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는 요소는 혈통이었다. 왕가에서 태어나면 왕이 되고, 고관의 집에서 태어나면 고관이 된 것, 혈통이 신분을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르다. 먼저 교육이 신분을 결정한다. 학벌 위주의 사회라 좋은 대학 가고, 졸업 후에 좋은 직장 다니고, 좋은 자격증 따면 신분이 달라지기 때문에 학생들은 코피 터지게 공부한다. 또 운동을 잘해도 신분이 달라진다. 박세리, 박찬호, 박지성, 손흥민 그들은 어딜 가도 VIP다. 그냥 월드 클래스가 되었나? 아니다. 죽도록 운동한 결과다. 연예인들도 마찬가지, 톱스타가 되면 신분이 달라진다. 노래나 연기로 신분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노력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린다고 한다. 엄청난 신분 변화가 가능하다는 빅 뉴스다. 그 권세가 어떤 권세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

요한은 예수님을 ‘참 빛’이시라며(9절), 앞으로 오신다는 게 아니라 오셨다(was coming)고 했다. 그런데 ‘참 빛’은 가짜가 있다는 뜻이다. 주경학자 바클레이(Barclay)는 “어떤 빛은 실제가 투사하는 희미한 불빛이고, 또 어떤 빛은 따라오는 사람들을 흑암으로 유도하며 어둠 속에 내동댕이치고 마는 도깨비불에 불과하다”고 했다. 예수님은 그런 빛이 아닌 참 빛, 곧 순수한 빛으로 오셨다.

일반적인 빛은 숨은 것은 비추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어디에 숨더라도 완전하게 비추는 빛, 그래서 요한은 ‘참 빛’이라 했다. 성경은 예수께서 ‘세상의 빛’인 동시에 ‘각 사람을 비추는 빛’이라도 했다. 그리고 요한이 예수님을 ‘참 빛’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진짜 빛이 왔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이 안타깝고 섭섭했기 때문인 것 같다(5, 10절). 주경학자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이 세상의 특징을 ‘무관심’이라 했는데 지금은 그 정도의 분위기가 아니라 아예 ‘무시’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요한은 그 빛이 바로 이 세상 안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을 ‘자기 것’(11절)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자기 땅’이고 ‘자기 백성’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자기 땅에 오매’는 ‘그가 집에 오매’로 번역하는 게 더 좋다. 여하튼 사람들이 알아볼 만한 곳인데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 자기 백성, 곧 집사람들로부터 푸대접을 받으셨다는 말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인 외사랑이 되고, 세상은 온통 어둠 속을 헤매게 되었다. 과학이란 이름으로 헤매고, 철학이란 이름으로 헤매고 각종 바이러스로 헤매고.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어둠에 대비되는 빛으로 강조한다. 치유의 능력으로 대비되는 표현, 하나님은 고쳐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고쳐주려고 달빛을 햇빛같이 만들고, 햇빛을 일곱 배가 되게 하신다(사30:26). 고주파 치료가 비교될까? 사실 태양광이 일곱 배 되면 다 타 죽는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일곱은 완전수, 치유하기에 충분한 빛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말라기에 보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4:2)고 했는데 말씀 그대로다.

각종 바이러스와 질병, 러시아의 침공 전쟁과 장기적 경기 침체로 우울한가? 햇빛을 잘 쬐라. 햇빛은 우울증을 극복하게 하고, 심장병이나 색전증을 막고, 암 발생 위험도 줄여주고, 뼈 건강에도 도움 주고, 행복 지수도 높여준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일본의 노무라 마사키가 쓴 『내 하루의 도둑맞은 58분』에 보면 ‘선 라이즈 파워’라는 말이 나온다. 아침 햇빛을 받으면 뇌 활성화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아침 6시부터 8시까지는 긴장과 흥분을 일으키는 부신피질 호르몬 분비가 가장 활발해서 지식이나 정보 흡수, 논리적인 사고, 아이디어 발상에 가장 큰 도움이 된다며 해가 뜰 때의 시간을 ‘많은 것을 버는 시간’이라 했다.

