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는 말씀의 정확한 뜻이 무엇입니까?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 같아서 이해가 안갑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을 구하면 되는 것입니까? 구한다는 것이 기도를 하라는 뜻인가요? 아니면 삶에서 어떤 것을 실천하라는 뜻인가요?

[답변]

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그 정확한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만, 그중에서도 아주 간단한 원리만 알아도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는데도 질문자님처럼 혼란스러워하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 이유가 여럿 있지만 우선 목회자들이나 신자 공히 성경말씀을 너무 도덕적 종교적 계명 혹은 원리라는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어 해석적용하기 때문이다. 즉 해당구절에서 무조건 도덕적 종교적 신학적으로 경건하고 심오한, 질문자님 표현대로 하자면 형이상학적인, 가르침만 찾으려 듭니다. 성경에 대한 그런 일방적이고도 경직된 태도 때문에 정작 앞뒤 문맥 안에서 그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뜻에는 신경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성경해석의 첫째가는 원칙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첫째가는 원칙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반드시 그 문맥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원문도 장절의 구분이 없이 죽 이어져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절대로 한구절만 따로 떼어서 해석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유감스럽게도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교회 일에 충성하게 하려고 하나님 나라와 일을 그런 쪽으로 편향되게 해석하는 경향마저 있습니다. 교회와 목사에 순종 헌신하는 것을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까지 곡해해서 가르칩니다. 목회자들이 성경을 독점하여(?) 그런 식으로 왜곡시키는 오류와 혼란을 막기 위해서 신자들도 성경해석법부터 배워야만 합니다.

본문이 속한 앞뒤 문맥은 무엇입니까? 넓게는 산상수훈 전체(마5:1-7:29)와 짧게는 재물에 대한 가르침(마6:19-34)이며, 더 짧게는 염려에 대한 가르침(마6:25-34)에 속합니다. 따라서 각각의 문맥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주제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합니다.

이처럼 성경을 해석할 때에 반드시 유념해야할 사항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동일한 주제로 이야기하는지부터 분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행이도 성경은 작은 동그라미를 붙여서 내용과 주제가 달라지는 부분을 표시해 놓았습니다.

본문 마태복음 6:33이 속한 부분은 6:19에 동그라미가 붙어 있습니다. 그 구절부터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7장으로 바뀌면 동그라미 표시가 없어도 당연히 그러하고 또 7장에선 6절과 7절과 13절 등에 각기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7:1-5와 6절과 7-12는 각기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작은 동그라미에서 시작해서 다른 동그라미 시작되기 전까지는 같은 내용이므로 어떤 성경구절이라도 제일 먼저 그 두 동그라미 사이에서 뜻부터 찾아야 합니다. 한 문맥 안에서 핵심 주제를 찾으려면 논리의 흐름과 특별히 결론에 주목해야 합니다. 가장 짧은 문맥에서 찾은 본문의 뜻을 다음으로 큰 문맥, 나아가 그 책과 성경전체의 진리에 역으로 비춰서 그 해석이 옳은지 여부도 재확인해야 합니다.

문맥에서의 본문의 뜻

본문이 속해 있되 가장 짧게 잡은 문맥인 6:25-34는 어떤 내용입니까? 처음 25절부터 29절까지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입는 내일의 의식주(衣食住) 문제를 위해 염려하는 것이 아무 부질없음을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합니다.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마저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한 후에 하물며 너희는(30절) 하나님이 더더욱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책임져 주지 않겠느냐고 야단칩니다.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합니까? “믿음이 적은 자”(30절)에게입니다. 믿음이 있기는 있되 적은 자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간단히 말해 하나님이 범사를 주관하여 신자의 의식주를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이면서 내일의 의식주를 염려한다면 “믿음이 적은 신자”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가 전혀 수고를 않고도 잘 살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것들을 돌보시는 하나님 때문인 줄 알게 되고 그럼 신자 자신에 대해선 더더욱 그분이 책임져 주심을 쉽게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 바로 앞의 19-24절까지(더 넓은 문맥)의 주제는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는 원리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신자라면 재물을 밝히거나 염려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재물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여기는 불신자는 그것에 묶여 염려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5절에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여 30절까지 그 의미를 다시 자세히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31절과 32절에서 신자와 불신자(주님은 ‘이방인’이라고 표현)의 재물관(財物觀)에 대해서 다시 간단히 대조하고 있습니다. 신자는 내일의 의식주를 자신과 범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했기에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이방인은 재물을 주인으로 삼았기에 항상 염려가 끊이지 않고 그것만 ‘구하는’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구하는’ 것은 영어 번역으로 ‘seek’입니다. 원어로 “부지런히 찾다, 열망하다, 요청하다, 시끄럽게 요구하다” 등의 뜻입니다. 그 의미를 확장하여 기도한다고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지만, 전체 문맥에선 이방인이 재물을 주인으로 삼아서 재물만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이 속한 전체 문맥 19-34절까지의 결론을 살펴보십시오. 다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면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합니다. 그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도 결국 재물을 염려하지 않는 문제와 연결한 뜻이라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

성경
©기독일보 DB
살펴본 대로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만을 주인으로 삼아서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전체에서 말하는 뜻도 동일합니다.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그분 주신 소명대로 헌신하는 신자의 존재, 삶, 인생 전부가 그분의 나라입니다. 나아가 신자가 활동하며 그분의 빛을 비추어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그가 속한 모든 영역도 그분의 나라입니다. 물론 그런 자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의 사역을 행하는 차원도 그의 나라입니다.

