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륜
발음교회 권오륜 목사.

제주도에는 이기풍 목사(1868~1942)께서 첫선교지로 파송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이기풍 선교기념관이 있습니다. 선교사는 일반적으로 외국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송된 사람을 말하나 이기풍 목사의 사역을 선교라 부르는 것은 당시 제주도가 언어를 비롯한 문화가 해외나 다름없는 전도하기에 아주 열악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발표자인 본인은 첫 번 목회지가 제주도 사계교회였는데, 이기풍 목사가 설립했던 모슬포교회에서 기도처로 개척한 작은 어촌 교회였습니다. 전도사로 보냄 받아 담임목사로 4년간 사역하였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문화 때문에 쉽지 않았는데 100여년 전 불모지와 같은 제주 땅에서 헌신한 이목사님을 생각하면 존경을 넘어 경외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한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겠기 때문입니다.

생애

이기풍 목사는 예수 믿은 전과 후가 180도 완전 다른 삶을 산 분입니다. 이목사는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증조부는 무관 출신으로 홍경래의 난을 지지함으로 역적으로 몰려 피신한 전력이 있었습니다. 이런 가문에서 태어난 탓인지 이목사는 일찍 사서삼경을 독파한 영특한 아이였으나 부자와 고관대작들을 아주 싫어하였고 술과 싸움으로 평양의 건달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박치기의 명수이며 돌팔매질 또한 잘하였는데 이 실력으로 평양장터에서 노방전도를 하던 마펫 선교사(S. A. Moffet 1864-1939, 한국명 마포삼열)의 턱을 가격하여 쓰러지게 한 사건은 유명합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평양은 전쟁터가 되어 이목사님 일가는 원산으로 피난하여 살았는데, 하루는 길을 가다 스왈른 선교사(W. L. Swallen 1859~1954, 한국명 소안련)를 보고 이전 평양에서 마펫 선교사를 돌로 친 기억이 되살아나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전도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 그 일을 생각하며 잠이 들었는데 사도바울이 그러했듯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라는 음성을 듣었습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회개하고 스왈른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역

세례 후 이기풍 목사는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전도자가 되어 스왈른 선교사를 돕던 이목사는 1907년 마펫 선교사가 설립한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인 중 한 사람이 되었고 한국인 최초 목사안수를 기념하여 제주도 파송을 결정한 노회의 결의에 제주도행을 자원하게 됩니다.

이목사님을 존경하고 닮고 싶은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육지든 섬이든, 사람 많은 곳이든 적은 곳이든, 유력한 사람이든 소외된 사람이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복음을 들어야 하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요, 그것을 실천하려고 스스로 가장 외진 지역으로, 자원하였다는 점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한 영혼에 대한 사랑에 매여 산 분입니다.

당시 제주도에 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습니다. 가는 도중 배가 파선하여 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여 이목사가 탄 돛단배도 거센 풍랑 속에 좌초하여 간신히 제주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전도의 사명감은 불타올랐지만 육지와 전혀 다른 언어, 문화, 환경에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인 학살 사건 여파로 단 한사람과도 대화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극심한 굶주림과 심한 고생으로 그만 바닷가에서 쓰러지고만 이목사를 한 해녀가 도와주어 살아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이 해녀가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제주도에서 첫 열매를 얻은 것입니다.

이목사는 농사일을 도와주거나 개인적 친밀도를 더해가면서 복음전할 기회를 모색해갔습니다. 그러던 중 1909년 5월 제주도에 대홍수가 났을 때 물에 휩쓸려 내려가는 사람들을 목숨 걸고 구해준 일이 있었는데, 이때 이후 제주도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며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탐관오리들에게 수탈당하고, 육지 사람들에게 착취당한다는 이중적 피해 의식 때문에 누구도 신뢰하지 않던 사람들이 외지인에게 마음을 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주도에서의 7년 사역 동안 제주 성내 교회를 필두로 금성, 삼양, 성읍, 조천, 모슬포, 한림, 용수, 세화 등의 교회를 개척하여 제주선교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1915년 안식년을 얻어 평양에 돌아간 후, 1916년 전라남도 광주 복문내교회에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호남지역의 교회에서도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20년엔 조선예수교장로회 부총회장을, 1921년에는 총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총회장 임기가 끝나자 전남 순천중앙교회와 고흥의 개척교회를 섬기다 다시 제주도로 가셨습니다.

7년간의 2차 제주도 선교 후 부흥하고 안정된 교회를 떠나, 1934년 초 땅 끝 마을 작은 섬, 전남 여수 남면 우학리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이 섬을 기점으로 돌산, 안산 등 5개 섬을 배 타고 돌면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1936년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딱뜨린 이목사는 격렬하게 신사참배를 반대했습니다. 그 결과 1938년 일본 경찰에 의해 구속 수감되어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뼈와 가죽만 남아 위험하게 된 이목사는 일제의 강제 가석방으로 우학리교회로 옮겨졌고, 1942년 6월 20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공헌

이기풍 목사의 선교 목적은 영혼 구원에 있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사회적 책무에 있어서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현대선교학의 관점에서 보면 준비가 없고, 선교지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 등 여러 가지 미흡한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제주도 선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제주노회는 독립 노회로 성장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제주도 교회는 나름의 역사적 배경과 독특함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풍요롭게 하는 다양성을 제공하였습니다.

또한 이목사의 제주선교는 엄밀하게는 내지 선교이지만 한국교회에 해외선교의 열정을 불어넣는 전기도 마련하였습니다. 제주선교에 이어 1908년 일본 선교, 1909년 시베리아 선교, 1912년 중국 산동성 선교가 그것입니다.

이목사님은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복음의 진리를 생명을 걸고 지키고 전하고자 한 분입니다. 어느 누구도 가기를 꺼려하는 외지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언제나 나아갔습니다. 그 수가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이라면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지 아니하고, 어디든지 가서 열정적으로 헌신하였습니다. 한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혹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에게까지 멀리 있게 해서는 안된다는 전도자의 마음이 소외된 섬 제주도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처음 제주도에서의 사역의 열정을 끝까지 잃지 아니하고 마지막까지 생명을 바쳐 충성하신 이목사님은 저로 하여금 첫 목회지인 제주도에서의 초심을 늘 기억하게 합니다. 쉽고 편한 길을 마다하고 복음을 위해 좁고 험한 길을 끝까지 걸어간 이목사님의 목회자로서의 열정과 헌신이 저로 하여금 위대한 신앙 선배요, 따라가고 싶은 목회 모델로 삼게 하였습니다.

/한복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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