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 목사
이태희 목사

사람의 말은 곧 그 사람이다. 말을 하는 사람과 그 사람의 말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2:34-37)

그 사람의 말은 곧 그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최후의 심판대에서 우리의 입으로 내뱉은 말에 대하여 심문을 받게 될 것이고, 내가 의롭다 함을 받든지, 아니면 정죄함을 받든지 나의 말로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말이 곧 나 자신이요, 나 자신은 곧 나의 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사 40:25)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 가운데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속성”인 동시에,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을 하나로 통합시켜 주는 가장 “총체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백만 가지 단어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백만 가지 단어를 녹이고 녹이고 녹이면 결국 한 단어만 남게 되는데, 그 단어가 바로 “거룩”이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전에 충만한 임재 안에서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찬양의 가사가 무엇이었는가?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사 6:1-3)

그 성전 안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 온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이었다.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께서는 산 주위에 경계를 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 것을 엄중하게 경고하신다. 그리고 만약 그 경계를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산 주위에 경계를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 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 (출 19:23)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를 원하셨고,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아 주기를 원하셨다. 그것이 하나님 마음의 중심에 있는 간절한 소망이고 열심이다.

그렇다면, 거룩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거룩”이라는 개념 안에는 윤리 도덕적인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불의를 미워하고 공의를 사랑하라는 윤리 도덕적 개념이 “거룩”이라는 개념 안에 분명히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윤리 도덕적인 사람들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인도의 간디, 성철 스님, 부처. 바리새인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윤리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들을 “거룩한 사람”이라고는 부르지 않고, 또 불러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윤리 도덕성은 “거룩의 일부”일 뿐, “거룩의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룩의 본질은 무엇일까? 거룩의 본질은 하나님이다. 거룩은 하나님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성을 수식하는 수식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다.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자기의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고 있던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5)

모세가 서 있는 그 땅이 도대체 어떻게 거룩한 땅이란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그 땅을 “거룩한 땅”이 되게 한 것인가? 그 땅에 임재하고 계시는 하나님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지금 그 곳에 임재하셔서 그 땅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 땅이 거룩한 땅이 된 것이다.

안식일이 왜 거룩한 날인가? 하나님이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안식일이 거룩한 날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거룩한 백성들인가? 왜 이곳이 거룩한 성전인가? 도대체 우리가 왜 성도, 거룩한 사람들인가?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그렇다면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것”이 동등하게 거룩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거룩한 땅”의 거룩이 같은 의미에서의 거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다. 안식일이든, 성전이든, 이스라엘 백성이든 그것 자체로는 하나도 거룩하지 않다.

안식일 안에 있는 거룩, 성전 안에 있는 거룩, 지금 모세가 서 있는 땅의 거룩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불어 넣어 주신 거룩이다. 그래서 “거룩한 안식일”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은 같지만 동시에 다른 거룩이다. “거룩한 성도”와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은 같은 거룩이지만 동시에 다른 거룩이에요.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거룩함을 받은 피조물”이 동등하게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거룩”이라고 하는 수식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사용되어져야 하고,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기로 선택한 것에만 사용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곧 거룩이요, 거룩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