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안치
치악산 인근 산, 양안치에서 원주 방향으로 바라본 풍경. ©지미 리
소태재
강원도와 충청도를 가르는 고개, 소태재 ©지미 리

“A Journey Through Southern Korea in 1889”, By George Heber Jones
The Korea Mission Field 1929년 1월호

존스 선교사
존스 선교사

우리는 1889년 8월 20일, 화요일에 원주를 출발했고, 21일 수요일 저녁이 되기 전까지 여정의 절반은 매우 피로했다. 우리가 계곡을 지나는 동안에 밤이 되었다. 아직 대구로 향하는 대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길은 돌이 많고 불편한 오솔길 정도였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국에서의 여행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바로 횃불을 사용한 것이다.

당시에는 작은 마을들이 마을 어르신의 주도하에 있었기 때문에, 어둠이 완전히 깔렸을 때 우리를 안내하는 기수(旗手)는 그 마을 원로를 찾아가 부탁을 드렸다. 여행자들이 어두움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들은 여행자들을 다른 마을까지 안내해 주게 되어있었다. 그들은 계곡을 밝혀주는 거대한 횃불로 길을 밝히며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인접한 마을에 도착해 새로운 사람들이 이 역할을 대신 교대할 때까지 이 일은 계속 중계되었다. 이렇게 밤중의 여행자들을 도와야 하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이를 비용을 받지 않고 해주었다.

양안치
양안치재 모습. ©지미 리

낮 동안 우리는 강원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가르는 산을 넘었고 충청도의 동북쪽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역주: 여기서 말하는 강원도와 충청도를 가르는 고개는 소태재(273m)인데 선교사 일행은 원주 매지리에서 양안치재(380m)와 백운령을 넘어 귀래에 도착했고, 현재 원주시 귀래면과 충주시 소태면을 가르는 소태(蘇台)재를 말한다. 이들은 다음날 충주를 지나기 전 원주에서 70리 거리인 목계나루터가 있던 곳에서 숙박을 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목계나루
선교사들이 묵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목계나루 배터. 강을 건너주던 배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중원고속도로가 뚫려 있다. ©지미 리

21일, 수요일에 우리는 80리를 나아갔고 오후에 성곽 도시 충주를 지나게 되었다. 충주는 충청도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하나의 도시이다. 각각의 행정구역 ‘도(道)’는 그 도 안에 소재한 2개의 주요 도시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충청도(忠淸道)는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머리글자를 따서,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에서,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고 전국 8개의 도의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충주는 부유한 나라의 중심에 있는 조용한 지방처럼 보였다. 그곳은 300년 전에 일본에 의해 침략당해 큰 고통을 받았었다(역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朝鮮)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노하여 선조(宣祖) 25년(1592) 임진(任辰)년에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등에게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다. 여기서 ‘큰 고통’은 탄금대전투(彈琴臺戰鬪)를 말하는데, 이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을 주장으로 한 조선군과 왜군이 충주에서 벌인 전투에서 패해 충주 주민들이 당한 고초를 말한다).

문경새재
문경새재(제3관문),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조령이라고도 한다. ©문경시

목요일(22일)에도 우리는 여전히 충청도에 있었고 형편없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나아갔다. 아펜젤러 형제는 대체적으로 북쪽의 길이 훨씬 더 나았다고 말했다(역주: 아펜젤러는 당시 이미 1차로 서울 북쪽의 송도와 평양, 2차로 소래와 평양, 3차로 송도, 소래, 평양, 의주, 해주를 다녀온 바 있어 당시 북경로라고 불리었던 서울 북쪽 길을 말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진취력이나 지능으로 다른 사람에게 인상을 주진 않았다. 정말로 그들에 대해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그들이 악의 없어 보인다는 정도이다. 여자들의 의복은 우리의 단정함의 기준과는 거리가 멀었고, 모든 남자들은 게으르고 무기력해 보였다. 우리는 그 남자들이 무엇으로 먹고사는지를 여러 번 물었지만 변함없는 대답은 빈둥거림을 의미하는 ‘놀기’(Nolgi)였다.

제2관문
제2관문 모습. ©지미 리

여자들이 모든 일을 했다. 우리는 여성들이 무릎까지 빠지는 물 댄 논에서 일하거나 콩 종류나 채소 등을 재배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여성의 영역뿐만 아니라 남성의 영역까지 담당하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길을 가거나 식사와 잠을 위해 휴식을 취할 때 본 피상적인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이 충청도와 강원도의 산골에서 어떠한 절약의 모습을 봤더라면 나는 한국인들을 인정하지 않은 것에 너무 편협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기쁘게 할 그런 발견은 없었다. 여성들은 마치 노예처럼 일했고 아마 실제로 노예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남자들은 비록 전해오는 크로이소스(Croesuses) 왕처럼 부자들은 아니었지만 마냥 빈둥거리고 있었다(역주: 크로이소스 왕은 리디아 최후의 왕(재위 BC 560?∼BC 546), 특히 부호로 알려져 있으며, 부(富)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1권에 기록되어 있다).

내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지저분한 남녀들이었지만,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정말로 그런 것들은 불신앙이 사멸시킴으로부터 오는 남성들의 냉담한 감수성이다. 여인들의 고단함과 비하의 환경이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인생이다. 나는 그들이 깨닫고 있는지, 혹은 더 높은 존재로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은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들의 지저분함이 그들이 아는 유일한 청결함이고, 죽음과 산신령만이 그들의 유일한 종교였다.

