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랫동안 자신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원래 상태로 두었던 지인이 자신의 프로필에 얼굴 사진을 올려놓았다. 그분의 지난 시간과 일상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분이 자신을 개방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무척 반가웠다. 온갖 SNS 채널을 통해 거의 경쟁적이다시피 자신의 경험을 개방하는 것이 일상이 된 시대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진정한 속마음의 생각과 감정 경험은 더욱 숨기고 언급하지 않는 시대 아닌가? 이러한 때 조용히 자신의 최근 모습을 올린 지인의 행동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회복되고,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마음의 소원이 담긴 의미로 해석되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로 태어났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창세기의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를 매우 기뻐하셨다. 창조는 완벽하게 선하고 아름다웠다. 단, 하나님의 눈에 좋지 않게 보인 것은 하나였다. 그것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었다(창세기 2장 18절).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이 인간 창조 즉, 아담의 창조이었다면 그 완성은 하와의 창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인도 하심 안에서 아담은 그 아내를 사랑의 대상으로 대하고 수치심 없는 아름다운 가정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것을 본다(창세기 2장 23-25절). 그렇다. 사람은 인간관계 안에서 힘을 얻고 지지받으며 그 능력으로 자신의 소명을 감당하며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관계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가 가장 상처받는 존재 또한 사람인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주 양육자인 엄마의 관계로부터 관계적 욕구의 완전한 충족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숙명적인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것은 신 정신분석학자인 도널드 위니컷(D.W.Winnicott)이 주장한 것과 같이 엄마의 ‘충분히 좋은 양육’의 실패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이 주장한 것과 같이 원래 아이의 내적 환상(Phantasy) -fantasy가 아닌- 자체가 완전히 충족될 수 없는 엄마에 대한 기대를 만들어 놓고 그 기대의 불충족을 원망하는 운명적 존재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 인간이 인간에 대한 기대를 하고, 다시 좌절하고 또 그래도 다시 기대하고 섭섭함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선한 이들이 더 많고, 나를 이해해 줄 그 누군가가 있음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끝까지 붙들고 살아야 하는 아름다운 기대가 아닐까 한다.
전통적으로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성격적 특성을 5가지로 추려왔다. 소위 ‘Big 5’라고 불리는 이 성격적 특징은 외향성, 개방성, 우호성, 성실성 그리고 신경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이다. 물론 앞의 4가지 특성은 많을수록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반면, 마지막 다섯 번째 특성은 과다할 경우 여러 심리적인 문제를 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지인은 이 개방성이 점점 높아지는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내 마음이 기쁘고 이것을 시작으로 다른 좋은 성격적 특성들이 살아나지 않을까 기대도 하게 되었다.
말이 많아지고, 진정한 대화 라기 보다 소리가 많아지는 시대, 진정한 속마음을 나누는 것이 부담스럽고, 스스로 위축되고 은폐시키는 것이 더 많아지는 것 같은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개방시키는 용기를 다시 내어보도록 하자. 그 소란스러운 소리들 속에서 나를 지지하고 또 내가 지지해 줄, 진정한 내 모습을 개방하고 만나며 공유할 인간 천사들이 있음을 기대하며 말이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경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