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영적 맹인들을 피해 성전을 빠져나온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육적 맹인 한 사람을 만나 그의 눈을 뜨게 해주신다. 9장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8장 12절의 주석과도 같은 삽화다. 주석가 레온 모리스(Morris)는 “4복음서에 예수님의 치유 중 눈먼 자의 치유 기사가 가장 많다”(마9:27-31, 12:22이하, 15:30-31, 21:14; 막8:22-26, 10:46-52, 눅7:21)며 이 이적을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일이었고(출4:11; 시146:8), 메시야의 행위였기에(사29:18, 35:5, 42:7) 하나님의 행위이자 신적 메시야의 성취”라고 했다.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날 때부터 장애(1절)가 있었던 성인, 기나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앞을 본 적 없다. 세상을 본 적도 없고, 부모 얼굴도 본 적 없고, 형제들의 얼굴도 본 적 없는,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사람이다. 지금은 점자책이 있고, 전자감응식 지팡이도 있고, 안내견도 있지만 맹인을 위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던 때였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기대할 것도 없고, 아무 희망도 없이 철저하게 무의미한 삶을 살았다. 남 신세만 지고 구걸하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 자신은 물론 주변까지 불편하게 함으로써 항상 멸시, 천대를 당했다. 그러나 5장에서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갖지 않아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38년 된 병자와는 다르다. 요한은 9장에서 그의 신앙고백이 점점 더 발전적인 모습이었음을 강조한다.

본문 이야기는 맹인이 눈뜨는 기적 중에서도 그 분량이 압도적이다. 한 장 전체, 41절이나 된다. 기적보다는 기적 이후, 기적 때문에 빚어진 갈등이 주를 이루는데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예수께서 대형사고라도 치신 것 같은 표적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낸 표적

이 이야기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나가다 맹인 한 사람을 본 것 때문에 일어났다. 모태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인데 제자들은 다짜고짜 이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라고 묻는다(2절). 원인과 결과에는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인과응보 식 질문, 자기 죄 때문이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다.

하지만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부정하다고 정죄하고 논쟁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문제가 있다. 유대 문헌에 엄마가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르면 그 뱃속 태아도 함께 그 죄에 참여한다는 글도 있기 때문일 수 있지만 그들은 사람의 불행의 배후에 죄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성경에도 응보(應報)의 법칙이 있다. 하지만 그게 고통을 푸는 마스터키는 아니다. 그들이 잘못된 것이 모두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은 편견(偏見)이고 고정관념(固定觀念)이다. 당시 유대 사회가 모든 장애나 질병을 죄의 결과라고 여겼기 때문에 상식이기는 하지만 누구를 탓하며 책임전가나 하는 것은 자신들이 맹인과 다름없음을 스스로 드러낸 꼴이다.

정죄하고 논쟁대상으로만 삼은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논쟁에 관심이 없으시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끄신다. 여기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뭔가? 그건 구원이고 사랑이다. 죄인이 눈앞에 있으면 구원하고, 어려움 당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고쳐주시는 것, 그게 하나님의 일이다.

