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성길 교수
민성길 명예교수

고대 그리스는 고대 문명들 중 성이 주는 쾌락을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한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문명이다. 그러나 그만큼 문란하였다. 그리스시대에는 전통적 일부일처제 가족주의를 유지하면서도, 온갖 행태의 섹스가 성행하였다. 매춘, 동성애, 소년애(pederasty), 최음제 사용, 색정광(nymphomania) 행동 등등이 공공연히 행해 졌다. 매춘은 세금을 내는, 당당한 사업이기도 했다. 신전 매춘이라는 습속도 있었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의 향락은 남자에게만 허용되었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로 간주되었고, 여성들은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욕구는 무시되었다. 일례로, 남성들의 지적 상대가 된 여성들은 ‘헤타이라‘라고 불리던 교양 있는 고급 매춘부들이었다. (그리스 이야기를 보다 자세하게 전하는 것은 현대의 성혁명가들이 동성애에 관련하여 고대 그리스 성문화를 칭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특이하게도 소년애(pederasty)가 용인되었는데, 교육목적이라는 의미에서 였다. 심지어 어떤 유명한 철학자들도 이런 소년애를 이성애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으로 칭송하였다. (이런 행태는 현대의 일부 서구 지역에서 비밀리에 성행하고 있는 범죄적인 소아성애의 기원처럼 보인다)

고대 그리스 성문화는 로마에 전수되었는데, 사도바울이 보았을 때 그리스-로마의 성문화는 타락한 성문화였다. 성인 남자의 소년과의 그리고 노예와의 동성애는 용인되었고 또 성행하였다. 거의 모든 황제들이 동성애를 하였다 한다. 어거스틴이 동성애를 죄악시 한 것도 창조(생식)의 섭리(자연)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고대의 문란한 성문화는 결국 기독교에 의해 통제되었다. 주후 390년 기독교인이 된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동성애는 금지되었다.

중세시대 유럽에서는 동성애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행태로 죄악시 되었다, 당시 소도미(sodomy.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서 유래된 용어)란 동성애 뿐 아니라, 수간 같은 다른 성도착행동들과 결혼 밖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비생식적”인 성적 행위들(불륜, 방탕, 자위 등)에 대한 포괄적 용어였다. 중세 기독교에서는 이런 행동들은 언급할 때 죄스러움을 피하기 위해 라틴어를 사용하거나 “자연을 거스리는 범죄“ 또는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악함” 같은 완곡 표현을 사용하였다.

11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재판을 통해 동성애자들은 성기제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이단과 동일시되었다. (이슬람교에서도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 동성애자는 악마숭배자와 동급으로 판단하여 색출하여 종교재판으로 고문하거나, 화형하거나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13세기 말에는 대부분의 유럽도시에서는 동성애가 발각되면 화형에 처해졌다. 14세기 초 프랑스의 필립 4세는 성전기사단을 동성애 혐의를 씌워 이단시하고 박해하였다, 하지만 왕이나 상류계급에서는 묘하게 동성애가 성행했던 것 같다.

르네상스 때 그리스 문화의 재흥과 더불어 성문화에서도 르네상스가 도래하였다. 기독교 이전에 숭배되고 즐겨졌던 그리스 신들의 섹스 이야기들과 나체가 회화와 조각으로 화려하게 다시 등장하였다. 로맨틱한(로마적인) (실제로는 에로틱한) 감정이 예찬되었다. 이전에는 죄가 되었던 것이 이제 죄가 아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술과 아름다움의 이름으로 찬양되기 시작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동성애는 금지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유행하였다. 당국은 동성애자들을 고발하고 벌금을 매기고 또는 감옥에 넣었다, 그러나 예술가 같은 특정인들이나 특정 계층에게는 은밀히 관용되었다. 이런 관행은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바, 즉 동성애는 상류층, 예술가, 지식인, 유명인 등의 타락한 관습이라는 이미지가 생긴 것이다.

14세기 경 북이탈리아부터 동성애에 대한 법적 금지가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동성애에 대한 “정화”의 이름으로 가혹한 법을 만들어지고 동성애자들에 대한 경찰감시가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1533년 영국의 헨리 8세는 동성애(buggery)를 “혐오스러운 악”"으로 규정하고, 동성애법(Buggery Act)을 제정하여 교수형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미국의 여러 식민지에서도 소도미를 범죄로서 처벌을 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가 루터는 창세기와 로마서에 대한 강해에서 동성애(당시 용어는 sodomy)는 하나님께서 자연에 심어준 남자의 여자를 향한 자연스런(natural) 열정과 갈구, 즉 자연을 위반한 것이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성적 욕망을 오로지 이성관계에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동성애는 사탄에서 온 것인데,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스런 욕망을 더럽히고 자연에 반하는 욕망을 부추긴다고 하였다.

18세기에 이르면 동성애에 대한 소설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금방 억제되기 일수였다, 대표적으로 계몽주의 시대에 “악명 높은” 사드후작(Marquis de Sade 1740-1814)이 있다. 그는 자신의 쾌락주의적 철학과 포르노를 결합하여 환상적이고 폭력적인 섹스 그리고 소도미와 신성모독적인 이야기들을 무수히 썼다. 최근 성혁명가들은 사드를 성혁명의 탁월한 선구자로 본다. 왜냐하면 그는 도덕, 종교 또는 법률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 절대적 자유를 옹호하면서, 극단적 성적 자유를 대변하였기 때문이었다.

19세기까지 남자들간의 성행위를 소도미(sodomy), Buggery 또는 pederasty(소년애)라 불렀다. 작가나 지식인들 중에서도 동성애 옹호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Homosexual이란 용어는 1868년 오스트리아 작가인 Karl-Maria Kertbeny가 독일의 작가인 Karl Heinrich Ulrichs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동성애자로서 동성애를 처벌하는 법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였다.

19세기, 일반 사회에서는 여전히 동성애가 범죄로 취급되었지만, 의학에서는 동성애를 inversion sex(도착된 성)라고 부르고, 범죄라기보다 일종의 정신병 내지 뇌의 병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오스트리아/독일의 정신의학자 크라프트-에빙(Richard F. von Krafft-Ebing)은 동성애는, 다른 성도착증들과 같이, 범죄가 아니며 뇌의 병 내지 정신병이므로 동성애자는 형벌을 받기보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동성애 치료는 뇌 수술, 성기제거수술, 성호르몬 투여, 최면술 등이었다.

그러나 어떤 의사들은 동성애를 정상으로 보았다. 1896년 영국의 의사 Havelock Ellis는 《Sexual Inversion》이라는 논문에서 동성애는 비정상이 아니며, 동성애자는 그 수가 많고 지적이고 예술적인 성취를 많이 한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독일의 Magnus Hirschfeld는 그 자신 동성애자로서 동성애가 정상이라 주장하며 Scientific-Humanitarian Committee를 결성하고 독일의 반동성애 법을 폐기하는 활동을 하였다. (계속)

민성길(연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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