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항상 자기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면 됩니다. ‘내 마음이 주님께 드리는 제물이 될 수 있을까?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려도 괜찮을까?’ 염려가 된다면 그 마음을 버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때부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를 해도 자신을 위한 기도 제목만 많아졌다면 이 성경이 은혜로운 성경일 수는 있어도 자신의 성경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시편 23편 말씀이 내 말씀이 아닌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처럼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했는데, 우리에게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라는 고백이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목자를 여럿 두고 살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믿는 것은 아닙니다. 가진 돈도 믿고, 주위 사람도 믿고, 자신의 능력도 믿고, 살아온 경험도 믿습니다. 그래서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는 체험이 없는 것입니다.
유기성 – 예수님은 나의 선한 목자이신가?
모든 것이 완벽한 토요일 밤이었다. 오로지 나를 위한 밤. 나는 내 인생이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완전히 풀렸다고 생각했다. 나의 건강한 육체와 나의 삶을 사랑했다. 세상도 나를 사랑했다. 그날 밤 집을 나서기 전,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다. “위야, 너 그냥 결혼하지 말고 오랫동안 나랑 같이 살자.” 나는 아버지의 소원처럼 평생 같이 살 것 같은 모습으로 아버지를 다시 마주했다. “당신은 앞으로 영원히 걸을 수 없을 겁니다. 손가락도 절대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꿈이 아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서 편했다. 이제 올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나는 죽음 대신 삶을 선택했다.
박위 – 위라클: 우리 모두에게 기적을
그러기에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안고 있는 단절, 불안, 소외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만남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 앞에 본래 자아로 서게 되며, 하나님 앞에 응답하는 순간, 인간은 그 순간 비로소 존재화된다고 보았다. 이것이 셰릴이 제안한 ‘존재의 존재화’(being in becoming)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무엇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응답하는 인간의 실존적 결단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다. 비록 인간 역사와 사회는 타락했으나, 이 사회와 역사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하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평이며,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장이었다. 그러기에 성서적 신앙은 이 역사와 인간 사회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실현되는 구원의 장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사회를 기독교교육 현장의 원형으로 수용하는 근거이다. 기독교교육은 기본적으로 교사와 학생, 교실이라는 교육적 교류를 교회 사역의 영역으로 수용한다. 동시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창조하는 이 땅의 모든 공간, 가정, 교회, 학교, 사회를 기독교교육의 현장으로 수용한다. 기독교교육은 원초적으로 학생, 교실, 교재, 교사라는 네 차원이 창조하는 교육이지만, 그것을 담아내는 장은 교회(예배)이고, 가정이며, 학교이고 사회이다. 이 네 장(場)을 공동체로 현장화(現場化)하는 과제가 기독교교육 현장론이다.
은준관 – 기독교교육 현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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