살균작용도 햇빛의 기능 중 하나다. 햇빛 자외선을 1분간 쬐면 대장균, 디프테리아균, 이질균 등은 99가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햇빛 쨍쨍한 날에 간장, 된장, 고추장 항아리의 뚜껑을 열어두고 옷과 이불을 널었다. 살균작용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숙제인 어둠과 절망과 사망을 몰아내기 위해 참 빛으로 오셨다. 그 분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자 통치자,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된다. 죽었다 깨어나도 될 수 없는 신분,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세다.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권세

영접하는 자에게 벌어질 놀라운 일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절), 핵심 단어는 셋, ‘자녀’와 ‘권세’와 ‘주셨다’는 것이 다. 그리고 '영접하는 자'는 ‘믿는 자’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삶 속에 그분을 모시고 계속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인데, 믿는다는 단어가 현재진행형으로 쓰였다.

예수님은 거부만 당하고 끝나시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다. 요한은 ‘영접의 은혜’를 강조한다. 비록 소수라 해도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신분(Position)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마치 다리 밑에서 거지로 살던 사람이 왕궁의 왕자로 신분이 바뀌게 되는 것과 같다. 스펄젼 목사(Charles H. Spurgeon)는 예수 믿기 전의 삶의 모습을 ‘길거리의 미친 여자’로 비유했다.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는 상태로 거리를 떠돌던 사람, 그런데 그녀를 왕이 왕비로 맞아주신 것이 바로 우리라는 말이다. 성경은 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 변화 자체를 ‘권세’라 했다. ‘그 이름’을 믿는 자(Receiving heart)가 얻게 되는 신분, 그게 바로 하나님의 자녀다.

생각해보라. 어느 날 왕자, 공주가 됐다면 모든 게 다 달라지지 않겠나? 영화 '벤허'에서 벤허 유다는 노예선으로 끌려다니며 고역을 치르던 사람이다. 그런데 큰 해전(海戰) 중에 로마의 함대 사령관을 구출해준 후 그의 양자가 된다. 고관대작의 아들로 지위가 바뀐 것, 노예의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귀족의 신분으로 바뀐 것이다.

로마 때는 가까운 친척을 양아들로 삼고 모든 권리를 넘겨주는 일이 꽤 흔한 일이었는데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아우구스투스)도 그 케이스였다. 그는 카이사르(Caesar)의 양자가 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다 원로원에 의해 불의의 죽임을 당한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파문이 일어났다. 너무 낯선 인물이 양아들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지목된 사람이 바로 옥타비아누스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먼 친척, 정통 귀족 출신도 아니었다. 그저 별 직책도 없는 18세의 풋내기, 그런데 그가 카이사르의 상속자가 되었다. 재산은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얼마 남지 않을 작은 것이었지만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그 성을 물려받은 것은 어마어마한 유산, 결국 옥바티아누스는 양아버지 카이사르의 이름 때문에 당시 권력자인 안토니우스(Antony)를 누르고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된다.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무명의 옥타비아누스를 일약 황제의 자리에 올린 것, 하나님 자녀됨의 권세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권세가 유대인들에게 이어진다. 유대인들은 민족간 지능 테스트에서는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는 우수한 민족이 아닌데도 매년 법과 과학과 철학과 경제 분야의 노벨상을 휩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이유는 선민사상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프라이드가 지적 능력이나 행동을 탁월하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의식이 확고할 때 능력자가 된다는 말이다.

