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가 명심할 목표는 하나님 나라 확장, 이를 위해 살거나 죽을 각오해야
토착민을 가르치기 위해 함께 있는 것, 성장하도록 잠시 없는 것도 모두 유익

서양인과 기독교를 믿는 중국인들을 처형하는 의화단
서양인과 기독교를 믿는 중국인들을 처형하는 의화단

의화단 단원(중국의 반외세 비밀 단체)의 잔혹성에 관한 글이 발표되자마자 또 다른 주제를 두고 논란이 많이 일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회심자들과 함께 머물고 필요하면 함께 죽는 것이 과연 선교사의 의무인가 하는 주제였습니다. 이는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끝없이 토론해도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선교사가 회심자들과 함께 머물러야 할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죽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이론적으로 생각해 보면, 즉시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교사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뜻이 그 질문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의화단이 선교사는 물론이고 선교사와 관련된 이들을 무차별로 학살하는 데 혈안이 된 현 상황에서, 선교사가 처한 환경을 완전히 이해해야만, 과연 선교사가 회심자들과 머물러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정확하게 답할 수 있습니다.

독신 문제에 관하여 논할 때도 그랬듯이, 어떤 선교사가 처한 상황을 먼저 알아야 우리는 타당한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만약 선교사가 사역 현장에 남아 회심자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거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회심자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면, 많은 선교사가 주저하지 않고 목숨을 걸 것입니다. 선교사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더 유익하게 할 수 있다면 역경과 위험과 죽음을 각오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실제로 그렇게 감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명백한 이유가 없는 경우, 선교사는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순교자로 이름을 남기거나 군중에게 칭송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약 의화단이 폭동을 일으킬 때, 선교사의 존재 때문에 회심자들이 오히려 위험해진다면, 선교사가 위험한 상황에 남아 있는 것이 지각없는 처신일 뿐 아니라 범죄가 될 것입니다. 그런 행동은 죽음에 맞서는 담대함의 본보기는커녕 자만심에서 나온 객기가 될 것입니다. 물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명백하고도 중요한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치는 선교사는 겁쟁이이지만 말입니다.

죽어야만 의무를 완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죽을 위험을 무릅쓰는 선교사는 어리석습니다. 그런 선교사는 사실 자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용기는 어떤 위험이라도 무릅씁니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경솔함도 어떤 위험이라도 무릅씁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위험을 무릅쓴다고 할 때, 무슨 목적과 동기로 그러는지를 보고 그 사람이 지혜로운 용기를 지녔는지 무모한 죄를 짓는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역경과 가난, 위험과 칼을 각오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주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있는 위험에 일부러 부딪히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 혹은 어떤 도시에서 핍박을 받아 ‘다른 도시로 피할 수 있는데’ 피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단정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죄가 구세주를 자극했고, 그래서 그분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크게 노하셨습니다.

의화단을 척결하기 위해 만든 8개국 연합군
의화단을 척결하기 위해 만든 8개국 연합군 ©지미 블로그 캡쳐

선교사가 항상 명심해야 할 목표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를 고려해 볼 때, 선교사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살거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토착민 회심자들이 올바른 가르침을 얻는 동안에는 외국 선교사가 함께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혹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잠시 없는 것도, 배운 내용을 생활에 적용하도록 회심자들을 이끌어 주는 데 유익할지 모릅니다.

예수님 제자들조차도, 그들의 스승이 ‘떠나가는 것’이 유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생각해야 할 점들과 별개로, 압박이 심한 시기에 토착 교회를 홀로 남겨두는 것이 잘 훈련된 토착 교회의 실제적인 부흥을 위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개신교 선교사는 토착 교회가 서양인들과 서양 물자에 계속 의존해야 한다고 고집하면 안 됩니다. 대신 개신교 선교사는 모든 사건, 심지어 당장은 재난처럼 보이는 사건들까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로 여겨 가장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중국인 회심자들을 다그쳐 스스로 생각하여 행동하게 하고, 혼자 전적으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교회의 중대한 문제들을 대면하게 하는 모든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선교사가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얼마간 회심자들과 떨어져 지낸다면, 비록 그런 분리가 양쪽 모두에게 고통스럽겠지만, 선교사는 그것을 토착 교회가 젖을 떼고 ‘코에 호흡이 있는 인생을 의지하기를 중단하고 하나님을 영원히 신뢰하게’(사 2:22) 하는 과정의 유용한 단계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 “영원한 반석”(사 26:4)이 되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아기 젖을 뗄 때, 아기에게 불친절한 것도 아니고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엄마가 냉혹하기 때문에 젖을 달라고 보채는 아기 울음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엄마가 아이를 계속 업고 다니겠다고 우기면 아이가 언제 걷는 법을 배우겠습니까? 아이를 등에서 내려놓고, 제 발로 걷게 하는 것이 아이를 친절하게 대하는 행동입니다. 아이가 힘들어하더라도, 엄마는 친절하게 그렇게 강요할 것입니다. 제 발로 서는 법을 아이에게 가르치려면 상당한 고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고통은 아이의 행복에 필수적입니다. 역사가 짧은 중국 교회는 어린아이입니다. 중국 교회가 얼굴을 찌푸리더라도, 스스로 일어나라고 그들을 강압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한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금욕주의는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중국에서 특별한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어떤 형태든지, 금욕주의 때문에 특별한 사역을 이어가는 선교사의 능력이 손상된다면, 그것은 선교사의 의무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입니다.

발췌: 존 로스 선교사의『만주선교 방법론』
번역: 순교자의 소리(www.vomkorea.com), 감수: 리진만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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