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 ©기독일보 DB
이와 같은 김준곤의 반공주의는 엑스플로 74 때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여의도 광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허락한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외에도 김준곤 목사가 정부로부터 받은 지원에 대해서 장숙경은 그의 박사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종합하고 있다.

“정부 역시 지난해 「빌리 그래함 집회」에 이어 방대한 규모의 본부석과 찬양할 수 있는 좌석의 설비, 수 십 만을 동원할 수 있는 군사용 텐트 5백 채와 2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로 여의도 변두리 76개 각 급 학교 3천개 교실 등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5/16 광장의 조명, 음향 등의 시설, 기타 의료 안전에 대한 준비, 1회에 만 명의 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 취사시설, 숙소와 대외장소까지 사람들을 운송하기 위한 버스까지 대여해 주는 등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체신부에서는 엑스플로 74개최 기념우표도 발행 하였다.”

사실 이와 같이 정부의 지원 하에 열린 엑스플로 74는 에큐메니칼 그룹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지금까지 NCC는 민족복음화운동을 반대하지 않았다. 실제로 1965년 민족복음화운동은 NCC 가입교단의 신자이며, 오랫동안 에큐메니칼 단체에서 활동한 김활란 박사가 주도했고, 감신의 학장인 홍현설 박사가 대표를 맡았다. 73년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역시 NCC 참가교단인 통합측의 한경직 목사가 주도했다. 사실 빌리 그래함은 항상 자신의 전도집회를 여는 조건이 그 지역의 NCC의 동의를 얻는 것이었다. 하지만 엑스플로 74는 복음주의 학생단체인 CCC가 주도하는 것이며, 그 대표는 합동측의 김준곤 목사였다. NCC는 엑스플로 74에 대해서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실질적으로 빌리 그래함과 CCC는 같은 복음주의성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빌리 그래함대회는 진보주의 계열이 참여하고 있었고, 엑스플로에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NCC가 엑스플로 74를 반대한 이유는 보다 깊은데 있다. 그것은 70년대 초 한국의 정치상황과 연관지어 생각해야 한다. 1972년 10월 박정희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소위 유신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어서 여기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정부와 민주화 세력의 마찰은 소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이 사건으로 종교지도자, 교수, 기독학생들을 포함한 1,024명이 투옥되었고, 그 중 180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그 중 일부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바로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이 바로 한국의 진보주의 그룹인 NCC였다. 이때부터 NCC는 민주세력의 대부로서 박정희 정부와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이것은 반공을 고리로 정부와 연대를 맺고 있는 한국의 보수세력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엑스플로 74에 대한 진보진영의 반대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왜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진보주의의 민주화운동에 함께 합류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70년대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정치적인 민주화가 아니라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는 지키는 안보이며, 절대적인 빈곤에서 벗어나는 경제문제라고 인식하였다. 서구 사상의 영향을 받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는 정치적인 민주화가 중요한 문제이지만 아직도 6/25의 경험이 생생한 한국교인들에게 북한의 공산주의는 현실적인 위협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진보주의의 민주화운동 보다는 박정희의 안보전선에 가담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70년대 초의 한국을 둘러싼 국제사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70년대 초 한국의 국제정세는 매우 불안했다. 월남전에서 고전하고 있던 미국은 월남에서 철수하여 월남은 공산화되고 있었으며, 여기에 덮쳐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었다. 한국국민들은 남한이 공산화되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은 중공과 새로운 화해시도를 하고 있었고, 1974년에는 육영수여사가 저격당했고, 비무장지대에서는 땅굴이 발견되었다. 북한은 계속 남침의 야욕을 보였다. 이와 같은 불안한 국제정세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하여금 안보를 최우선에 놓게 되었고, 결국 박정희의 일인독재를 용인하게 되었다. 당시의 정치상황으로 볼 때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지킬 수 있는 지도자는 박정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유신은 가능했고,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은 박정희의 안보논리를 받아들였다.