광의로 따지면 불신세상까지 포함해 우주전체가 그분의 통치를 받으므로 그분의 나라로 볼 수 있지만, 성경에선 당연히 본문도 포함하여 그분을 진정으로 주인으로 삼은 자들과 그들에게 역사하는 그분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과 범위를 뜻합니다.

그의 의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의’(意, plan, think)가 아니라 그분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의’(義 righteousness)입니다. 신자가 정말로 당신만을 주인으로 삼아 당신의 자녀답게 살고 있다면, 다른 말로 재물을 목표로 살지 않고 재물로 인해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반드시 당신께서 입히시고 먹이신다는 것이 본문에서의 그의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내일의 의식주 문제에 대한 염려가 들거든 염려를 없애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그분의 통치)를 소망하며 그분의 나라에선 그분의 의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계속해서 내일의 의식주 문제로 염려하면 사실은 이방인처럼 재물을 주인으로 삼고 있는 불신자인데도 신자인척 하거나, 아니면 잠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잊고 있는 믿음이 적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물의 중요성과 필요성마저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내일 일은 내일에 염려하라고 합니다. 문법적으로 비교대조하여 강조하는 기법이 사용되긴 했지만 어쨌든 그 뜻만 따지면 내일 즉, 그날 하루의 일에 대해 그날에 염려하는 것은 허락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가르치신 기도에도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하루 끼니도 이어가기 힘든 고달픈 시절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본문을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했으면 그 다음에는 얼마든지 재물을 구해도 된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해선 곤란합니다. 본문의 주제는 주인을 하나님과 재물 둘 중에 어느 것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삶의 태도 특별히 내일을 염려하는 모습이 달라지고 또 달라져야만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래서 신자가 기도하며 재물을 구해도 되느냐, 얼마까지 구해야 하느냐는 물론 교회와 목사에 충성하는 문제와는 전혀 관계없는 뜻입니다. 나아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심오한 깨우침을 얻어 실천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도 아닙니다.

성경전체의 진리에 비교하면

이렇게 해석한 본문의 의미를 큰 문맥인 산상수훈의 주제와 성경전체 진리에 비추어 재확인해야 합니다. 먼저 산상수훈을 처음 시작과 마지막 결론을 주도면밀하게 살피며 반복해서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첫 구절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 가르침을 받아서 실천해야 할 자들이 예수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천국 영생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끝 부분에서 다시 천국에 관해 강조합니다.(7:13,14,21-23) 마지막에서(24-27절) 이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자는 지혜롭고 반석 위에 짓는 것이며, 실천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게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선행을 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아 사는 자는 당연히 주님 가르침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천국백성이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가르친 것이 산상수훈인 것입니다.

성경 특별히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라고 말할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당신의 아들로 십자가에 죽이시고 죄의 대가를 완전히 치르게 한 반면에 죄인들은 당신의 긍휼로 살려주는 은혜를 말합니다. 예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예수님 그분의 의에 힘입어 의롭다고 칭함을 받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그에 대해 설명하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16:8-11)

예수님이 제자들과의 마지막 성찬 때에 당신 대신에 오실 성령님이 하시는 역할이 성도들에게 십자가 구원진리를 깨우쳐서 당신을 믿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고전12:1-3참조) 그래서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며, 십자가로 사탄을 심판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당신께서 승천한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십자가로 구원사역을 완성하고 하늘보좌에서 성자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찾은 것, 한마디로 십자가 구원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간단히 정리하겠습니다. 신자들이 당신만을 주인으로 삼아 재물로 인해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것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의 뜻입니다. 성경전체에서 말하는 그분의 거룩한 통치 아래 들어가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또 그러면 당신께서 신자의 내일을 보호 인도해준다는 것이 본문에서 그의 의의 뜻이었습니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인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자도 자신의 현실적 형편과 무관하게 그분의 뜻대로 살기로 결단 헌신하게 됩니다. 내일 일의 염려는 뒷전이며 십자가 복음이 이 땅에 실현되는 일부터 먼저 구하게 됩니다.

결국 본문의 뜻은 오직 하나님만 주인으로 삼은 신자가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서 그분의 거룩한 통치가 자기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 강력히 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당신의 의가 더욱 편만하게 드러나게끔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전 불신자 시절의 재물 중심의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으로 완전히 바뀌어야만 가능하며 또 그래서 내일의 재물에 대한 걱정은 뒷전이고 오직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살게 됨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첨언)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질문이 생기면 가장 먼저 본문 뜻부터 문맥 안에서 명확히 정리한 후에 성경전체의 진리와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2016/8/12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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