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교교회 김고광 원로목사.
수표교교회 김고광 원로목사.

오늘 설교의 제목이 도발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 자신도 설교제목을 정하기 전에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면서, 제목이 너무 도발적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서일과의 본문들, 그 중에서도 누가복음서의 말씀을 다시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이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마태복음 5:3-7:27의 ‘산상설교’로 알려진 말씀과 비교해서 오늘 누가복음 6:20-49의 말씀은 ‘평지설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팔복말씀’으로 알려진 마태 5:2-12절의 말씀은 누가 복음의 평지설교 중 6:20-26에는 4가지 복과 4가지 화로 구성된 본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레오 톨스토이는 ‘산상설고’, 3장을 성경중의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성서일과(렘17:5-10, 고전15:12-20, 눅6:17-26)를 관통하는 주제는 복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성경말씀들에서 말하는 복의 내용은, 흔히 한국교회에서 통용되는 설교에서 말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에 나오는 4가지 축복과 4가지 화의 ‘성경’말씀은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설교’의 8복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나아가서 교회강단의 현실이 이렇다면 이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평지설교’ 본문으로 누가 설교할 수 있을까 하는 부끄러움과 동시에 두려움이 더 깊어 졌습니다.

그러다가 나도 전에 마태복음이 ‘산상설교’를 본문으로 연속적으로 설교하고 책으로까지 만들었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책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때는 마태복음을 본문으로 삼았는데 오늘 누가복음과는 어떤 연관을 지으면서 설교했었는가? 특히 축복의 내용을 어떻게 설교했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위로 아닌 위로를 느꼈습니다. 설교자로서 우리 모두는 아마도 지난날 강단에서 자기가 설교했던 내용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꺼리는 일 중 한 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 책을 다시 읽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겨우 겨우 읽다가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누가복음의 ‘평지설교’ 본문을 다시 읽으면서 전에는 제 손에 없어서 참고하지 못했던 ‘프랑소와 보퐁(F. Bovon)박사의 누가복음 주석을 새로 읽으며 정리했습니다.
보퐁 교수는 신약교수로서 특히 누가복음 연구와 주석에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결과 4권으로 된 그의 누가복음주석은 아마도 당분간은 이에 필적할만한 다른 주석은 나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라고 로잔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는 후에 독일어권인 바젤대학 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26년 동안 제네바대학 신학부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1993년에 하버드대학 신학부에서 교수생활을 했습니다.

Bovon 교수는 이 주석에서 나의 심장을 때리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넉넉하게 잘 사는 신약교수(주석자)로서 이 가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감히 이 팔복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주석자로 나 자신을 중개자로 생각하는 것을 잘못된 것일 겁니다. 다만 내게 가능한 방향설정이 있다고 하면 나 자신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편에 세우기보다는 (당시) 이 축복과 화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자리에 함께 세우는 것입니다. 아마도 누가복음서 저자 자신의 자리도 그러하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F. Bovon. LUKE Ⅰ. 223쪽 참조).

설교자로서 우리에게도, 제 자신에게 더욱 마음 깊이 찔려오는 말씀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팔복이나 4복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본문의 설교자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도, 예수님 눈에 잘 뜨지 않는 구석자리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머리 숙이고 듣고 있는 자화상을 그려보았고, 또 오늘 그런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들고 섰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목사와 신학자로서 청빈하게 살아오고 또 그렇게 살다 가신 분들을 많이 알아보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우리 정부가 말하는 소위‘ 빈곤층’ 생활을 하고 있는 현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가난한 자리에서 살지 않고 부자로 살면서도 옛날에 배고프고 가난하게 살았다는 말로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말씀의 해석자와 예수님처럼 ‘설교자’처럼 사는 사람도 보고 있습니다.
한술 더 떠서 자신을 예수님의 말씀과 오늘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 사이에 중개자처럼 행세하고 설교하지 않았는지도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성경말씀을 설교했다는 것이 그것이 과연 성경적이었는지 아닌지 묻고 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사로서 그것도 잘 나가는(?) 설교자와 잘 사는(?)목사로서 이 가난하고 갈등이 심한 이 땅에서, 이 땅의 교인들에게 산상수훈을 설교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기만인가 하는 찔림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목사와 설교자로서 소위 영해(靈解)라는 좋은 말로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왜곡해 왔는가? 하고 회개할 뿐입니다.
우리는 목사와 설교자로서 나 같은 죄인이 감히 예수님을 대리하여 ‘설교’하는 만용을 부린 적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도 회개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도 두렵고 교인들 앞에서도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축복이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것임을 용감하게 설교해야 합니다. 동시에 ‘인간’으로서 우리는 복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고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모순 때문에 우리는 때로는 정의로운 ‘예언자’가 되고 동시에 이중적인 ‘위선자’가 되기도 합니다. 설교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하고 씨름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몸부림치기도 하고 때로는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서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며 박쥐처럼 살기도 했습니다.

