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7)

1. 두목이냐, 지도자냐?

두목(頭目)은 원래 ‘머리에 눈이 하나 더 달렸다’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것입니다. 눈이 하나 더 많다는 것은 첫째, 남들보다 더 많이 본다는 뜻입니다. 남들은 눈이 두 개인데 저는 세 개이므로 두 개로 볼 수 없는 것을 더 보므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머리에 눈이 하나 더 달렸다는 것은 멀고 높은 곳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특히 얼굴에 달린 두 눈으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하지만 두목은 높이 눈이 머리에 달림으로 자연스럽게 하늘의 일을 살피는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셋째, 두목의 눈은 통치자의 상징으로 주어진 눈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의 안위를 살피는 눈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목의 눈을 바라봄으로 그 눈이 살아있는가, 죽었는가, 아니면 잠자고 있는가, 졸고 있는가를 보며 자기 삶의 안위를 강구합니다. 그러므로 두목의 눈은 백성에게 중요한 위치와 기능과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눈이 됩니다.

그런데 두목의 사전상 어의는 ‘좋지 않은 집단의 우두머리’라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두목이 자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혜의 눈을 가지고 백성을 섬기고 잘 인도하는 사명을 저버리고 백성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일에 사용하면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멀리 바라보고, 하늘의 일을 살피면서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하라는 원래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그 눈으로 백성들을 감시하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으로 남용한다면 두목은 그야말로 나쁜 우두머리인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두목은 ‘지도자’(指導者)로 불립니다. 지도자는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키는 사람’입니다. 백성들이 나아갈 길을 손수 앞서가며 길을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한자로 ‘가리킬 指’는 손으로 지목한다는 것입니다. 턱이나 몸으로 가리키면 어디를 가리키는지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손으로 정확하게 가리킨다는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이끌 導’가 쓰였습니다. 이 단어는 ‘길 道’ 밑에다 寸자를 넣어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서 ‘촌’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손목 안쪽에 맥박이 뛰는 부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가리키는 손가락에 피를 공급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길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생명이 흐르듯이 참된 길을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좋은 지도자는 나쁜 길을 버리고 좋은 길, 유익한 길, 선한 길을 백성에게 안내해야 할 책무를 지닙니다. 두 번째 뜻은 길이의 단위입니다. 1촌은 약 3cm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지도자가 얼마나 백성과 가까이 동거해야 하는 존재인가를 암시합니다. 길을 가리킨다 하면서 자신은 저 멀리 구궁 궁궐에 앉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백성과 함께 하며 길을 걷는다는 깊은 의미가 이 한자어 속에 담긴 것입니다.

두목이냐, 지도자냐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먼저 위하는 자인가, 아니면 자신보다 백성을 먼저 섬기는 자인가에 달렸습니다.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자는 두목입니다. 두목은 무력이나 힘으로 누르는 자입니다. 군림하고 명령하고 추종자들을 동원하여 위력을 가하는 자입니다. 어떤 경우엔 법을 가지고 통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법은 자신에게만 유리한 법입니다. 남들을 찍어 누르기 위해 만들어낸 법입니다. 무엇보다 두목은 자신에 대한 비판에 귀를 닫고 그러한 자를 적으로 삼아 모조리 숙청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를 먼저 개혁하는 자입니다. 겸손으로 무장하고 백성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는 백성과 함께 합니다. 백성에게 바른길을 가리키고 자신이 먼저 그 길을 걸어가며 백성들을 향해 자발적으로 따라오도록 설득하고 설명하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백성을 섬깁니다. 무엇보다 백성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합니다. 무엇보다 지도자는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모든 공은 백성의 것이라고 한사코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며 조용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2. 예수님

인류 역사에는 가장 위대한 지도자는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물론 우리가 보기에 훌륭한 인생을 살다간 분들이 많습니다. 소위 4대 성인을 시작으로 각 나라와 민족과 세계역사에서 빛을 발한 위대한 영웅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훌륭했다’(great)라는 표현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고 독특하며 진정한 지도자였다는 것은 다음 세 가지를 통해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위에서 땅 아래로 오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출생 자체가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흉내 낼 수 없는 출생입니다. 인간은 모두 땅에서 나서 땅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위에서 나서 이곳에서 사시다가 다시 위로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명확하게 가리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된 길을 우리에게 가리키신 유일한 지도자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 왕이 왕의 자리를 버리고 왕으로 누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시어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시고 사신 것입니다. 보통 위에서 아래로 온 것은 추락하는 것입니다. 유성이 지구로 추락합니다. 겨울 산의 눈사태도 눈이 아래로 추락하는 것입니다. 나뭇잎의 잎사귀가 가을에 낙엽이 되어 땅으로 떨어집니다. 모든 물건은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아래로 떨어집니다.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은 좋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언가 질적으로 저하되고 좋지 않은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비하’(卑下)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굴욕’이라는 뜻의 humiliation입니다. 한 마디로 고귀한 사람이 비천한 신세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겸손이라는 humility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하는 delsrks을 섬기기 위한 겸손의 행위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본성이 겸손이셨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신 유일한 지도자이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언제나 병든 자, 낮은 자, 약한 자, 고통에 신음하는 자, 비천한 자, 외로움에 빠져 사는 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남들이 모두 기피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세상의 편견을 깨트리시고 그들에게 복음의 빛과 함께 평화를 선물하셨습니다. 편견과 왜곡된 평가로부터 사마리아인들의 자부심을 건져올린 것입니다. 무릇 지도자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입니다. 못된 두목은 자신의 궁궐에 앉아 호화호식하지만 참된 지도자는 자신의 배보다 백성을 먼저 배불리 먹이는 사람입니다. 백성의 고초를 살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잠잘 곳도 없이 떠도는 나그네였습니다. 일평생을 자신의 백성을 위해 살다가 끝내 백성들의 모든 죄악을 대속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참된 지도자는 이렇게 백성을 위해 희생합니다. 무엇보다 인류가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형벌을 감내하신 예수님은 유일하신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이것이 다른 인간 지도자와 다른 가치인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삶

