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오경환 박사
오경환 박사(총신대 기독교교육)

닐 포스트만은 「교육의 종말」에서 교육에서 통일된 목적이 없다면 교육은 쓸모없는 것이 될 위험성이 다분하다고 지적했다. 다원주의화된 사회와 파편화된 개인주의 사회에서 오늘날 교육의 의미 목적에 대한 논의와 담론은 진척을 보이지 못한다. 기독교교육의 통일성 있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각기 자신의 처한 신학적 입장, 교리적 차원에서 다른 답을 제시할 것이다. 기독교교육은 하나의 통일성 있고 일관성 있는 교육의 목적을 제시하지 못함으로 인해 현재 교회를 비롯한 교회학교, 기독교 성인 교육 프로그램, 각종 기독교 대안학교를 비롯한 학교 기관에서 기독교교육은 마치 계륵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 지구적으로 유례없던 전염병인 코로나19는 교육의 의미와 목적 방향에 대해 다시금 물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코로나19는 교육혁명을 가속화시켰으며 이로 인해 각 교육영역과 분야에서 다양한 담론과 논의는 이전보다 더욱 활발해졌다. 특히, 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최첨단 과학기술융합의 시대는 교육의 목표와 목적, 교과내용, 교육방법론, 교육공학, 교육평가 등의 모든 교육에 포함되는 구성 요소들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최첨단 융합 기술인 인공지능(A.I.) 시대에서의 예배하는 인간 형성을 위한 기독교교육의 방향성에 대해 모색한다. 시대와 문화, 역사가 급진적으로 변화할지라도 기독교교육의 목표는 성경에 철저히 근거하여 통일성 있고 일관성 있어야 한다. 기독교교육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학습자인 인간이며 본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인간 전제에 대한 이해, 인간의 존재와 지위에 대한 총체적이고 성경적인 이해가 필수적이다. 인간은 현 사회와 문화 속에서 존재하며 역동적으로 사회 작용하는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이기 때문에 현 시대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먼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기독교 교육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인공지능 시대에 이러한 인간의 교육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본 후, 이에 대한 기독교교육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시사점과 의의를 살펴보려고 한다.

개혁주의 입장에서도 본 논문의 주제는 살펴볼만한 충분한 의의가 있다.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 나라 언약 신학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이며 특히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다. 개혁신학은 영적 각성과 교회 부흥을 위한 분명한 비전을 제시함과 동시에 현실의 타락한 삶을 인식하고 이에서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동력을 충분하게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개혁주의 신학은 성화를 중요한 특징으로 한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 를 처음 출판했을 때 책의 부제는 “경건에 대한 개요 포함”이었으며 칼빈은 경건 생활을 통한 실천적 성화에 대한 부분을 각권에 할애하여 저술하였다.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의 본성 전체를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운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성화는 성도의 긴 영적 여정의 과정 가운데 진행되며 온전한 성화를 위해서는 성도 각 개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참여함으로 거룩을 향해 전진하는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본래대로 회복케 하는 것이 기독교육의 중요한 일차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기독교교육의 주요한 목적은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며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이뤄진다.

만일 기독교교육의 목적이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이 회복되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라면, 이 지점에서 본질적 질문은 ‘오늘날 기독교교육이 교회 공동체에서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가?’이다. 사실 기독교교육의 목적은 행동이다. 기독교교육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인간 존재 지위의 변화와 형성에 있으며 많은 실천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여러 복음주의 선교단체나 혹은 지역 교회에서는 성경 말씀, 신조, 교리 등을 가르쳐 생각을 변화시키면 행동이 변화할 수 있다는 소박한 주지주의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이에 토대로 여러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설계하여 시행하여 왔다.

