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선교전략회의
온누리교회 이재훈 목사. ⓒ 기독일보DB

사도 요한의 영성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영성이다.

요한일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이 어떻게 친밀함으로 이루어지는지를 간결한 영적언어로써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고 풍성하게 세워주시는 책이다.

요한일서는 요한복음의 주석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보면 누가가 기록한 두권의 책 누가복음과 사도행전과 같은 관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주후85년경1세대 사도들이 거의 죽고 사도 요한만이 살아남아 있다고 볼 수 있을 때, 그는 노년의 때에 당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그들이 믿는 신앙을 더욱 확신하게 해주기 위해 요한일서를 기록하였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은 5:13절에 잘 나타나있다.

요일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과 대조된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의 목적은 예수님을 믿게 하고 생명을 얻도록 하게 위함이며,

요한일서의 목적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들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알고 확신하게 하기 위함이다. 본문은 요한일서 전체의 서론으로 이 요한일서를 기록한 세 가지 목적이 순서대로 나타나 있다. 첫째는 생명이고 둘째는 사귐이고 셋째는 기쁨이다.

이 세가지 단어는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일뿐 아니라 사도요한의 영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단어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속에 거하는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세가지 특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미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고 확신하고, 그 생명으로 인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귐을 가지며, 그 사귐을 통해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이다.

첫째 사도요한의 영성의 핵심단어는 생명이다.

요일1:1-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이 생명은 태초부터 계신 말씀으로 표현된다. 이 말씀과 생명을 연결하여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다.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에 더 초점을 두어 설명하였다면 요한일서에서는 생명에 더 초점을 두었다.

요한일서에서는 그 말씀안에 있는 생명에 초점을 두어서 그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고 설명한다.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그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가 그 영원한 생명을 보았다고 하신다.

요한은 그 영원한 생명을 들었고 보았고 주목했고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말씀한다. 그 생명이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실체적 존재라는 말씀이다.

그냥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보았고,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하면 될 것을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표현을 사용해서 설명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두가지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째는 당시 요한일서의 독자들이 직면하고 있던 영적 위기중 하나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던 거짓된 교훈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대항하는 적합한 언어로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지주의가 요한일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체계화되지 않고 후에 체계화되었지만 그 뿌리는 존재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육체를 입은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주후80년전후 아직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예수님께 대하여 던져진 의심은 예수님의 신성이 아니라 인성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은 당연한 것이었고 도리어 저렇게 신적인 능력이 있는 분이 육체를 가지신 사람이신 분일리가 없다고 믿음으로서 그리스도를 대적했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인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는 것은 보면 신성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

두번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지금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원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생명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 경험은 단지 지식적이고 정신적인 경험이 아니라 전인적이고 인격적인 경험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경험과 같은 확실한 체험이다.

요한일서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것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 체험이 동일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시대와 문화가 다르더라도 그 체험이 같은 것은 객관적인 진리에 기초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 객관적인 체험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다.

두번째 사도요한의 영성의 핵심단어는 사귐이다.

사도요한은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귐에 성도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요일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지 죄 용서받는 것만이 아니다. 살아계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에 참여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그분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 그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이되지 않으면 사귐은 일어날 수 없다. 사귐 이전에 동일한 생명을 받아야 한다.

타락이전 인간이 누렸던 가장 큰 특권은 하나님과의 사귐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에 거니셨고 마치 친구와 이야기 하듯이 인간은 하나님과 대화하고 사귐을 가질 수 있었다. 죄는 하나님을 향하던 우리의 얼굴을 돌이키게 했다. 하나님의 얼굴 또한 우리에게서 돌이키게 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회복할 수없게 되었다.

신체 장기중 연약해져서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의 장기를 이식받아 회복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데 모든 장기가 다 망가졌을 때는 이식이 불가능하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생명을 이식받는 것이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인간의 힘으로 생명이식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생명이식 수술 방법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라는 수술대 위에 믿음으로 오르면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망가진 옛 사람은 십자가위에서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이식 수술이다.

3절에서 말씀하는 사귐은 당시 사도들만이 경험하는 사귐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체험이다.

사귐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두번째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예수님과 얼마나 친밀히 사귐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과 지속적인 사귐을 가지고 있다면 그 증거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소원이 닮고 비전이 닮는 것이다. 사귐의 증거는 사랑의 대상이 같은 것이다. 같은 것을 사랑할 때 그 사귐은 더욱 견고해진다.

세번째 사도요한의 영성의 핵심단어는 기쁨이다.

요일1: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과 나누는 사귐에는 넘치는 기쁨이 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에서 이 기쁨을 약속하셨다.

요한복음 15: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기쁨이란 감각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공급받는 강력한 힘이다. 확신이 구원받는데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지만 구원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는데는 본질적이다. 자신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속에서 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체험속에서 그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려면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귐을 가지기 전에는 결코 기쁨을 알수 없고 충만하게 누릴 수 없다.

기쁨이 없는 믿음생활의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과 사귐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기쁨을 누린다면 자신이 경험한 사귐을 다른 이들에게 증거하고 전파하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요한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경험한 사귐에 초대하기를 원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초대하기를 원할 것이다.

/기독교학술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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