선교사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세기에 유능한 목사 한 분이 선교사로 자원하고 모든 훈련을 다 잘 받았다. 그리고 아프리카로 선교사로 떠나기 위해 배를 타는데 그만 다리를 잘못 짚어 떨어지고 말았다. 생명은 구했지만 불행하게도 한쪽 다리를 잘라내고, 의족을 달아야만 했다. 선교사는 절망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선교지로 떠나는 순간에 당한 일이라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다시 도전을 받고 결국 선교지로 갔다. 그런데 웬일? 아프리카로 가서 선교를 하는데 그만 식인종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꼼짝없이 식인종의 밥이 될 판국, 죽었구나 생각하며 선교사는 기도했다. 지혜가 생겼다. 그래서 큰소리로 “나를 잡아먹으려느냐?” 물으며 고무로 만든 다리를 뽑아서 먼저 맛을 보라고 던져주었다. 식인종은 의족이 뭔지도 모르고 진짜 다리인줄 알고 먹는데 너무 맛이 없다. 맛도 없고 질겨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자 그냥 살려주었단다. 다리를 절단한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8장에서처럼 그들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이끄신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물론 예수님의 이 대답도 충격적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맹인으로 산 것이 하나님의 목적으로 인한 고통인가? 그것 때문에 날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맹인으로 살았다고? 개인의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하지만 죄책감 갖고 무겁게 산 것보다는 차라리 복음이었다. 시각장애가 있는 분들은 원래 귀가 밝은데 다 들었을 것이다. 제자들이 누구 죄 때문이냐고 할 때 “입 닥쳐, 지금 누구 염장지르는 거야?”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말없이 참고 들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장애 때문에 성전에 입장할 수조차 없었던 그 동안의 서러움까지 다 날려보내기에 충분한 한 줄기 빛과 같은 말씀이다. 너무 좋다. 너무 존경스럽다. 이 분의 말씀이라면 어떤 말씀이든 순종할 준비가 된다.

세상의 빛이심을 입증하는 표적

본문에 밤과 낮이 대조되고 있다.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4절). 어둡고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밤은 한 단어로 표현하면 ‘혼돈’이다. 니고데모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때가 밤중이었다.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가 예수님을 팔았던 때도 밤중이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모든 음모와 폭력은 밤에, 어두운 곳에서 행해진다. 우리는 어떤가?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라고 ‘실로암’을 노래하지 않나?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셨다. 3절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의 ‘나타낸다’는 말도 헬라어로는 ‘파네로테’(Panerothe), 빛을 비췬다는 뜻이다. 5절에서도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그러셨다. 캄캄한 밤에 비취는 등불, 예수님을 만나면 고장난 전등에 불이 들어오듯 환한 빛이 비친다는 말씀이다. 빛이 비취면 모든 것이 드러나기에 빛은 진실을 뜻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갑갑한 우리를 위해 지금 등불을 들고 비추고 계신다. 어둠에 자기를 가두지 말고 빛 가운데로 나아오라는 뜻이다.

어둠에 갇혔던 맹인, 인생이 밤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빛을 본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동안 보지 못하는 고통을 알았을까? 빛의 고마움을 알까? 아닐 수 있다. 예수님을 통해 빛을 본 후에야 자신이 얼마나 어두운 세계에 살았는지 알았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후에야 자신이 어둠에 갇혀 있었음을 알게 된 셈이다. 바울이 그랬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확신에 가득 찼던 사람, 율법으로는 흠이 없던 사람이다. 그래서 율법을 준수하지 3중고는 신앙인들을 박해하는데 열심을 다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 그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면서 자신이 얼마나 짙은 어두움 가운데 살았는지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한다.

미국의 작가이자 교육자, 사회운동가였던 헬렌켈러(Helen Keller)도 그랬다. 귀머거리, 맹인, 벙어리라는 삼중고의 장애인, 교육가인 앤 설리번(Anne Sullivan) 선생을 통하여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목의 떨림과 그로 인해 형성된 언어뿐이었다. 느낌으로 비와 태양과 더 나아가 추상적인 사랑까지 이해했다. 그래서 ‘내가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이라는 수필에서 정말 보고 싶었던 것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 세계였다고 했다. 설리번 선생과 친구들을 보는 것, 바람에 나불거리는 아름다운 나무 잎사귀들과 들에 피어 있는 예쁜 꽃들과 풀들을 보는 것, 석양에 빛나는 아름다운 노을과 이른 새벽 먼동이 트는 웅장한 장면을 보는 것,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과 큰 길가에 서서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는 것,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거리와 쇼윈도우에 진열된 아름다운 상품들을 보는 것...