‘설교자로서의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설교자’인 이중적인 우리의 모습에 예수님은 어떤 축복의 말씀을 우리에게 내려 주실지 고민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본문을 읽으면서 설교자로서의 나의 설교가 얼마나 성경적인가하는 질문으로 옮겨 갔습니다.
동시에 회중들을 ‘성경’과 ‘설교’사이에서 어느 길로 가야할지 고민하는 기로에 서 있는 딱하고 딱한 처지가 아닌가도 물어봅니다. ‘성경’에서의 예수님과 ‘설교’에서의 목사 사이에서 교인들만 어렵게 만들어 버리지는 않았는지 두렵습니다.
‘성경’과 ‘설교’ 사이에서 고민하는 딱한 모습은 우리 설교자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설교자로서 우리가 얼마나 심각하게 이 기로에서 고민하고 있는지 걱정 아닌 걱정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설교자로서 언제나 물어야 할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문지 않고 설교할 때가 더 많이 있지 않는지 생각합니다.

설교단에 올라서서 성경을 펼치고 설교하면 그것이 저절로 성경말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 우리가 설교단에서 설교하는 모든 것이 저절로 성경에 맞는 설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가 ‘말씀’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말씀자체이신 예수가 아닙니다. 그렇게 예수처럼 행세해서도 안 됩니다. 설교자는 이 설교가 성서적인지 아닌지를 수시로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빗나가기 쉬운데 그런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를 성경으로 인도하고, 자신을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설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이제 성경과 설교를 엄격하게 구별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이것은 제일 먼저 설교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입니다. 동시에 설교를 듣는 교인들에게도 충격입니다.
나는 설교자로서나 교인으로서나 이 말씀에도 ‘충격이 없다.’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천사의 반열에 올라 있거나 아니면 말씀을 구별하는 영적인 능력이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겁니다. 설교자들에게는 지금까지 또 지금도 수 없이 하고 있는 우리의 설교행위가 하나님의 말씀 행위인지 아닌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위험과 기로에 서게 합니다. 또 교인들에게는 말씀을 구별할 수 있는 은총을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우리가 설교하고 바라는 인간의 축복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현실 앞에서 설교자나 교인이나 성경과 설교의 기로에서 어느 자리에 설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예부터 지금가지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시피 합니다. 이것은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가난을 축복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가난을 서원한 수도자들이나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런 수도사로서 헌신한 사람들 중에 중세의 성 프란시스코 같은 이가 있어 우리에게 본이 되고 덕이 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수도자들마저도 부를 축적하되 부정한 방법으로 하고도 시치미를 떼는 어두운 시대가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가난을 표방하면서 속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성직자들이 있었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청부(靑富)를 설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 역시 가난은 축복이 아니라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한 단면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복된 사람이라 했습니다. 마태복음처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정신적 가난’과 ‘경제적 가난’으로 구별한다면 그것은 벌써 ‘왜곡’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마태복음도 성경이요 누가복음도 성경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내편으로 끌어들이는 잘못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prokos(기다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잡한 해석학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무엇이며 그냥 ‘가난한 사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부요하지만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가난하지만 마음이 부자인 사람을 모두 염두에 두시고 계실까요?
예수님이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딴말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설교를 한번 하셨지 다른 시간에 다른 곳에서 다른 청중들에게 두세 번 하신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게 사신 예수님에게 가난은 단순하게 가난한 것이 맞습니다.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가난’을 나누신 것도 아닙니다. 가난은 비교개념일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자기합리화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우리의 동역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있으니 가난이 복입니다 라고 저도 이렇게 설교하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같은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자리에 같이 세울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아무리 듣기 싫어해도 그렇습니다. 설교자도 죄인이고 경청하는 사람도 같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죄인으로 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나누어 세울 수 없습니다.

단군 이래 최고의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세상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부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남북 간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도 가난 때문에 목숨을 끊기도 하고,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리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들입니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고 욕망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라고 정죄할 수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우리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부작 된 한국교회, 목사와 교인들의 판단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이미 욕망의 포로가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했던 한국사회에서 가난했던 한국교회는 더 교회다웠고, 더 목사다웠고, 교인다웠다고 하는 것은 단순 과거지향이 아닙니다. 부자가 된 한국교회의 오늘은 더 참담할 지경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물신(物神)이 자리 잡고 있는 한국교회가 더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진 것은 아닐까요?

가난했던 예수님은 부자교회에서 어느 자리에 서 계실까요? 혼자 우두커니 한 구석에 서 계시지는 않는지 두렵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부르는데 실상 그 내용은 다르다면 예수님은 더욱더 소외되고 계시지는 않을까요? 우리가 입술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외칠 때에 우리의 말과 행동과 마음은 일치하는지 아닌지는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입니다. 부자가 된 한국교회에서 가난한 교인이나 설교자가 설 자리를 잃어갈 때 예수님도 설 자리를 잃어 가시는 것이라고 한다면 무리일까요?

