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이 형통하게 되었다고 했고, 바울에게도 전도 여행 중 겪는 위험 가운데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지만, 그들은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고스란히 당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고통 중에 있는 신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지요? 상황을 회복시켜줄 순 없지만 고통을 이겨낼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내세의 천국소망(보상)을 생각하면서 참으라는 것입니까?

[답변]

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먼저 집고 넘어갈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질문 내용을 살피면 믿음에 대한 질문자의 생각이 조금 엿보입니다. 고통을 허락한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중요한 뜻으로 두 가지, 하나님이 고난을 이기는 버팀목이 되는 것과 천국 소망을 붙들고 참으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럼 질문자께서 평소에 그 두 이유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거나 그 외의 뜻들은 잘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바꿔 말하면 믿음으로 이룰 수 있는 유익이 이 땅에 살 동안의 고난을 없애는 것과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 둘만 혹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죄송하지만 그 둘은 모든 타 종교들도 보장한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를 갖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 안에 기독교만의 특성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유일하고 완전한 구원의 길이며,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의 계시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훨씬 더 풍요롭고 능력 있고 고귀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고난에는 하나님뿐 아니라 신자의 유익을 위한 너무나도 풍부하고도 오묘한 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지금껏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신자가 그 뜻에 어떻게 대응해야하는지에 관해선 너무나 많은 의견들이 개진되었습니다. 일일이 거론하자면 시간과 지면이 모자랄 것입니다. 질문하신 사례와 주제에 맞추어서 간략하게 축약해서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의 고난 중의 형통

청년 요셉은 형들에게 시건방지게 자기 꿈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우여곡절 끝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그를 두 번씩이나 형통했다고 말합니다. 먼저 첫째 형통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39:2,3)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이미 본문 안에 고난 중의 형통에 대한 하나님의 귀중한 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그분을 순전하게 신뢰하고 매사에 순종하며 자기 전부를 맡기는 신자라는 전제가 붙음, 바로 형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처한 여건과 겪고 있는 일의 형통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자신이 형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순전한 믿음을 가진 신자라면 하나님 뜻 안에서 그분이 함께 하시므로 이미 형통한 자가 된 것입니다.

또 그래서 주인이 여호와가 그와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합니다. 신자는 다른 이에게 자신의 믿음 생활은 물론 일상적 활동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녀다운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를 보는 이 모두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토록 하는 것이 바로 형통의 두 번째 뜻이 됩니다. 요셉이 그만큼 성실, 정직, 순수했고 맡은 일을 처리하는 지혜와 방식도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아예 그를 가정 총무로 세우고 모든 것을 일임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그 주인이) 보았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순전한 믿음을 보고 복을 주었기도 하지만 실은 위에서 말한 대로 요셉의 일처리에 빈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행하는 일에서 성실 정직할 뿐 아니라 다른 이보다 뛰어난 통찰력 분별력 즉,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순탄하게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주인이 본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의지하여 단순히 고난을 견디거나,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동행한다는 원론적 진리가 형통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고난 중에 형통했다는 성경의 두 번째 기록을 봅시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음에도 억울하게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갇혔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 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39:21-23)

요셉은 여호와가 함께 하심으로써 이미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신실한 믿음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 바로 두 번째 형통입니다. 감옥에서도 그의 성실과 정직이 두드러졌으므로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를 하였듯이 전옥이 옥중 사무를 완전히 요셉의 임의에 맡겼습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어떤 고난에 처해지던 하나님을 아는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통입니다.

바울의 환난 중의 형통

이제 바울이 겪은 환난을 살펴봅시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바울은 보통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하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는 한 번만 맞아도 자칫 죽는다고 하는데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멜 깁슨의 Passion of Christ 영화에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듯이...) 그런데 그 모든 고난을 무엇 때문에 당했다고 합니까? 그리스도의 일군이기에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다른 이가 감히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수고를 한다고 자랑하지만 자기와는 도무지 견줄 바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여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전까지는 출세가도를 달렸고 고난과는 거리가 멀었던 자였습니다.(빌3:3-6)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런 육체적 고난보다 더 심한 고난이 따로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28-30)

수많은 현실적 육체적 고난을 열거한 후에 곧 이어서 연약한 교회와 성도들 때문에 그 마음의 안타까움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나아가 그래서 그런 고난을 견디고 이겨낸 것보다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써 다른 성도가 약하면 자기도 약해지는 바로 그 약함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복음을 모르거나 아직 성숙되지 못한 성도들을 안타까이 여기는 그 마음이 자기를 괴롭게 할 뿐 아니라 바로 그런 마음이 그리스도의 일군 된 더 확실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 자신의 고질병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12:9a)는 응답만 받습니다. 고질병은 전혀 치유되지 않고 평생 육신을 괴롭혔습니다. 고난이 전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버팀목으로 해도 고통을 이겨낼 수 없고 그냥 그대로 당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기도응답에 이렇게 반응합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b) 그 고난과 자신의 약함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를 통해 나타나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써 하는 역할을 더 잘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바울은 자신에게 온갖 환난이 겹치고 그중에는 없어지지 않고 계속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까닭은 오히려 그러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하는데 더 도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과 고난을 감사했고, 기뻐했고, 자랑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체포되어 곤욕을 치를 것이라는 성령의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 서원한 결례를 마치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모은 헌금을 전달하고, 이방인들 교회에서 일어난 복음의 역사와 선교 결과를 보고하려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올라갔습니다. 눈앞의 위험을 알고도 하나님 일을 위해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으로써 결국 자기 소망과 계획과는 다르게 우상숭배의 중심지요 당시 세상의 수도였던 로마에 가서 왕족과 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필수적으로 따른다고 예사로 여겼습니다. 또 하나님이 계획한 그분의 일에 자기의 고난을 통해서 반드시 이루실 일이 있음을 확신하고 자신의 전부를 기꺼이 감사함으로 드리고 헌신한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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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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