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삼 교수
채영삼 교수(백석대)

서울에서 베드로전서를 강의하는데, 들으시는 목사님 중 한 분께서, 이런 메시지를 전해 오셨다.

“교수님 베드로전서 강의에 은혜 받고, 저희 교인들에게 코로나 시절에 선한 일을 하자고 건의하여, 저희 교회가 있는 (상가)건물에서 방역에 가장 타격을 입은 사장님(헬스클럽, 실내놀이터, 특공무술)들께 적은 금액이나마 후원을 했습니다. 교인들도 기뻐하고 사장님들도 한결 같이 교회도 힘든데 받아도 되냐며 감격하시네요. 큰 가르침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으로 감사하다. 자신의 상가교회도 어려울텐데, 주변에 있는 이웃의 사정을 생각하고 선한 일로 접근한 것이 참으로 기쁘다.

요즘 교회에 어려운 일이 많다.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기도 힘들고, 헌금도 줄고, 불안한 일도 많다. 하지만 이렇게 이웃을 더 먼저 생각하고 선한 일을 행할 때, 저들은 교회를 달리 볼 것이다.

기독교인들을 욕하다가도 ‘우리 상가에 세 들어 있는 저 교회만큼은 다르다’고 변호해줄 것이다. 교회의 희망은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요즘 이 땅의 교회에게 이 성경말씀보다 더 적실한 말씀이 또 있을까.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살지만, ‘이방인 중에서’ 살고 있음을 깊이 자각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기독교에 적대적인 ‘이방인 중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보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방인 중에’ 거하는 교회는, 안 그래도 그 믿는 바 복음과 진리 때문에, 원치 않게 ‘악행한다’는 비방과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거나, 예수만이 구원자요 심판주라거나,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미 왔고, 오고 있고, 온다는 식의 종말론적 신앙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거부감을 주는 진리 선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날처럼 관용과 환대가 시대정신인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이런 타협할 수 없는 진리 때문에 불가피하게 생기는 오해와 혐오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교회는 그 외에 다른 이유로는 ‘악행하는 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오직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이 의미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위의 벧전 2:12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체는 뜻밖에도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 사회의 ‘이방인들’이라는 사실이 치명적이다. 그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우리에게서 찬송을 배웠거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들었거나, 방언을 배웠거나, 거대한 예배당 건물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위용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교회로부터 경험한 ‘선한 행실’ 때문이다.

교회는 무엇으로 교회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세상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는가? 세상이 더 이상 교회를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되는가?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벧전 2:15). ‘어리석고 무식하다’는 번역은 세상 사람들을 무시하는 의미가 아니라, 저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비난을 막는 교회의 방법은 무엇인가? 기독교 정치인들을 내세우는 것인가? 법적 소송인가? 모두 가능하겠지만, 본문이 제시하는 전략은 아니다.

교회의 선한 행실뿐이다. 이것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도, 교회도, 복음도, 예수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인 교회가 받은 전략이다. 교회는 무엇으로 교회를 비방하는 자들의 입을 막을 수 있는가?

혹자는 여기서,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은 선한 행실 때문이 아니다’는 생각이 솟아오를지 모른다. 맞다. 하지만 지금 베드로전서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해야 하는 ‘선한 행실’에 어떤 선교적, 기독론적 의미가 있는지 말하는 중이다.

(베드로전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승천의 길을, 세상 속의 교회가 선한 양심과 선한 행실, 곧 은혜를 드러내는 선한 행실로 세상을 지나가는, 세례의 여정 전체로 재해석한다 – 벧전 3:16-22)

‘이방인 중에’ 거하는 교회는, 구원론을 넘어서는 ‘선한 행실’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왜 세상 속의 교회에게 ‘선한 행실’이 그토록 중요한가? ‘이방인 중에서’ 살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이 알아듣고 납득하는 것은, 교회의 신앙, 의례가 아니라, 교회 선한 양심, 선한 행실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미 1세기경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로마 제국의 시민들을 향해 거기에 흩어져 소수로 살았던 초기 교회가 대응했던 전략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래야 교회의 미래가 있지 않겠는가.

오늘 날, 교회가 짊어진 하나님의 이름, 교회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는 온갖 악행들은, 교회의 다음 세대의 목에 무거운 멍에를 지우는 것과 같은 일이다. 우리의 자녀 세대가 더 이상 얼굴을 들고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미안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교회가 참으로 어렵지만, 더욱 이웃에게 선한 일로 다가간다면, 다음 세대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일이 될 것이다. 주여, 이 땅의 교회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를 도우소서. 지혜와 용기와 소망을 주소서. 간절히 비는 주일 밤이다.

채영삼 교수(백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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