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애 박사
이경애 박사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도 하려 할 때 자주 듣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자유를 억압받기 싫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교회 다니면 일요일에 놀러도 못가고, 즐기고 싶은 유흥도 맘대로 즐기기 어렵다는 다소 소박해 보이는 이유로 사람들은 교회 다니기를 거부한다. 과연 그럴까? 기독교는 그렇게 억압적이고 재미없는 종교인 것일까?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안다. 기독교는 자유를 억압하는 종교가 아님을, 아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심을 말이다.

성서에는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는지,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를 해방시키려 하시는지 분명히 나온다. 창세기 2장의 천지 만물과 인간에 관한 창조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You are free to eat)’ 먹으라고 하신다. 선택할 수 있는 무한 자유를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도 복음서에서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진리로 인하여 자유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기독교는 자유를 주는 종교이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은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영혼의, 마음의 자유를 누리는 은혜를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바로 이 자유가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이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가 우리에게 분명히 주어졌지만(freedom from), 매 순간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의 선택의 과제(freedom to)는 바로 우리에게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고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된 이들은 구원의 감격으로 자유를 만끽할 뿐 아니라, 앞으로 더욱 믿음의 선택을 위한 영적인 민감성을 지녀야 하며 매순간 진정한 자유를 위한 선택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유다는 예수 공동체에서 돈 관리를 할 만큼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유월절 만찬에서 보인 그의 선택은 그가 이미 받은 예수의 제자로서의 택함의 감격을 다 무의미하게 할 뿐 아니라 그 스스로도 목숨을 끊게 만들었으며 제자 공동체에 큰 충격을 남기게 된다. 그는 사탄에게 휘둘려 잘못된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니다. 성서는 그가 예수가 주는 떡을 취했을 때, 그 때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이야기한다(요한복음 13:27). 분명 앞 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떡 한 조각을 적셔서 주는 그 자가 바로 예수를 배반할 자라고 말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수를 배반하기로 마음으로 ‘선택’한 그는 주저 없이 예수로부터 떡을 받는다. 그는 누구 때문에, 다른 무엇 때문에 예수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생겨난 의심과 욕심을 이기지 못했고 그 결과 불의의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윌리엄 글래써(William Glasser, 1925~2013)에게 시작되어 발전을 거듭해온 ‘현실치료’에서는 인간의 선택을 중시한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좋은 세상(Quality World)’이 있는데 이 좋은 세상이 실현될 긍정적인 선택을 하고 또한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이론의 핵심이다. 다시 말해 인생의 성공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나 자신을 통제하면서 옳은 선택을 하고 그에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글래써에 의하면 인간은 객관적 현실에 살지 않는다. 인간은 현실을 지각하고 살지만 그 인식은 개인마다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자체보다 그 현실에 대한 인식이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유다를 다시 생각해보자.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하나로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하는 은혜와 특권을 누린 자였다. 그러나 그가 사는 현실은 자신의 내면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디서부터 그의 내적 세계가 무너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께 붓는 것을 보며 그렇게 부정적이었던 것을 보면, 그는 옳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나 영적인 세계에는 냉소적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요한복음 12:5,6). 그의 물리적 외적 세계는 예수의 제자로서 영적이고 충성스러운 것처럼 보였으나, 그의 내면은 물질적이고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현실치료에서 말하는 좋은 세계란 우리 내면의 욕구와 소망이 충족되는 세계이다. 즉 인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 신념, 좋은 인간관계의 경험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꿈꾸는 세계가 바로 이 세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러한 좋은 내적 세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것은 이 기본적인 욕구를 책임 있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충족시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기본적인 아름다운 욕구들이 분명 내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세계에서 책임 있게 선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라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이론에서는 이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만족스러운 인간관계가 경험되어야 한다고 한다. 아름다운 관계경험이 내면세계를 현실화시킬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유다는 예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더할 수 없는 아름다운 좋은 세계를 지닌 사람이었다. 예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고, 돈의 소중함도 철저히 깨달을 수 있는 지적 능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좋은 세계가 자신의 인생에서 실현될 수 있는 선택을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예수님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그와 좋은 관계를 할 수 없었던 그는 좋은 세계를 실현하기는커녕,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고 결국 스스로도 파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좋은 세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이 좋은 세계가 실현되기를 날마다 꿈꾼다. 그러나 이러한 실현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날마다 옳은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은 책임이라는 결과로 보응한다. 그리고 이 옳은 선택은 혼자만의 고민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좋은 세계를 공유하는 이들과의 아름다운 공동체 경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팬데믹의 외적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는 ‘치유와 회복’이라는 좋은 세계가 있다. 성탄절 교회에 모여 영유아부로부터 시작해서 선교회 어르신까지 칸타타며 연극이며 찬양이며 즐겁다 못해 분주하던 성탄절, 그 작년의 성탄은 우리에게 소망과 그리움의 좋은 세계로 남아있다. 그렇다. 모두 회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만이 우리의 좋은 세계는 아니다. 객관적 현실이 좋은 세계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꿈꾸는 좋은 세계가 좋은 만남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올해와 같은 강림절도 올해와 같은 성탄절도 우리에게 얼마든지 좋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조용하기 때문에 더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으리라. 아기 예수님과의 더 은밀한 만남이 우리에게 더 좋은 세계를 경험하게 할 것이다. 더 어렵고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는 만족스러운 인간관계가 우리를 더 좋은 세계로 초대할 것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2020년 팬데믹 가운데에서도 성탄(聖誕)하시길 기도한다. 더 깊이 우리각자를 만나주시기를 기대한다. 더 좋은 세계를 기도한다. 우리의 선한 선택에 달려있다.

이경애 박사(이화여자대학교 박사(Ph.D), 이화여대 외래교수, 예은심리상담교육원장, 한국기독교대학신학대학원협의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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