보수주의 기독교와 박정희의 연대는 안보논리만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은 경제성장을 제일로 하고 있었고, 이 같은 경제성장은 정직, 근면과 같은 정신개혁과 같이 나가야 한다. 따라서 박정희정부는 7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새마을운동을 벌였다. 이 같은 시점에서 한국교회에서도 대대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잘살아 보세”라는 새마을노래와 함께 진행되었다면 동시대에 일어난 부흥운동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메시지와 함께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삶의 자세는 한국사회를 새롭게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엑스플로 74를 통하여 한국교회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엑스플로 74와 진보진영의 대립은 1974년 10월호 「기독교사상」의 좌담회, “엑스플로 74를 말한다”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안병무 박사는 엑스플로 74가 신학적으로 미국의 근본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 운동이 성령운동이라고 하면서 지나치게 인위적인 조직의 냄새가 짙으며, 죄를 강조하면서 사회적인 죄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기독교가 노예해방, 남녀평등, 인간존중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이 오늘의 현실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지 않았고, 민족복음화를 말하면서도 개인의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을 둘로 나누어 후자는 전도가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대회는 민주화운동을 위해서 투쟁하다가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김의환 박사는 엑스플로는 3가지 차원의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복음주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엑스플로는 ICCC계열로 부터는 혼합주의라는 비난을 진보주의자로 부터는 역사의식이 결여된 단체라는 비판을 받았다. 둘째는 한국교회는 전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신학적으로는 뭉치기 힘들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는 전도에는 대다수가 참여한다. 셋째는 평신도운동이라는 것이다. 사실 엑스플로 74는 청년대학생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김의환 목사는 엑스플로 74가 대중들을 동원해서 대중을 조작한 운동이 아닌가 라는 비판에 대해서 엑스플로 74는 엘리트가 주도한 운동이 아니라 일반 대중이 주체가 된 운동이며, 자신들의 목적은 전도훈련이지 대중조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김준곤 목사는 치밀한 계획으로 많은 사람들을 훈련하고 동원한 것은 결코 성령의 역동성과 대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 대담에서 엑스플로 74의 주역인 김준곤 목사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엑스플로는 예수의 능력이 없이는 진정한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전체에서 출발한다고 말하면서 그 출발점은 개인이라고 밝힌다. 다시 말하면 개인이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사람 자체가 바뀌고, 그 다음 사회와 민족이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엑스플로가 개인구원에만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도와 사회행동을 구분하였다. 아무리 사회행동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전도는 될 수 없다고 김준곤 목사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맺는 말

이상에서 필자는 1965년 시작된 민족복음화 운동을 74년 엑스플로 74까지 살펴 보았다. 민족복음화운동은 냉전시대에 반공을 강조하는 박정희정부와 맥을 같이 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사실 당시 대한민국은 여전히 공산주의의 위협아래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반공의 노선을 강조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정희의 군사독재는 정당화될 수는 없다. 여기에 대해서 민족복음화운동이 소리를 내지 못한 것은 아쉽다.

민족복음화운동이 냉전체재 아래서 반공정부의 지원 아래 진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복음화운동은 근본적으로 영혼구원을 강조하는 전도운동이다. 실제로 김활란, 한경직, 김준곤은 다 같이 전도를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는 복음주의자이다. 이들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정신으로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하여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기록하였다. 아마도 한국교회역사상 가장 큰 성장을 경험시기가 이때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민족복음화운동은 단지 전도운동이 아니다. 이것은 복음전도를 통하여 민족을 살리자는 운동이다. 사실 김활란 박사, 한경직, 김준곤 목사는 다 같이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민족복음화는 민족을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발걸음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의 위협과 서구의 퇴폐풍조의 유혹 가운데 있는 이 민족을 구하는 길은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민족복음화운동을 단지 개인구원만 강조한 현실도피적인 운동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다.

필자는 민족복음화 운동은 도시화가 가져온 대중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60년대와 70년대는 한국사회가 도시로 밀려드는 시기였고, 이것은 도시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게 만들었다. 따라서 과거 일대일의 전도도 중요하지만 새로 등장한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대중들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대중전도가 시도되고 여기에서 민족복음화운동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민족복음화 운동은 처음에는 한국교회 전체의 협력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정치적인 입장과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서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로 갈라지게 되었다. 특별히 이것은 엑스플로 74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하지만 민족복음화운동을 반대한 것은 한국교회내의 지극히 소수일 뿐이었다. 따라서 민족복음화운동은 대체로 전도를 매개로한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민족복음화 운동은 한국교회의 주된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교회의 진보그룹과 근본주의적인 보수그룹이 다 같이 민족복음화운동을 반대했지만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이 양극을 배제하고 민족복음화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한국교회가 양극화되었다고 보기보다는 온건한 복음주의를 주축으로 하면서 양극의 세력이 존재하는 구도라고 말 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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