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22:41-46)

그리스도 논쟁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8:51)라고 선언했습니다. 당장 바리새인들이 주축이 되어서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요8:53)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라고 다그쳤습니다. 주님이 당신을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하나님과 동격의 위치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해 주님은 “아브라함도 당신의 때를 보고 기뻐하였고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주님이 계셨다면 과거시제로 내가 ‘있었느니라’고 해야 하는데 “내가 있느니라.(I am)”고 현재형으로 말했습니다.(요8:58)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때도 현재형으로, 또 바리새인들과 논쟁하고 있는 그 현장에도 현재형으로 계신 존재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반발하는 이유 그대로 당신은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백성과 언제 어디서나 함께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I am.”의 헬라 원어 “에고 에이미”는 떨기나무 불꽃으로 임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에게 직접 가르쳐 준 당신의 이름인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출3:14)

당시 극도로 흥분했을 바리새인들로선 예수님이 현재형으로 표현한 그 숨은 의미까지는 정확히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신에 삼십 대 초반의 랍비가 이천 년 전 사람인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하니까 귀신 들려 정신이 이상한 자로 취급하고서 돌로 쳐서 죽이려 들었습니다. 주님의 정체성에 대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이런 반발과 분노가 공사역 내내 확대되어서 결국은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만든 것입니다.

본문은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거꾸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42절)라고 질문하신 내용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은 자’라는 뜻인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번역인데,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구세주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고 물은 주님의 숨은 의도도 당신께서 영원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다시 확실하게 밝히려는 뜻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야곱의 유언을 통해 유다 지파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창49:8-12) 또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다윗 왕과 영원한 왕권에 대한 언약을 맺었기에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고 믿고 있었습니다.(삼하7:1-17) 그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다윗의 아들이라고(The Son of David) 즉, 육신적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에 대해서 주님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45절)라고 반문했습니다. 까마득한 손자뻘 되는 사람에게 선조 다윗이 주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으냐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그렇게 고백한 시편 말씀을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110:1)라고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바리새인들로선 예수님의 말씀에 가부 간의 어떤 답도 할 수 없어서 난감해졌습니다. 다윗이 잘못 말한 것이라고 하면 구약성경을 부인하는 결과가 됩니다. 다윗의 말이 옳다고 하면 아브라함도 후대의 메시아를 볼 수 있다는 뜻이 되므로 이전에 예수님의 말씀을 꼬투리 잡았던 자기들이 틀렸다는 뜻입니다. 자기들이 성경을 해석 적용하는 방식에 일관성이 없어질 뿐 아니라, 예수님이 당신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이 옳다고 시인하는 결과가 됩니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이 질문을 하게 된 계기가 흥미롭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유대 대중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21:9)고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 후로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논쟁이 계속 이어졌는데, 성경을 잘 모르는 백성도 당신을 다윗의 후손 즉, 메시아라고 환영하는데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너희들은 왜 그러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나아가 너희가 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아도 좋은데 왜 아무 잘못 없는 나를 죽이려고 모의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로선 더더욱 한마디도 대답하 못 하고 물러갔습니다. 그날부터 감히 주님에게 묻는 자도 없었다고 해서 주님의 말씀을 수긍한 것이 아니라 자존심이 크게 상해 시기심과 증오심만 더 늘어난 것입니다. 이 논쟁은 마지막 고난 주간에 있었기에 이후로 그들은 주님을 어떻게 죽일지 구체적인 모의를 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곧바로 남아 있는 일반 유대인 무리와 제자들에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일곱 가지 잘못을 통렬하게 지적하면서 그들의 가르침은 듣되 행위는 절대 본받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마23장)

그리스도의 정체성

주님의 이 질문이 이전에 아브라함 건으로 귀신 들린 자라고 멸시받았던 일에 대해 앙갚음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당신께서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논리정연하고 우월하다는 점을 과시하려는 뜻도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사역 내내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멸시 박해를 받았으며 죽이겠다는 협박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당신께서 그들에 맞서 싸우려거나 심지어 야단친 적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어리석고 죄 많은 인간의 실상을 잘 아시는 하나님으로서 아무리 당신께 잘못하는 자라도 연약한 인간과 대놓고 다투는 것은 당신의 성품은 물론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완전히 상충됩니다. 실제로 주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은혜를 원수로 갚은 그들도 사탄에 미혹되어 너무나 비참한 처지에 빠져 있음을 알기에 오히려 용서를 빌어주었습니다. 그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해주었지 않습니까?

