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알고보면 참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R.C 스프라울 목사님은 에서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약간의 순서를 바꾸고 여기에 제 의견을 첨가해 소개합니다.

① 첫 번째 부류는 은혜의 상태 안에 있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실히 알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일상생활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경험하고 삽니다.

② 두 번째 부류는 은혜의 상태에 있지도 않고 아예 무시하는 불신자들입니다.

이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특이한 것은 그 사실을 자기들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없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은 하도 죄가 많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껄껄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웃을 일인지 모를 일입니다. 그는 아마 지옥의 불길의 참혹함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따위 지옥 같은 이야기를 믿으라는 것을 매우 무시하고 큰소리칩니다.

③ 세 번째 부류는 이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음에도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주로 이단적인 교리를 신봉하거나 혹은 성경말씀을 자기식대로 해석하거나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미안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성경에 계시되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의 뜻과 의미를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혁신학은 이미 이런 부분에 대해 충분히 연구하고 검증된 해석의 방법과 원칙과 원리들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왜 개혁신학이 중요한가 하면 바로 성경해석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④ 마지막으로 네 번째 부류는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부류입니다. 즉, 은혜의 상태 아래 있지만 그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를 안타깝게 만듭니다. 이미 자신이 구원을 받았음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마치 오리새끼가 닭 어미 품을 빌려 태어나고 자란다 해도 오리는 오리고 닭은 닭입니다.

3.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들

이제 오늘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은 네 번재 부류의 사람들은 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다섯 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확신이 없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당연히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회심하기 전의 인간은 의인이 아닙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3:11), “다 치우였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3;12)고 밝힙니다. 그래서 죄인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아니 찾을 능력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회심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삽니다.

그런데 죄인은 늘 도망자처럼 삽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숨기에 바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을 피해 숨은 것처럼(창 3:8) 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려고 애를 씁니다. 따라서 누군가 그에게 접근하여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면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왜 놀랄까요? 자기도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죄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구원을 받지 못한 자기 인생의 비참함이 무엇인가를 숨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영생의 도리, 즉 구원의 진리에 대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의 도리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려운 진리를 가르치자 제자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요 6:63절을 보니,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매료되어 따라다니면 무언가 얻는 것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추종했던 일부 제자들이 예수님이 점점 이상한 말을 하고 자신들이 기대하는대로 움직이지 않자 분노와 함게 발길을 돌린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향해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열두 제자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그 누구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좋아합니다’ ‘훌륭합니다’ ‘구원의 가르침을 확실히 이해하고 내가 받은 구원을 확신합니다’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베드로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의중을 간파하고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파해야 할 것은 베드로처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지 않으면 누구도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없으면 누구도 신앙의 발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확신이 있었기에 다른 추종자들처럼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가장 가까이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지식이 없이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셋째, 영적 침체로 인해 확신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영적 변질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기록했습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가 주로 예레미야서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히브리어로 ‘메슈바’이고, 우리말로는 ‘패역함’입니다. NIV 등 현대성경은 ‘반역’(rebellion)이라 변역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에 대해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반역함이 심함이니이다”(렘 5:6)고 지적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사 63:10)고 하고 말하면서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4)고 당대의 백성들을 고발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이면서 여호와의 교훈을 듣기를 거부하고(사 30:9), 여호와의 영광과 무가치한 우상들로 바꾸었으며(렘 2;11), 종교적인 행음에 몰두했습니다(호 4:10~11). 백성들은 집단적으로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께 ‘메슈바’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이 언약백성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깊은 침체의 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 그 귀하고 귀한 택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에 깊은 영적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들에겐 더 이상 구원의 빛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삶이 피폐했겠습니까? 만약 당신에게도 이런 영적 어둠이 내려앉았다면 당신의 인생은 참으로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될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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