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삼 교수
채영삼 교수(백석대)

한스 부어스마의 <지복직관(至福直觀)>은 읽기에 쉽지 않은 책이다(새물결, 2023). 내용이 어렵기도 하고, 번역체가 낯설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런 주제 자체가 오늘 날의 성도에게 애초에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이 제일 큰 이유일지 모른다. ‘하나님을 직접 뵈온다’(visio Dei)는 이런 주제는 오늘 날 우리들의 귀에 너무 ‘초월적이거나’, 그리 ‘현실적이지 않거나’ 그래서 다소 ‘사치스럽게’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주제들은, ‘죄 사함을 받는 것’ 그리고 ‘의롭다 칭함을 얻는 것’ 그리고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사는 것’ 또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이 불의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의가 다스리는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어가는 것처럼,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보다 현실적으로 효능감이 있는 내용들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직접 뵌다는 ‘지복직관’의 주제는, 저 머언 중세 때 수도원에 갇힌 수도승들이나 꿈꾸었던 ‘신비주의적’인 신앙처럼 들리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내심을 갖고 이 책을 읽다보면, 왜 ‘지복직관’이라는 주제가 우리에게 이토록 낯설게 느껴지는지에 관해 뜻밖의 통찰을 얻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처한 개신교회가 과연 어떠한 거대한 물결을 따라 여기까지 떠 내려왔는지, 그리고 그 물결, 정확히는 ‘근대’라는 거센 쓰나미를 만나기 전에, 주의 교회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고 가장 지고한 신앙의 이상으로 삼았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그 희미한 흔적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아직 땅과 하늘이 분리되고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기 전, 그러니까 존 던(John Dunn)이 비통하게 노래하고 예언했던 그 ‘서구 근대의 비극’이 시작되기 전, 중세까지 이어져 오던 고대의 세계관 그리고 성경의 세계관에서처럼, 사람이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놓여나서 지고한 하늘을 향하며, 거기 계신 하나님을 직접 보고 만나고 사귀는 그 연합 속에서, 우리도 그분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것을 신학과 신앙의 절정으로 삼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하든 ‘지복직관’이라 하든, 구원이란 원래 죄 사함이나 칭의와 같은 회복의 과정을 거쳐 원래 도달해야 하는 본래의 목적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서구 근대는 확실히 ‘세속화된 세계’를 열었다. 인문학의 발흥과 계몽주의의 탄생을 지나면서, 결국 초월과 하늘은 떨어져 나가고 경험과 이성과 실험으로 확증할 수 있는 물질세계, 곧 세속만 남았고, 종교개혁의 후예들인 개혁주의자들조차 이미 ‘세속화된 세계관 안’에서 구원과 새 창조를 설명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부어스마가, 개혁주의의 큰 그림을 그려냈던 바빙크조차 그러한 근대적인 ‘세속주의’에 갇혀 있다고 비판하는 부분은 다소 놀랍고 흥미롭다.

고대 이후 중세까지도 교회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 ‘목적인’(final cause)에 따라 그 원래의 목적이 성취되는 그 종말과 하늘의 종착점을 향해 가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세상은 그 자체로서 ‘성례전적’이며, 종말론적이고 초월적인 목적을 내포하고 있는 존재였다. 부어스마는 사실 상, 이런 초월적 상층부가 잘려나간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는 ‘구원’ 개념조차 그 목적을 잃고 또한 그 성례전적인 의미를 잃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말하자면 구원이란 그 원대하고 종국적인 목적,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우리의 신성한 변화, 즉 베드로후서 1:4가 선명하게 제시하듯, 하나님의 신성(神性)에 참여하는 우리 존재의 완성을 위한 수단이요 과정이라는, 교회의 오래된 신앙을 복원하려는 것이다.

부어스마는 ‘지복직관’이라는 주제가 초기교회의 디오니시우스에서부터 종교개혁 이후 칼빈과 에즈워드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이해되어왔고, 어떻게 다루어져왔는지를 개관한다. 비록 근대 이후 아주 커다란 세계관적 단절이 있었지만, 결국 개혁주의 안에서도 지복직관이라는 주제는 매우 여전히 중대한 구원의 목적으로 제시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하나님을 뵈옵는다’는 것은 본질상 하나님 주권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특징적으로 성레전적이고, 하나님의 교육적 인도 아래서 이미 실현되고 있으며 그러나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종말론적 지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부어스마의 이런 기대대로, 개신교가 이런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지복직관을 신앙의 중대하고 궁극적인 목표점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다는 교회의 자신감을 넘어서는, 또 다른 거대한 쓰나미나 지각변동 같은 시대적 변화와 충격을 필요로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부어스마가 회복하고 싶어하는 ‘지복직관’이라는 주제는, 성경적으로는 아마도 ‘새 언약의 궁극적 성취’에 관한 ‘삼위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라는 주제 안에서 다루어질 때, 그 철학적 색채와 오해를 벗어나, 교회의 신앙을 위해 더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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