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우상으로 대체하는 죄

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이 짧은 기사에서도 기도에 대해 배울 사항은 여럿 있습니다. 오늘은 첫째로 주목해야 할 사항 하나만 살펴보겠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모르거나 지나치지만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직접 만난 후에 본격적으로 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고 무시해선 안 됩니다. 이 점이 기독교의 기도가 세상 사람들이나 다른 종교의 기도와 완전히 다른 점입니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데도 그 조차 잘 모르니 기도에 능력이 없고 이상한 기도만 계속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응답에 대한 확신이 거의 없고 또 그래서 기도를 성실히 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자기 힘으로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아주 위급한 일이 닥치면 세상을 움직이는 절대자에게 도와달라고 빕니다. 갑자기 불치병이 걸리든지, 불시에 사업이 부도나서 길거리에 나앉아야 하든지, 부부사이가 파탄 나든지, 주변 사람들이 전혀 도와줄 수 없을 때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을 찾습니다.

문제는 종교가 없기에 자기가 빌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옛날 한국의 어머님들은 새벽마다 장독대에 촛불과 냉수 한 그릇 올려놓고는 천지신명에게 가족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불러가며 형통을 빌었습니다. 천지신명(天地神明)이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신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신들의 구체적인 이름도 없고 어떤 존재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막상 간절히 불러야 할 신의 이름은 부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연의 가공할 위력 앞에 너무 무력하다는 사실을 많은 체험으로 익히 알고 있습니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인생사를 좌우하고 특별히 불행을 준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제발 환난을 일으키지 말거나 빨리 그쳐달라고 전심을 다해 비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복음을 전하러 갔더니 “이름 없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발견하고 한탄을 했습니다.(행17:23) 알다시피 그리스는 신들의 나라로 하늘 바다 천둥 바람 같은 자연 현상은 물론 결혼 사업 질병 등 인생사를 주관하는 신들이 각기 따로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신들이 있어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면 벌을 받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이름 없는 모든 신들에게도 정성을 바치니 제발 화를 내지 말아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모든 신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상상의 산물일 뿐입니다. 하늘 바다 천둥 번개 바람 모든 것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며 그분의 통치를 받습니다.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자연계 안의 엄청난 위력을 지닌 물건과 현상은 물론 그 정교하고 완벽한 운행 등을 보면 그 모든 것을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절대자가 따로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롬1:21-23)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이 우상을 믿는 잘못에 대해서 너무나도 예리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사44:15-17)

인간이 자기 편의를 위해 나무를 불 태우고 남는 기묘한 형상을 조각하여서 그것에 절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만든 우상에 자기가 절하는 웃지 못 할 희극을 벌린 것입니다. 너무 힘들고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어서 절대자에게 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기에게 비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죄이자 자기에게 최면을 걸어서 고난을 잠시 잊어버리는 정도밖에 안 됩니다.

종교를 가진 분들은 사정이 조금 다른데 당연히 그 종교가 믿고 따르는 절대자에게 힘든 일을 해결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크게 두 가지 점에서 기독교의 기도와 다릅니다. 첫째로 그 신들의 성품과 능력과 통치원리가 성경의 하나님과 전혀 다릅니다. 예컨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여호와 하나님에 비해서 원수는 반드시 복수해야 옳다고 가르치는 신이 있습니다. 모든 물질적 욕심을 버리면 고난에서 해방된다고 가르치는 신도 있고 스스로 우주에 대한 진리를 깨닫든지 죽어서 육체에 묶인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야 구원된다는 신도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이 죽어도 짐승의 모양으로 이 땅에 반드시 다시 돌려보낸다는 신도 있습니다.

본인들이야 자기들 종교 식으로 기도하고 그대로 믿고 따르면 된다고 고집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그럼 세상을 움직이는 신이 하나가 아니라 수도 없이 많아집니다. 세상만사를 다스리는 분은 오직 한 분이어야 합니다. 한 분 신이 그렇게 서로 상충되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면 정신분열입니다. 그럴 리가 없으니까 여러 신들 중에 한 분만 진짜 신입니다.

그럼 유일하게 올바른 그 신을 찾을 노력부터 해야 하는데도 모든 신들은 똑같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자기들은 정신분열적인 신을 믿거나 그게 아니면 죄송하지만 자신들이 그런 상태라고 실토하는 셈이 됩니다. 그들을 비방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며 이런 간단한 영적 이치도 생각하지 못하니까 너무 안타깝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자기들이 믿는 바대로 응답이라도 되면 다행이지만 우상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냥 허공에다 대고 소리치는 아우성일 뿐입니다. 만에 하나 기도한 대로 응답되었다 쳐도 우연의 일치 아니면 사탄이 장난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을 알고 드리는 기도