미국 칼빈대학교(Calvin University)의 철학과 교수이며 개혁주의 전통을 충실하게 연구하는 실천 지향적이며 목회 지향적인 신학자, 실천가, 교육철학자인 제임스 스미스(James K.A. Smith)는 많은 기독교 교육 모형이 인간을 ‘생각하는 사물’로 보는 근대적 인간관을 반영하여 기독교를 일종의 교리와 신념 사상의 집약체로 이해하고, 이로 인해 기독교교육을 단순히 지식과 정보의 습득을 통한 변화를 시도해 왔다고 지적한다. 기독교교육은 단순히 “정보 전달적(informative)” 인 것이 아니라 “형성적인 것(formative)”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을 합리적 사고의 결과물로 잘못 이해하는 미숙하고 잘못된 행동 철학을 전제하는 경향이 기독교교육의 인식론과 인간론에 다분하다고 그는 지적한다. 근대적 인간론의 출발을 연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감각과 몸을 제외시키고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는 사물’(res cogitans)로 이해하며 지성을 인격체의 관제 센터로 설명한다. 나라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비물질적 지성이나 의식이며 인간은 근본적으로 관념과 이성적 활동에 의해 규정되는 생각하는 사물이라는 ‘합리주의적’, ‘주지주의적’ 인간관을 제시한 것이다. 개신교는 이러한 합리주의적 인간관을 전적으로 수용하여 지나치게 인지 중심적 인간관을 기반으로 기독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지에 대해 주지주의적인 관점을 발전시켜 왔다. 다시 말해 개신교 예배가 기독교 사상을 개념적이고 추상적 가치를 전파하는 ‘메시지’ 자체에만 집중하게 된 이유는 인간의 배움이 단순히 사상과 신념을 지성이라는 인격 관제 센터를 통해 전달되면 인간의 몸과 지각, 전인격이 새로운 행동과 실천을 나을 것이라는 다소 순진한 인간 모형에 근거하여 기독교교육 프로그램이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미스는 인간은 생각하기 이전에 믿는 자이며, 욕망하는 자이며, 믿음이 사상보다 더 ‘근원적’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은 종교적인 피조물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스미스는 인간을 목적론적(telelogical) 피조물로 이해하여 형성적이지 않은 중립적 교육은 없으며 교육은 결국 우리의 오장육부, 즉 우리의 ‘카르디아’인 몸을 통해 우리를 사로잡는 욕망의 교육 방식이 보다 더 성경적 전통과 의미 있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바대로 살기보다는 사랑하고 갈망하는 바 본인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며 이 말은 곧 인간이 텔로스적 존재로서 욕망과 열망, 갈망과 소망에 의해 추동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예전적 인간(Homo Liturgicus)으로서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욕망하고, 갈망하고, 예배함으로 정체성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인간이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고 열망하는지를 이해하여 참된 것을 바르게 갈망하고 예배하는 것이 기독교교육의 출발이라고 지적한다. 스미스의 인간론과 교육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 지성과 행동의 간극, 앎과 행함의 간극, 지성과 실천의 간극, 이성과 영성의 간극이 왜 이토록 처참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풍성하게 제공해 준다.

기독교교육은 이제 지성적 인지 중심적 주지주의적 근대적 인간 모형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형성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회복될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교육은 생각하고 믿는 것에만 과도한 초점을 맞추다 보니 실제로 우리가 사랑하고 욕망하고 예배하는 것의 지향성과 중심성 우선성을 놓치게 되었다. 인간은 아는 것(knowing)과 행하는 것(doing) 사이에 질적 차이가 있음을 일상 속에서 경험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히 더 많이 생각하거나 더 좋은 것을 생각하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다. 우리는 마음의 습관을 바꾸지 않고 얼마든지 생각과 의식으로만 동의할 수 있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행하는 일상의 구체적인 행동과 세상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실천”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영적 갱신에 필요한 것은 세계관을 다시금 재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습관”을 갱신하여 다시 새롭게 우리의 실천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스미스는 설명한다. 그러므로 형성적 기독교교육은 기독교적 실천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며 실천된 형성만이 우리의 습관과 지향과 욕망을 변화시킬 수 있다. 무언가를 실천함으로 인간은 배우기 때문이다. 형성은 반복적으로 몸에 익숙하게 하는 . . 공동체적 실천을 통해 가능하고, 핵심적 실천은 바로 기독교 예배의 실천이라고 스미스는 강조한다.

