다고 해서 무조건 잊어버리거나 도피하려 해선 안 됩니다.

신자는 악을 악으로 갚아서도 안 되지만 피해서도 안 되며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찾아가 따지거나 명예훼손 중상모략 등으로 고소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반드시 그 악을 이길 만큼 더 선한 것으로 겨룰 수 있어야 합니다.

설명 드린 대로 다윗처럼 행해야 합니다.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부터 해야 합니다. 남의 약점을 악용할 정도 수준 밖에 안 되니 얼마나 치사하고 부끄럽고 불쌍합니까? 틀림없이 불신자일 텐데 예수님을 몰라서 절망과 죽음으로 향해 달음질 하는 그 영혼은 너무나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질문자님이 이전과 전혀 다르게 당당하고 거룩하게 바뀐 모습을 그들도 보고 알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다시 음해하고 괴롭힐 수도 있겠지만 그들과 다른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자신의 지난 과오를 시인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전에 분명히 그런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지만 지금은 완전히 고치고 전혀 새롭게 살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해주면 그만입니다. 그 문제로 전혀 괴로워하지 않으니까 그들이 더 이상 괴롭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부끄러운 과거 잘못을 대적이나 사람 앞에서 시인하기 너무 어렵고 그 현실적 부작용이 크다면 그냥 완전히 새로워진 모습으로 조용히 살아가면 됩니다. 신자가 어떤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평강과 기쁨을 유지하면 세상의 어떤 시험과 유혹은 물론 대적의 훼방도 혼자서 물리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이 사는 것이 신자가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이며 또 그러는 것이 이런 문제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실은 가장 크게 걱정되는 것은 질문자님이 강박적인 염려에 묶여서 정신질환으로까지 발전해 있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정신과적 상담과 치유를 정기적 지속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리자면 하나님은 사악한 대적의 마음과 행동보다도 질문자님의 마음과 행동을 먼저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고 다윗처럼 행하셔야 합니다.

2021/1/5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