주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한마디 대답도 못 하고 떠난 후에 그들을 저주하는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이 갈 데까지 가서 절대 돌이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 것은 이미 결정해 놓고 그 구실과 방법만 찾고 있었을 뿐입니다. 주님이 남은 무리에게 너희는 그들을 닮지 말라고 했으니 사실은 후대의 신자들에게 종교 지도자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위선에 대해 미리 경고해주려는 뜻이었습니다.

주님의 다윗에 관해 질문한 것도 바리새인들보다는 그 자리에 함께하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정확히 가르쳐 주려는 뜻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라고 풀어주었습니다. 만약 다윗에게 성령이 역사하여 자기 후손인 메시아에 대해 주라고 칭할 수 있었다면,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에게도 성령이 역사하여 자기 후손으로 올 메시아에 대해 알게 해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는 당신의 말씀을 이 다윗의 시편에 견주어서 잘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런 고백이 없었다면 너희가 나를 미쳤다고 비난해도 되지만, 이 시편은 물론 구약성경 전체를 잘 살펴보면 당신이 그리스도라고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했는데 앞의 ‘주’는 성부 하나님이고 이어지는 ‘내 주’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그의 원수를 그의 발 아래 둘 때까지 천국 보좌 우편에 앉아 있으라고 하셨으니까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최초 인간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 금령을 어기고 하나님을 거역 대적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그분과 영적으로 단절되는 사망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이브가 사탄의 거짓 유혹에 넘어간 것이 결정적 원인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는 당연히 그리스도이며, 그럼 사탄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가 되므로, 다윗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발 아래에 둘 원수도 바로 사탄입니다.

결국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은 그리스도가 사탄을 멸하여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실 하나님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바울도 그래서 “복음은 선지자를 통해 성경에 계시 된 약속으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나 성결의 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롬1:2-4)

예수님이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8:51)고 선언한 뜻이 무엇입니까? 원죄 하에 태어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어떤 죄인도 당신을 순전히 믿고 따르면 죽음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서 그분과 영원토록 충만한 은혜 가운데 교제 동행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이유

정작 문제는 처음부터 주님을 미워했던 지도자들보다 주님을 다윗의 후손이라고 열렬히 환영했던 백성들이 며칠 만에 정반대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왔으니 하나님이 다윗 왕과 언약한 대로 이스라엘의 왕권을 영원히 세워달라는 자기들의 요구를 주님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이라는 한 개인에게 로마를 물리쳐 달라고 요구할 정도라면 주님의 큰 능력을 온전히 인정하고 확고히 믿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있었어도 로마를 대적하기에는 턱없이 숫자가 부족했고 제자들도 사실은 백성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주님께 똑같은 요구를 했습니다. 백성들의 주님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기에 기대가 무산되자 실망도 너무 커져서 분노와 증오로 바뀐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로마를 물리쳐 달라고 요구한 까닭이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얻고자 하는 뜻만이 아닙니다.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도 중요했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당신의 택한 백성을 이렇게 오래 고통 속에 두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 윤리로나 하나님의 공의로 따지면 무력으로 약소한 이스라엘을 점령하여서 수탈하고 억압하는 로마제국은 분명히 사악했습니다. 거기다 온갖 우상을 숭배하며 도덕적으로는 지극히 타락한 사탄의 나라라 심판받아 마땅한 대상이었습니다.

유대인들로선 현재 자신들이 겪고 있는 모든 비참한 현실이 전부 로마의 책임이라고 즉, 자기들 외부의 인간 사회의 잘못과 갈등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만 물리치면 현실적 안식은 물론 도덕적으로도 더 선해지고 종교적으로 더 경건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믿음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자가 가롯 유다였는데 로마 멸망 같은 의로운 일은 의로운 인간들의 수고와 희생으로 실천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큰 능력을 지닌 인간 영웅이 출현해서 인간 사회의 질서를 바로 잡아주길 기다렸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대 대중은 물론 제자들까지도 그리스도 즉, 예수님의 정체성을 바리새인들처럼 단순히 다윗의 인간 후손이라고 간주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메시아가 되어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실 줄은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계속)

2023/3/26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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