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돈 교수
조성돈 교수

교회는 공동체이다. 성도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는데 그 가운데 '성도의 교제'라는 말이 나온다. 바로 이 부분이 교회를 의미한다. 그런데 의아할 것이다. 이것과 공동체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성도의 교제'라고 말하는 이 부분은 라틴어로 '코뮤니오 쌍크토룸'이라고 하고, 그리스어로는 '코이노니아 하기온'이라고 한다. 원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할 때 좀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이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를 우리는 대부분 '교제'라는 단어로 번역을 했다. 그런데 이 교제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그렇게 썩 좋은 어감은 아니다. 이성교제나 원조교제라는 단어도 있고, 좀 뒷방법을 사용하여 사람을 매수하려고 할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 또 교회에서는 과거 오락시간을 일컬을 때 좀 있어 보이려고 코이노니아 시간이라고 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코이노니아라고 하면 뭔가 좀 가벼운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코이노니아라고 하는 이 단어에는 교제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여기에는 연합이나 동참, 그래서 공동체라는 의미가 있다. 특히 바울 선생님은 이 단어를 아주 심오하게 사용했다. 십자가 신학과 함께 그는 이 코이노니아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빌립보서에 보면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고백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참여'한다고 하는 이 단어가 코이노니아이다. 즉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코이노니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 코이노니아는 바로 예수의 부활과 고난을 통해 그와 함께 함이 된다는, 그래서 그와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의 공동체, 즉 코이노니아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와같이 성도의 교제, 즉 코이노니아 하기온, 또는 코뮤니오 쌍크토룸을 믿는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우리 믿는 이들, 즉 거룩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고난을 함께 나눈 공동체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 이 고백은 그 대상을 믿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 성도가 되어 그리스도의 부할과 고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참여함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 우리의 고백은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단지 주일아침 우아한 모습으로 교양있게 교회당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조차도 함께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교회당에 여러 무리와 같이 찾아드는 군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과 고난을 고백하고, 그 삶을 내가 살아내야 함을 의미한다. 좌절되고 깨어진 모습으로 교회당에서 위로를 찾는 나약한 자가 아니라 부활의 권능으로 승리하는 삶을 요구받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아하게 승용차를 타고 교회당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고 요구한다.

이 부름에 응하여 모인 자들이 바로 성도의 공동체, 즉 교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고난에 터하여 서로를 형제요, 한 몸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사명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이다. 이 교회로의 부름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기를 고대한다.

조성돈(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교수)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 종합일간지 '기독일보 구독신청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