반면에 아브람은 지금 분명히 여호와를 만났고 또 그분께 약속을 먼저 받고난 후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직까지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그분이 내 사정을 잘 알고 계신다는 바탕에서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드리는 아브람과 기도를 받는 하나님 사이에는 개인적 관계가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천지신명에게 드리는 기도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요컨대 아브람은 여호와가 바로 내 앞에서 내 기도를 듣고 있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물론 처음 교회에 출석할 때는 성경을 아직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 창조주 하나님도 잘 모르는 상태입니다. 대체로 현실적인 고난을 해결 받으려는 목적뿐입니다. 저 또한 사업이 완전히 쫄딱 망한 후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의도로 교회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습니다. 단지 정말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제발 이 제 문제를 어서 빨리 해결해달라는 기도만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기도 응답을 받아 많은 고난들에서 건짐을 받았고 그런 과정 중에 한 가지 분명히 깨닫는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 응답의 시기나 방식을 따져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계시기에 나에게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응답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절대로 우연의 일치거나 내가 노력했거나 주변 사람들이 도와준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무런 진전되는 현상이 없다가 일시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사건 사람 여건 등을 통해서 완벽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이십오 년 전 유학생교회를 담임할 때 일입니다. 자체 교회건물을 구입하려고 계약을 맺고 은행의 대출승인도 얻었습니다. 보증금 8만 불을 납입하는 마감 하루 전까지 만 불이나 모자랐습니다. 더 이상 헌금이 들어올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학생교회가 자체 건물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나 다음 기회로 미루라는 뜻인가 보다 여기고 포기해야 할 판국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루 전날에 뉴욕에서 교회 소식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분이 딱 만 불을 송금해주었습니다. 개인이 감당하기에 큰 부담이 되는 액수였고 우리가 만 불이 모자란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금액으로 전혀 알지도 못하고 예상치도 못한 사람에게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가난한 학생교회가 오히려 당시 그 지역에서 드물게 자체 교회 건물을 갖게 된 것입니다. 목사가 시키니까 반신반의하면서 기도는 했지만 이성적이라 합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유학생 교인들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부인하려야 할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큰 환난 중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출석했어도 이처럼 기도가 응답되는 양상을 잘 분별하면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권능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일들을 몇 번 더 체험하고 나면 그분에 대한 경이로운 두려움마저 생기며 정말로 온전히 믿고 내 인생을 전부 의탁하고 싶어집니다.

순전한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만의 때와 방식으로 문제를 단 번에 완벽하게 해결해주시고 부정적인 여파도 없습니다. 그 후로도 받은 은혜 위에 은혜가 더 얹어지기에 신실하고 쉼 없는 기도를 하게 되고 또 그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의 인생 전체를 거룩한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에서나 기도하되 이젠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 아니라 정말로 마음 턱놓고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바로 곁에서 나와 함께 계시고 그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사실에 전혀 의심치 않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이 응답해주리라는 확신도 듭니다.

그분이 나를 잘 알고 계시다는 확신이 있으니까 굳이 목청을 높여서 외치거나 내 감정을 동원해서 일부러 내 소원을 절실하고 급박하게 과장해서 표현할 이유도 없습니다. 담담하게 대화하듯이 내 심정과 소망과 계획을 아뢰기만 하면 됩니다. 때로 절실하면 절실한 대로 외치고 슬프면 슬픈 대로 눈물 흘려도 됩니다. 어떤 가장과 과장도 필요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있는 모습 그대로 그분 앞에 겸손과 진정으로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 대 인격으로 친밀한 교제로 이어집니다.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하라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많은 신자들이 내가 누구에게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전혀 의식하지 않고 무작정 아뢰기 시작합니다. 죄송하지만 교회를 그렇게 오래 다녀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시편기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고 선언했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이자 권능입니까? 하나님은 환난을 당해 기도하는 당신의 백성을 건져주는 일이 바로 당신을 영화롭게 만든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병 주고 약 주듯이 일부러 환난을 주고 기도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거의 전부가 인간 죄악의 결과입니다. 인간은 아무 일 없이 평안하면 하나님보다 세상 쪽으로 가기 바쁘니까 그런 어려움을 통해서라도 당신을 찾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안타깝게 여기므로 정작 하나님은 기뻐하지는 않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이기 때문에 당신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갓난아이가 밤중에 열이 오르고 아파서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부모가 대신 아파서 미칠 것 같습니다. 아이가 말을 못하니까 어디가 아픈지 모릅니다. 그러다 아이가 배가 고프다, 머리가 아프다는 식으로 말을 하게 되면 부모로선 그런 말만 들어도 너무나 기쁘고 곧바로 최선의 방안으로 해결해줍니다. 하나님도 신자의 사정을 다 아시지만 바로 그런 심정과 자세로 신자를 대하고 계시므로 아이가 부모만 전적으로 의지하듯이 자기 형편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것이 기도입니다.

연약한 인간 부모님은 때로는 자식의 유익보다 자신의 감정은 물론 자기 이익부터 앞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간구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과 원수 되었을 때도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받음으로써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의 생명과도 바꿀 만큼 신자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환난 날의 기도를 듣고 구해주시길 너무나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그분을 아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그분이 나를 잘 알고 계시기에 반드시 나에게 가장 선한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떠난 장소와 시간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폐가 있지만 신자가 기도를 시작하면 하나님도 신자 앞으로 다가와 긴장해서 듣기 시작하십니다. 신자도 제가 지금부터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 귀 담아 들어달라는 기도를 위한 기도부터 하고서 본격적으로 아뢰셔야 합니다. 기도에 반드시 또 첫째로 담아져야 할 사항이 응답만 빨리 받으려는 우리의 욕심과 치성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응답이 늦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정말로 받고 싶은 것은 평소부터 당신을 부모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사랑해온 마음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2022/1/2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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