비록 우리가 헤라클레스(Hercules)처럼 힘이 세고 용맹하지 않고, 아스클레피오스(Aesculapius)처럼 치료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피타고라스(Pythagoras)나 디오니소스(Dionysos)처럼 지혜나 철학적 신념이 강한 것도 아니며, 알렉산더(Alexand)처럼 탁월한 정치가나 군인은 아니지만 영접하기만 하면, 예수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린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영원히 누릴 권세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엄청난 축복이다. 일본에 고위공직자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다. 4살 때 아버지가 죽고 5살 때 어머니마저 돌림병으로 죽었다. 그래서 첩의 자식이 아버지 없는 본부인의 집에 들어가 의붓형제들 사이에 얹혀산다. 얼마나 구박받았을까? 기생의 자녀, 근본이 다르다고 멸시당하고 조롱당했다. 기생의 아들, 첩의 아들이 자기 선택인가? 태어나 보니 그런 신세였는데 너무 힘들고 외로웠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담장 밑에 쪼그리고 앉아 햇빛을 쪼이고 있었다. 12살 때였다. 어디선가 북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소리가 들리는데 하나님의 자녀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얼른 달려가 물었다. “나 같은 기생 아들, 첩의 아들도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나요?” “그럼요!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소년은 “저도 예수 믿을래요.” 그때부터 예수 믿고 이 소년은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에도 열심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베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2학년 때 폐결핵에 걸렸다. 3기였다. 당시엔 불치병이었고 전염병, 모든 사람들이 다 꺼리고 멀리했는데 교회와 신학교마저도 그를 외면했다. 치료해 줄 사람도 없고 치료받을 돈도 없고, 소망이 없었다. 하루하루 시들어 죽어가는 인생. 남자답게 목숨을 끊으려고 결심하고 정처없이 걷다가 가나사와라는 오지에 천막과 같은 교회를 발견하고 거기서 마지막으로 기도하고 죽기로 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나가노라는 젊은 목사가 부인과 아이 둘을 데리고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운다고 교회를 시작한 지 5년이 된 교회, 교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도 하나님이 주신 곳이라고 지키고 있었는데 5년 만에 처음으로 사람이 왔다. 폐결핵에 걸린 불치병자, 마지막 기도하고 죽기 위해 온 사람이다. 나가노 목사는 너무 반가워 이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가 식사 대접을 하는데 각혈을 해 식탁 위가 온통 피였다. 나가노 목사는 가족에게 옮을까봐 화가 났지만 자기 손으로 그 피를 닦아내고 다시 식사를 준비해 대접한다. 이 청년은 그때 나가노 목사에게서 예수님을 본다. 그리고 그 집에 며칠 더 머물며 기적적으로 폐결핵을 치료했다.

신학교로 돌아와 공부를 마치고 고베의 빈민굴로 들어갔다. 거기서 움막 짓고 막장 인생들을 섬긴다. 몸 파는 여인들, 넝마주이들, 폐병환자들, 다 죽어가는 사람들, 그들의 진물을 닦아주고, 목욕을 시켜주고, 말씀을 전하며 섬겼다. 하루는 기자가 찾아와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나의 선생님은 나의 죽음의 핏덩이를 손으로 치우기까지 하셨습니다. 나는 배운 대로 할 뿐입니다” 그를 따라 했다는 거다(Discipline). 그가 바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와 함께 일본이 세계 앞에 자랑하는 위대한 스승 가가와 도요히꼬(Kagawa Toyohiko, 하천풍언) 목사다. 우찌무라 간조가 탁월한 사상가라면 가가와 도요히꼬는 성자같은 삶을 산 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물, 70세가 넘도록 건강하게 살았다. 그리고 『사선을 넘어』 『태양을 쏘며』 등 많은 책도 썼다.

우리도 하나님 자녀로서 권세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 그 권세에는 먼저 ‘상속권’이 있다(갈3:29), 부모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양육권’의 혜택도 주어진다. 그리고 아버지 품에서 풍요로움을 맛볼 것이고(요10:10),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보호의 손길을 요청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지키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요10:28-29).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 중 또 하나는 ‘기도 청구권’이다(마7:7).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무려 118번이나 나온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눈치 볼 이유가 없다. 자녀는 아버지를 부르며 당당하게 필요를 요구해도 된다.

혈통이나 육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13절). 민족과 출신 성분을 초월했다는 의미다. ‘아메리카 연합 국가’(United States of America) 미국(USA)을 보면 이해할까? 미국은 아일랜드, 독일, 러시아, 유태인, 스페인계 등이 ‘기회의 땅’(The land of opportunity)으로 여겨 신대륙으로 몰려가 인디언들에게서 땅을 빼앗아 세운 나라다.

19세기를 이민의 황금기로 만들 때 이민자들이 들어오는 길목이던 뉴욕의 엘리스 아일랜드에 유명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져 있다. 미국에 발을 딛는 이민자들이 가장 먼저 보는 새 조국의 상징, 높이가 46m, 밑의 기단까지 합치면 93m다. ‘세계에 빛을 비추는 횃불을 든 자유의 신상’,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가 미국에 보낸 선물이다. 그 여신상 받침대에는 에마 라자루스의 시(詩)가 새겨져 있다. “내게 보내라. 지치고 가난하고 자유에 목마른 이들을. 풍요로운 기슭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내게 보내라. 세파에 시달린 갈 곳 없는 이들을. 황금의 문 옆에서 나의 등불을 들리니”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민족과 혈통과 신분을 초월한 새로운 민족 건설이 건국 정신이다.

요한은 혈통과 육정으로부터 나온 나라, 세상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역설한다.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다는 것이다. 최고의 축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권세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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