기독교교육의 통전적 모형은 반드시 욕망(desire)의 교육을 포함해야 한다. 요한복음 1장 38절에서 예수가 요한의 두 제자에게 물었던 근원적인 첫 번째 질문인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what do you want?)”는 인간의 정체성과 근원, 지위와 본질을 꿰뚫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며, 이는 인간이 형성을 통해 새롭게 변화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래 의도와 목적에 맞게 인간이 여러 의례와 실천을 통해 형성되고 궁극적으로는 행동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한국교회의 기독교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2.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형성

4차 산업혁명에서 인공지능은 현재와 미래를 설명하는 기술 용어로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나노테크놀로지 로봇공학 컴퓨터화된 지능이 대표적인 기술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의 큰 특징은 인류가 이전에 전기화했던 기술들이 이제 인지화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즉, 인공지능은 기술의 융합을 통한 첨단 기술의 총체이다. 인간 고유의 능력으로 여겨졌던 지적 역량을 컴퓨터화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해졌으며 이 기술을 통해 인공지능은 각종 산업 분야에서 상용화가 빠르게 진행 중이며 물론 교육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을 통한 교육은 학교 혁신의 지렛대로 교육 분야에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인공지능과 관련된 교육적 논의는 단순히 기술의 설계, 개발, 활용 및 적용과 관련되어 진행될 뿐 교육의 목적과 관련된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인공지능에 대한 교육,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교육, 인공지능의 교육적 활용 모두에서 규범적으로 제기되어야 할 윤리적, 철학적, 신학적 토대와 담론은 효율성 상업성 기업과 산업의 이윤 추구 논리에 이용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트랜스휴먼을 넘어서 포스트휴먼을 꿈꾸고 있다. 물리적 신체향상을 통한 인간 능력의 극대화를 꿈꾸는 인공지능 기술이 개발된다면 인간의 주체성, 인간의 존재와 지위에 대한 논의가 매우 중요한 사회적 담론이 될 것이다. 최첨단 기술의 총아인 인공지능의 시대에서 인간의 지위와 존재를 다시금 물어야 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먼저 4차 혁명시대의 기독교교육은 고유의 전문성과 정체성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현재 기독교교육이 처한 내부적 상황을 먼저 성찰하고 외부적 환경을 진단하여 새로운 방향을 제안해야 한다. 기독교교육을 둘러싼 외부의 시대적 환경은 인공지능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공지능 시대에서는 인간 자체의 정체성과 핵심적 본질, 인간의 고유한 특징과 성질이 중요한 담론이 된다. 인간의 사고는 기계처럼 단순히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욕망, 사랑과 희망을 수반하며 비판하고 통찰할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 기계 자체가 결코 스스로 무엇인가를 사랑하거나 소망하거나 희망하거나 예배할 수 없다. 그러나 미래의 일을 창조하고 새로운 삶을 형성하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인공지능을 통해 마주하고 습득하는 정보는 우리의 삶을 파편화하고 무의식중의 우리의 삶과 지각과 인식 형태를 변화시킨다. 수없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선택권과 자율성, 참여가 인간에게 확보된 것처럼 보이지만, 제독 철학자 한병철은 정보사회의 역설은 오히려 사람들이 정보 안에 갇힌다고 지적한다. 정보 사회에서 인간이 스스로 자율성과 자유를 획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홍수같이 밀려오는 ‘정보’에 둘러싸여 어느 것이 진리와 진실인지 무엇이 사실과 거짓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가치인지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보와 기술은 우리의 삶을 망가뜨릴 위험성을 다분히 품은 요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휴리스틱(어림짐작)과 인지적 편향, 필터 버블, 울림통 효과, 점화 효과 등은 인공지능 시대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판단과 선택, 결정들을 내리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서 기술이 주는 편리함과 예측 가능성의 안정성 즉각적인 만족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지만, 동시에 인간 상호 간의 관계 속에서 마땅히 누려야 하는 샬롬, 기쁨, 평안, 공동체성 등은 점차 밀려나고 있다. 기술집약적 시대 속에서 인간은 끝없이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이것을 다시 업데이트해야 하는 세계를 살아간다. 어느 하나에 머무르거나 지속하고 끝맺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세계 속에 인간은 혼란스러워한다. 한병철은 더 나아가 “디지털 세계의 빠른 스크롤과 클릭에 갇혀 견고한 ‘사물’과 관계 맺는 일은 점점 줄어들며, 공동체를 굳건하게 유지하던 공동의 느낌은 공유되지 않은 채 단기적 흥분에 밀려나 버린다”고 지적한다. 인공지능 시대의 기술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접속이 아니라 단절과 차단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공동의 가치와 기술, 의례와 의식이 오히려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는 퇴보적 상황에 처해 있다. 사실 인공지능은 자신이 하는 일을 인식하여 이를 토대로 창의적, 창조적, 예술적 일을 행할 수 없으며, 단지 수없이 많은 가공되고 축척된 정보 데이터를 통해 가장 최적화되고 효율적인 결과에 도달하는 기계적 시스템일 뿐이다. 현재 Chat GPT를 비롯한 인공지능의 활용과 그 결과에 대한 논의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거나 혹은 지나치게 그 우려와 염려가 축소된 상태로 담론이 진행 중에 있다.