헬렌 켈러가 언어와 사유를 통해 빛을 봤다지만 그가 그리던 것과 실제가 과연 같았을까? 우리가 믿음으로 눈을 떴다는 것도, 또 믿음으로 영원한 세계를 본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연 제대로 봤을까? 그저 믿음으로 상상할 뿐 아닐까? 그 세계는 예수님이라는 빛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순종함으로써 누린 기적

드디어 예수님이 고쳐주신다. 그런데 방법이 너무 특이하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6절), 마가복음에 보면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막8:23)라고 했다. 물이 귀해 진짜 사랑하는 사람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아프리카 마사이(Maasai) 족도 아니고 이게 뭔가? 거룩하고는 너무 거리가 먼 방법 아닌가? 좀 의사 같기는 한가?

우리는 누가 땅에 침을 뱉어도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런데 눈에 침을 뱉으신다? 맹인이라도 기분 나빴을 것, 그것도 안식일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 즉시 눈을 뜬 것도 아니다. 앞도 안 보이는 사람을 5리(2km)는 떨어진 실로암 연못까지 가서 씻으라고 좀 매정한 분처럼 말씀하신다. 섭섭귀신이 꿈틀거리고, 분노 게이지가 폭발 직전까지 상승할 타이밍, 그것도 안식일에 일을 시키신 것, 다분히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다른 환자들을 고쳐주실 때 심플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절차도 복잡하다. 민간요법이랄까? 주술적이고 원시적이다.

하지만 맹인은 이것도 참는다. 어쩌면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하면서까지 고쳐주신다는 것에 감동받았을까? 각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방법이 다름을 알아서 맞춤형 치료로 받아들였을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능력이다. 자기를 죄인 취급하지 않은 유일한 분,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무슨 말씀이든 따르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정죄하고 매섭게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의사처럼 진흙을 침으로 이겨 눈에 발라주시는 주님의 손길이 그에게는 차라리 따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그저 가만히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비록 자신이 예수님을 먼저 찾아갔던 것도 아니고, 기도한 것도,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지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에 OK, 되물을 이유가 없다. 따질 이유도 없다. 실로암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 밖 기혼샘까지라도 갈 판이다. 말씀에 순종한다. 불평 한마디 없이.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7절). 순종이 기적을 부른 것이다.

실로암은 초막절 행사의 중심이다. 초막절 행사 중 물을 길어다 제단에 붓는 물축제 때 물을 퍼온 곳이 바로 실로암이다. 예루살렘 성 바깥 기혼샘과 연결된 실로암, 히스기야가 이곳에 터널을 뚫어 전쟁시에도 예루살렘에 물이 공급되도록 했기에 수로를 거쳐 기혼샘으로부터 이 못으로 물을 보낸다. 그래서 실로암, 실로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예수께서 바로 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의 실로암에서 씻음으로 눈을 뜨게 하셨다. 실로암 물의 능력인가? 아니면 침이나 민간요법의 진흙의 능력인가? 아니다. 예수님의 능력, 말씀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께서 고쳐주신 것이다.

예수께 집중해야 한다. 돌아가신 지 꽤 지났지만 한경직 목사께서는 아직도 기독교를 대표하신 분으로 기억하는 분 중 한 분이시다. 월남하셔서 영락교회를 세우고 일평생 주의 일을 하시다가 거의 100수 가까이 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은퇴 후에는 남한산성에 있는 교회 사택에서 여생을 보내셨다. 그리고 세상 떠나시기 몇 해 전부터 몸이 약해지고 병을 앓고 계셨는데 그 사실을 알고 교계의 중진 목사들이 병문안을 갔을 때 하신 말씀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한참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가 어느 목사 한 분이 “한 목사님, 모처럼 이렇게 교계 중진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좋은 말씀 한마디 해주십시오.” 그러자 한경직 목사는 한참을 침묵하시다가 입을 여셨는데 그 말씀이 놀랍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그 한 마디였기 때문이다. 교계 중진 목사들이 당황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원로 목사께서 후배 목사들에게 주신 이 한 마디 권고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 이보다 더 중요한 말씀이 있을까?

맹인을 찾아주셨던 예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다. 내 인생의 고난의 현장이 빛의 샘물이 솟는 실로암이 될 수 있다. 우리 눈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하고 보냄받는 자가 누릴 복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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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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