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한국 북한인권 증진을 위한 국제컨퍼런스
박명수 교수 ©장지동 기자

올해는 정전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정전 7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북한의 인권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기독교 선교사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글의 독자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70년 전 정전협정을 맺을 때 가장 중요한 이슈가 바로 포로송환문제였습니다. 이승만은 당시 미국과 유엔군의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그의 직권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했습니다. 이것으로 정전협정이 위기를 맞았고, 이승만은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에서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고, 강제로 반공포로를 북송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의 행동이 정전협상을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런 이승만의 행동은 한국전쟁의 목적이 자유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려 주었고, 결국에는 미국은 한국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한미동맹을 맺게 되었습니다. 과거 이승만은 국제사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는데, 지금 우리는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우리의 선교사들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좀 더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모든 문제의 근원은 한반도의 분단입니다. 1945년 8월, 미국이 처음 38선을 제안했을 때, 이것은 한반도를 둘로 나누는 국토분단선이 아니라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작전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무부는 1945년 8월 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에게 민간문제에 관하여 미소가 함께 한반도 전체를 위한 중앙정부를 만들 것을 소련 측에 제안하도록 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소련의 대답이 9월 20일 문서입니다. 그것은 북한에 단독정부를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은 이 군사작전선을 국토분단선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련은 자신이 차지한 한반도 북부에 결코 민주주의정부가 세워지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미국이 주장한 것은 38선 철폐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이것을 결코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모스크바외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관철시키지 못했습니다. 소련은 이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오르는 것조차도 거부했습니다. 미국은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를 통하여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통일/민주/독립정부수립을 결의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북한지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결국 남한에만 정부를 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엔의 결의는 한반도의 분단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선거가 가능한 남한에 정부를 세우고, 그 다음에 기회가 되는 대로 북한에도 총선서를 통한 민주정부를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1948년 대한민국의 수립은 분단국가의 출발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통일국가를 위한 첫걸음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엔은 이 일을 위해서 유엔한국위원단을 만들어서 이 일을 계속 추진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소련과 북한은 유엔한국위원단의 통일노력에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박사의 주장도 처음에는 38선 철폐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한민족은 한 몸인데, 이것이 나뉘어지면 결국 다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38선 철폐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그 다음에 남북협상대표로 들어가서 한반도를 통일국가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이승만이 협상대표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승만은 하는 수 없이 남한에 따로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지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것이 남북의 분단으로 이해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승만은 1948년 3.1절을 맞이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의 몸에 한편이 죽어가는 경우에는 살아있는 편(便)이라도 완전히 살려서 죽은 편을 살리기를 꾀할 것인데, 다른 방책 없이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면 살아있는 편까지 마저 죽어버리자는 것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이북 동포들은 사지에 빠져 하루가 10년같이 이북 동포들이 살려낼 기회가 있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이때에 우리가 아무 것도 않고 방임하고 있다면 이는 인정도 아니요 동족상애의 도리도 아닐 것이니 우리는 할 수 있는대로 매진하여 같이 살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의 주장은 남한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튼튼하게 해서 그 힘으로 남북을 통일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948년 대한민국의 성립은 분단의 고착화가 아니라 자유통일의 1단계입니다.

이승만은 1950년 6.25 전쟁을 바로 통일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북한이 먼저 38선을 침범했으니 이제 38선은 무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38선이 철폐되지 않는 한 통일이 없고, 통일이 없는 한 평화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 전쟁을 통일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이승만은 전시 작전권을 맥아더에게 이양했지만 38선을 돌파하는 것은 독자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아울러서 이미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승만은 반공포로석방도 미국의 작전지휘권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는 통일과 자유를 위해서는 전적으로 한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953년 7월 미국의 정전제안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미국 정부의 가장 큰 과제는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정전을 수용하는 대신에 중공군의 위협으로부터 한반도를 지킬 수 있는 한미방위조약을 맺었습니다. 이제야 대한민국은 튼튼한 울타리를 갖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통일의 꿈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치하에서 자유를 잃고 살아가는 동포들을 해방시키지 못한 아쉬움입니다. 이것은 그가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7월 27일 발표한 북한동포에게 보내는 성명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동포여 희망을 잃지 마시오. 우리들은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체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민족의 기본목표 즉 북쪽에 있는 우리 강토와 동포들을 다시 찾고 구해내자는 목표는 계속 남아 있으며 결국 성취되고야 말 것입니다.”

저는 정전 70주년을 맞이하며, 이승만 박사가 북한 동포들에게 한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고 싶습니다. 북한의 수많은 동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굶주림과 고통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리 민족이 여전히 우리 민족의 기본목표를 한반도의 통일과 북한동포의 자유확보라고 생각하는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북한에 있는 선교사들의 석방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북한에 들어간 우리 동포를 석방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기본목표인 북한동포의 자유를 확보하는 첫 걸음입니다. 이 첫 걸음이 놓여진다면 그 다음 발 걸음도 가능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첫걸음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리길도 반걸음부터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첫걸음이 성공하면 다음 천리길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첫걸음을 바로 놓게 되면 그것은 이미 반절을 달성한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바로 그런 반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 글은 지난 7월 21일 필자가 평화한국과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정전 70주년 기념 북한 인권문제 세미나에서 행한 개회사를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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