예수님이 옛 예언자들을 원용하시는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백성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예언자들은 어디서든지 불편한 존재였지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왕궁에서도 그랬고, 국민들 속에서도 그랬고 심지어 성전에서도 그랬고 거짓 예언자들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이제 설교자로서 나는 부자인가 가난한 사람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봅니다. 여러분들 자신은 어떻습니까?
부자는 부자인데 하나님 앞에서는 가난하고 자기 자신에게 부자인 사람도 있습니다.(눅 12:21)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님께는 부자이면서 자기에게는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자인 가난한 삶도 있고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부자도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부자인 가난한 사람도 있고 가난한 부자도 있습니다. 누가 부자이고 누가 가난한지는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사회통념이면서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가진 돈으로 결정되는 세상에서 예수님은 부자와 가난은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든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빈곤, 제도적 빈곤, 또 개인적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감히 예수님의 자리에 함께 서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설교할 수 없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 애쓰는 사람, 일하는 사람, 자기를 조금이라고 희생하면서 가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개인적으로든지 사회적으로든지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을 증거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팔복이나 사복보다도 삼박자축복이 더 힘을 쓰는 현실에서 누가 있어 오늘날 예수님이 설교하시는 축복은 건너뛰거나 약식으로 영해라는 이름으로 가볍게 처리해 버리는 일을 감히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경’과 ‘설교’사이에서 구별할 수 있는 은총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말씀과 설교의 말씀 사이에 괴리도 있고 차이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성경주석가와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욕망과 말씀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정도의 상식은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본주의 사회가 극도에 이른 사회에서 교회는 지금이라도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가난함이 불행이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또 다른 축복임도 당당히 선포해야 합니다. 부자라고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가 불행 한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부가 축복이기 보다는 화의 근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가난이 부끄러운 것 이라기보다는 축복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부자일 때 가난을, 가난일 때 축복임을 선포하고 또 그렇게 만든 교회와 사회를 일구도록 할 것입니다. 부자에게도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고 가난함에도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당당하게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높은 자는 그 낮아짐을 자랑하고 낮은 자는 높아짐을 자랑하라는(얍 1:9) 말씀처럼 부자는 가난함을 자랑하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 됨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자는 항상 성경의 자리, 예수님의 자리, 설교자의 자리에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회중의 자리, 예수님 당시의 청중의 자리, 예수님의 자리, 성경의 자리에서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어느 자리를 선택하든지 나는 과연 이 자리에 설 자격이 되는 가를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설교자의 이중성이요 예언자의 이중성이 아니겠습니까? 설교자는 한 자리에 서서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설교자는 ‘성경’과 ‘설교’, ‘예수님의 자리’와 ‘청중의 자리’ 사이에서 이렇게 살피고 또 살피다가 결국에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겸손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입술에 발린 고백과 회개가 아니라 존재자체가 걸린 근본적인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어떤 자리에 서 있는가?
나는 부자인가? 가난한 사람인가?
하나님은 나를 부자로 보실까? 가난한 사람으로 보실까?
다른 사람은 나를 부자로 보는가? 가난한 사람으로 보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가난한 사람이요 나와 우리 집에 대해서는 부자인가?
반대로 나는 하나님 앞에서 부자인가? 세상에 대해서 가난한 사람인가?
하는 질문들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가난함을 부끄럽게 여기시지거나 죄스럽게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난을 축복의 시작으로 여기시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가난하다고 주저앉지 말라는 격려와 부자라고 스스로 교만하게 생각하는 사람, 마음이 부자인 사람, 상대적으로 부자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내 소유로 여기고 땅에 파묻어 두는 부자들에게는 가난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이쯤해서 저는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민족의 시인, 윤동주의 ‘팔복’이라는 제목을 담은 시를 떠올려 봅니다.

“팔복”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를 여덟차례나 반복한 후에)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하면서 제목 다음에 마태복음을 본문으로 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행(行)의 육필원고에는 ‘저히가 슬플 것이오’로 썼다가 지우고 또 ‘저히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오’로 썼다가 지우고 ‘저히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친 줄에서도 ‘영원히’를 추가로 넣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시인 윤동주는 이 ‘팔복’을 마태복음 5장을 뿌리로 삼았다는 것을 일부러(?) 밝히면서도 마태복음 ‘팔복’에 나오는 첫 번째 축복인 ‘(가난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 대신에 ‘슬포하는 자’를 선택하였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난과 슬픔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시인은 느꼈을까요?
저는 시인도 아니고 시를 연구하는 사람도 못되기에 이 질문은 미루어 놓았습니다.

그러다가도 저는 시인 윤동주가 살았던 일제 치하의 암울함을 이해하면서도 이 시의 ‘슬퍼하는 자’를 ‘가난한 자’로는 바꿀 수는 없을까?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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