고대 그리스부터 서양 사상사까지 일반적으로 몸은 영혼과 대비된 정신의 하위 개념정도로 취급되었다. 오늘날 교육의 역사 속에서 몸은 영혼 혹은 정신과 대립적 개념으로 수동적 객체 혹은 영혼의 도구나 매개로 이해되었다. 4차 산업혁명의 인공지능 시대가 왔음에도 여전히 교육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통한 인간 정신능력의 극대화를 꿈꾸며 신체적, 감정적, 정서적, 미학적 영역은 하위 영역으로 치부되고 있다 기독교교육 역시 인간을 일차적으로 생각하는 사물로 이해하는 철학적 인간론을 받아들여 수용하여 그 결과로 정보 전달과 지식 습득의 관점에서 교육이 이해되었다. 그러나 인공지능 시대에서는 인간의 지각과 감정, 정서와 느낌, 이성과 지성 모두를 포함하는 교육적 이해가 필수적이며 이는 근본적으로 교육, 의 목적에 대한 논의와 담론을 통해 인간의 지위와 본질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다시 , 핵심적 교육의 주제가 될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형성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인간 삶의 방향성, 지향성, 텔로스가 존재하느냐의 문제이며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느냐이다. 기술집약적 사회와 기술의 이름으로 인간이 소외되며 기술의 활용으로 산업적 논리가 횡행하는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텔로스가 없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 일반 교육의 목표는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며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돕는 것이다. 반면,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삶을 살아내도록 돕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에서는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이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개혁주의 교육의 텔로스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육은 사변적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전인과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훈련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바로 이 교육이 “하나님 나라 왕국에서의 삶 전체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변하지 말아야 할 기독교적 가치와 비전이 존재하며 이는 마땅히 기독교교육의 핵심 목적이 되어야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비전, 즉 하나님의 백성의 풍성한 번영과 샬롬(Shalom)에 대한 비전이 있다. 구약의 시가서와 예언서에 나타난 비전이자 신약에서도 에이레네(eirene), 평화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비전이다. 온전함, 안녕, 평안, 기쁨, 건강 등의 의미를 지닌 폭넓고 역동적 개념인 샬롬은 창조 세계부터 이미 나타난 비전이자 성경 전체에 등장하는 텔로스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깨어진 관계의 회복, 하나님과 나, 나와 타자, 나와 자연, 나와 나의 자아가 온전하고 풍성한 질서와 순종의 관계,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 온전한 상태이다. 즉, 샬롬은 우주적 번영과 풍성함과 건강과 감사와 기쁨이며, 이것은 곧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허락하신 충만한 상태이다. 기독교교육을 통해 이 샬롬의 텔로스가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정체성을 결정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의 텔로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재현함으로 삶의 구체적인 성품 형성과 실천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관념과 정보로 가득한 기독교교육이 아니라, 이러한 잘못된 형성과 방향 설정에 대항하기 위한 의도적, 예전적, 형성적, 교육적인 기독교 예배를 실천해야 한다. 기독교 예배의 실천은 창조될 때 부여된 하나님에 대한 욕망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며, 기독교 예배는 그 자체로 세속주의의 욕망과 거짓된 신들에 맞선 대항적 형성(counter-cultural formation)의 기능을 수행한다. 월터스토프는 개혁주의를 포함하여 기독교의 오늘날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는 개인 믿음의 확신과 세상에서의 성결한 삶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공예배 실천의 의미와 중요성을 놓친 것이라고 적실하게 지적한다. 공예배 실천의 중요성은 예배와 삶의 반복적 순환이라는 리듬을 부여하고 공동체의 예배와 세상에서의 삶의 불가피한 관계를 명확하게 가르쳐 준다.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시대에서의 인간성 상실은 인간 고유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질문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금 기독교교육의 텔로스와 인간의 형성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을 요청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예배를 통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며 마땅히 지향해야 할 것을 욕망하는 예전적-텔로스적 인간의 형성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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