조령원
옛 원(院: 조선조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시설, 사진은 조령원.) ©지미 리

목요일에 우리는 경상도에 들어가는 관문인 조령(鳥嶺)을 넘고 있었다(역주: 조령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소백산맥 조령(鳥嶺)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문. 새재는 새나 넘나들 수 있는 험한 고갯길이라는 뜻에서 붙여졌고, 초점(草岾)은 풀이 우거진 고갯길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분명 지금까지의 여정 중 가장 힘든 일이었다. 정말로, 좁은 골짜기는 거의 지날 수가 없었고 오직 발을 단단히 딛고 선 작은 토종말들만 통과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아침 동이 틀 때쯤에야 그곳에 다다랐고 하루종일을 그곳에 있었다. 우리가 오르락내리락 하며 산을 넘을 때 그 오르막길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들뜬 돌들과 바위에 걸려 넘어지며 하늘 맞닿는 곳까지 도착했다. 그나마 보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8월의 태양으로부터 좁은 길 위로는 나무들이 드리워져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한낮에는 나아갈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오후 3시쯤 우리는 산등성이를 따라 있는 벽으로 둘러싸여 모습을 감춘 산마루를 보았다. 그 길은 ‘문경새재’라는 의미로 거대하게 새겨진 현판의 성문 아래로 이어졌다. 읽히는 대로 해석하면 ‘문경으로 가는 새들이 넘는 길’이었다. 이 성문은 한국인들이 국가적 재난으로부터 빠른 시간에 대피하도록 산 요새의 접근이 힘든 높이에 건축되어 피난 도시로 갈 수 있도록 한다. 이 성문은 또한 도의 경계였는데 이를 통해 충청도와 경상도를 오갈 수 있었다. 성문에서 우리는 휴식과 풍광을 즐기기 위해 잠시 쉬었다. 모든 방향으로의 경치는 아주 원시림처럼 보였는데, 웅장하고 장엄하게 보였다. 산 정상 아래는 많은 삼림으로 덮여있었는데 여기는 호랑이, 표범, 그리고 곰들의 터전이다. 비록 사람들이 이곳에 집을 짓고 살고 있지만, 그들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제2관문에서 제1관문으로 가는 길
제2관문에서 제1관문으로 가는 길과 길 옆의 계곡. 당시 영남에서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가는 사람은 모두 이 길을 통과했다. ©지미 리

우리는 그날 밤을 문경의 유명한 관아(官衙)가 있는 객사에서 보냈다. 여기서 의병들은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집결했었다. 또한 고니시(小西行長)와 가토(加藤淸正)가 조선 반도를 정복하기 위해 그들의 군대가 각기 다른 경로로 와서 이곳에서 연합했지만, 조선침탈의 영역을 더 넓히기 위해 갈라져 진격한 곳이다.

말들과 사람들은 완전히 지쳐있었고 이 지역(문경)에서의 휴식과 고요함은 감사히 기억되어졌다.

8월 23일 금요일, 우리는 빗속에서 다시 출발했지만 오후에는 개었고, 밤이 되기 전 90리를 지나왔다. 문경으로부터 행로에서 우리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가장 가까이에서 협곡을 보며 통과했다. 그곳은 좁은 협곡이었는데 3마일의 길이에 300피트 정도의 넓이였고, 양옆은 600피트의 수직높이였다. 우리는 두 차례 폐허가 된 요새를 지났는데 이는 아마도 300년 전 남쪽으로 후퇴하는 일본군들을 공격한 의병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물레방앗간
물레방앗간

빗속에 이 협곡을 말을 타고 통과하는 것은 우리의 전체 여정에서 가장 처량한 모습이었다. 오후에 날이 개었을 때, 우리가 지나고 있는 지역이 어떤 곳인지를 알 수 있었고, 우리가 수도 경성이 소재한 경기도를 떠난 이후로 경험한 것과 우리가 얼마나 다른 환경에 있는지 발견하게 되었다. 우선, 산업 활동의 일환으로 계곡을 따라 있는 방앗간들은 물레방아로 쌀과 보리를 빻아 가루를 만들었다. 그 방앗간 풍경은 참 볼만했다. 약 15피트 길이의 통나무는 한쪽 끝이 파여 구유 통처럼 생겼고, 다른 나무의 반대쪽 끝은 커다란 방앗공이 같은 것으로 내리쳐지고 있었다. 이것은 지렛목 위에서 잘 균형 잡혀 있었고, 수조 통은 집 밖에 놓여있는 채로 공이가 곡물을 빻으면 방앗간 밖의 위에 위치했다. 수로는 수조 통으로 물을 떨어뜨리고 그것은 땅으로 내리치는 커다란 공이를 공중으로 들리게 했다. 수조 통이 내려가서 비워지고 그 균형이 전해지자마자 공이는 방아통을 쿵 하고 내리쳤다. 수로의 물은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수조 통은 다시 채워지고 이 과정이 계속되었다.

이 물레방아 방앗간 외에 석회가마도 운영되고 있었다. 집들의 열린 문틈을 통해 우리는 여성들이 실을 잣고 옷감을 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자를 만드는 공산품 공장시설을 2차례 보았다. 이 지역 또한 발전한 것처럼 보였다. 좁은 협곡들 대신에 작은 계곡들과 작은 논들, 우리는 곡식들이 잘 자라 풍성한 열매로 뒤덮인 넓은 평원을 보았다. 진흙 초가집은 어디에나 있었지만, 그 집들은 더 넓었고, 지붕 초가는 더 새것이었고, 진흙도 품질이 더 좋은 것이었다. 이 수수한 초가집들은 경계를 표하는 울타리가 쳐진 작은 정원들로 둘러 쌓여있었고, 덧붙여서 말하자면 도로는 확실히 더 잘 정비되어 있었다.<계속>

번역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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