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규무 교수
한규무 교수가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발표회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줌 영상 캡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김승태 소장)가 9일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389회 학술발표회를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이날 한규무 교수(광주대)는 ‘1924년 강경공립보통학교 신사참배 거부사건에 대한 재검토’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한 교수는 “1924년 10월 충청남도 강경의 강경공립보통학교에서 일어난 신사참배 거부사건은 한국기독교사에서 최초의 신사참배 거부사례로 알려져 있다”며 “당시 언론에 자주 보도되어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킨 사건이다. 한국기독교역사학계의 선행연구도 적은 편은 아니”라고 했다.

이어 “이 사건이 유발하는 난처한 문제들에 대해 검토하려 한다. 이 사건의 의의가 커질수록 부수되는 문제들이 많아진다. 사실 이 사건은 ‘일회성’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라며 “자랑스러운 사건임에 분명하지만, 자칫하면 당시 및 이후 한국기독교계의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최초 거부학생은 50여명, 최종 거부학생은 26명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며 “먼저 개신교인 학생 6명에 주목하려 한다. 교사 김복희가 10월 29일 휴직처분을 받고, 이튿날 학교를 떠나자 여학생 200여명은 그의 유임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이들 중 ‘대표자 26명’은 11월 1일 교장을 만나 항의했으나 여의치 않자 신재순·임맹일·김순·이화자 4명은 자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서울의 동양선교회 본(또는 대전지방) 감리목사 허인수(許仁守, Paul Haines)가 강경에 내려와 교장을 만났다. 따라서 신재순 등 4명은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 학생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또 “이후 학교 측은 11월 18일 신재순·임맹일·이화자·김순·김영희·이개동 등 6명에게 ‘생도를 선동하여 동맹휴학을 계획한 혐의’로 정학처분을 내렸다”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이들은 6명이었다”고 했다.

그는 “신사대제에 앞서 참배문제를 놓고 이들과 주일학교 학생들 사이에 논의가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퇴학처분을 받은 학생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 “교사 김복희가 받은 처분은 면직이 아닌 휴직이었다”며 “‘열렬한 신도자의 숭배자’이자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혐오했던 교장 미야무레의 민족차별적 교육 때문에 유독 강경공립보통학교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벌어진 것이다. 1924년 강경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거부사건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기독교인 학생들은 이전에도 참배를 거부했었을까”라며 “가능성은 먼저, 참배를 강요하지 않았거나 둘째, 거부해도 처벌하지 않았다는 2개뿐이다. 개신교인 학생들의 신사참배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고 했다.

한 교수는 “사건 당시 강경에는 성결교회 말고도 장로교회·감리교회·침례교회가 있었다. 《활천》(1924)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장로교회·감리교회·침례교회 아동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당시 강경침례교회는 김용제 목사, 강경감리교회는 임진국 목사가 담임하고 있었다. ‘강경의 목사’가 맞다면 이들 중 한 명이어야 하며, 그의 ‘조카’ 역시 그가 담임하던 교회에 다녔을 것이다. 천주교 측 자료의 원문을 확인해야 하지만, 다른 개신교회 아동도 참배거부에 동참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고 했다.

이어 “사건 당시 강경의 기독교계는 사태 수습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며 “《활천》에 따르면 참배를 거부한 주일학교 학생의 불신자 아버지도 참석했다. 따라서 이때 모인이들은 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아동의 가족·친척이었다. 하지만 개신교 측에서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또 “사건 이후에도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은 참배를 거부했을까”라며 “1925년 5월 강경공립보통학교 6학년생 한준석(15세)이 다이쇼(大正) 일황 은혼식 축하일에 신사 참배를 못하겠다고 단언했다. 달리 말하자면 다른 학생들은 모두 참배했다. 천주교와 개신교 학생들 모두 1924년 10월 때와는 달리 거부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1930년 5월에는 안동고등여학교 학생 6명이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정학처분을 받았는데, 이는 대정 15년(주: 대정 13년의 오기) 충남 강경에서 있은 후 처음이었다고 한다”며 “공립학교에 다시는 전국의 기독교인 학생들은 대부분 신사에 참배했다는 뜻이다. 강경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2006년 7월 강경성결교회 앞에 「최초신사참배거부선도기념비」가 건립됐다”며 “의아한 점은, 교사와 학생들에게 총을 겨누는 경찰,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학생, 만세를 부르고 있는 교사 등의 모습이다. 당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57명의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은 이해할 수 있지만, 거부운동에 함께 참여한 일반학생 5명은 그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신사참배 거부보다는 3·1운동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했다.

이어 “강경지역 기독교인들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는가”라며 “당연히 아니었다. 논산군의 각파 기독교인들은 1938년 4월 29일 천장절축일(天長節祝日) 신사에 참배했다. 하지만 이 점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강경지역 기독교계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강경공립보통학교 기독교인 학생들의 신사참배 거부를 높게 평가할수록 이때의 신사참배 순응을 설명하기가 난처해진다”며 “그래서 이 사건은 우리를 자랑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부끄럽게 만들기도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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