모두가 두목이 되고 싶어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남을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다 잘나고 똑똑해서 다른 사람의 충고나 조언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너만 아냐, 나도 그 정도는 안다’고 떠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무신론의 극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미신은 물론이고 무신론자들의 독무대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기들끼리 연대하고 힘을 합쳐 자신들의 세상을 지지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대항하고 척결하고자 합니다. 그것을 ‘개혁’이라 이름 붙이고 자신들의 힘을 과시합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세상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 없는 세상’입니다. 자신들의 세상에 하나님이 개입하면 골치가 아프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라는 거울에 자신들을 비추어보면 자신들의 속셈이 들통나기 때문에 거울을 치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진리가 자신들의 삶의 기준이 된다면 모조리 뜯어고치고 개량해야 하기에 그러한 간섭을 당하기 싫은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자신이 통치자이며 자신이 유일한 존재라는 생각을 버리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대항하기 위해 가시적으로 연대하고 연합하지만 결국에는 서로 분쟁하고 분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들의 행동 양식에는 일정한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들이 표방하는 기준은 “그때그때 달라요‘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 양식은 어느 정도가 지나면 곧 서로 부딪치기 마련입니다. 2+2=4인데 이 답이 그때그때 달라진다면 문제는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불변의 법칙이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불변의 진리가 유지되고 안전을 바랄 수 있습니까? 시시때때로 자신의 인생의 기준이 변한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살 수 있습니까? 서로 생각이 다르고 주장이 다르고 법칙이 다른데 어떻게 화합합니까? 나는 4라 하고 너는 3이라 한다면 누가 옳고 그른 것입니까? 서로 답이 달라도 살 수 있습니까? 만약에 A가 B에게 20억을 빌려주고 또 20억을 빌려주었는데 빌린 B가 30억을 갚아놓고 다 갚았다고 하면 A가 그것을 인정하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히도 지금 세상은 이런 주장을 서로 하면서 자신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사회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는 모두 파멸입니다. 서로 싸우고 분쟁하고 죽이고 하다가 모두 멸망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세상은 모든 자아와 자아가 독립과 특별한 위치와 권리를 주장하는 세상입니다. 한 마디로 ’자아 중심(Ego-Centered)의 세계입니다. 유달리 자아의 독립과 권리를 강조하는 시대입니다. 저는 이것을 ‘자아 발광(Ego-Crazy)의 시대’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세상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각자 개인을 내세우는 자아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자아 중심은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 자아 중심은 자기를 높이는 사상입니다.
~ 자기가 높은 곳에 올라 자기 이름을 빛내고자 하는 사상입니다. 특별히 이들의 특징은 자아를 강조하지만 정작 ‘홀로서기’는 못하고 마치 귀신들처럼 늘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는 것입니다. 이 자아 중심의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바벨탑을 쌓아놓고 자기 이름들을 높이고자 하였을 때 하나님은 이들의 대적을 심판하시고 이들을 온 땅에 흩으셨습니다(창 11장 참조).

둘째, 자아 중심은 대접받고자 하는 사상입니다.
~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른 이를 섬기지 못합니다. 불행히도 자기 중심주의자의 눈에는 모든 타인이 적으로 보이고 경쟁자로 보이지만 하나님 중심주의자의 눈에는 모든 이가 섬겨야 할 하나님의 지체들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셋째, 자아 중심은 자기 영역을 표시하고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자입니다.
~ 물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각자가 이 땅에서 누려야 하는 ‘분깃’을 주셨습니다. 이 분깃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분량입니다. 그러나 자아 중심의 사람은 이 분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 영역을 넓히고 넓히어 결국에는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고 자기가 그 왕국의 왕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왕이 아니라 종입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영원하신 우리의 왕이십니다. 왕에게 굴복하셔야 합니다. 왜냐면 나는 항상 틀려도 왕이신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기 때문입니다.

넷째, 자아 중심은 분쟁하는 자입니다.
~ 자아는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다른 자아와 대결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아와 자아는 대립하고 분쟁하기 마련입니다. 나의 이익과 다른 자아의 이익이 상충하면 충돌합니다. 세상은 독자적인 자아의 욕구가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는 곳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진정한 화합과 평화가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서만 이것이 가능합니다.

다섯째, 자아 중심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입니다.
~ 결국 자아 중심이 노리는 것은 자신이 주인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을 주인의 자리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일러 ‘반역‘(rebellion)이라 합니다. 자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본성상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히 존재하고 우리는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4. 결어

종으로 ’섬김‘다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섬기는 자는 숨겨진 곳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이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이를 높이고 다른 이를 빛나도록 조연하는 사람입니다. 주연은 주연을 빛나게 하는 배경이 되는 사람입니다. 배경이 없으면 모든 존재는 빛나지 못합니다. 별들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것은 밤하늘이라는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꽃이라 말하기엔 부족해 보이는 코스모스마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것은 가을이라는 배경이 받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1 인자의 배경에는 늘 숨은 2 인자의 조력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뒤에 갈렙이 있었고 바울에겐 바나바 사도가 뒤를 받치고 있었습니다. 킹 메이커의 조력 없이 킹의 자리에 오르기 어렵습니다.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선발하기 어려운 자리가 제2 바이올린 연주자라 합니다. 모두가 주목받는 제1 연주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조연이자 배경이 되어 섬기는 자의 자리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2021년도 표어로 ”종이 되라“가 주어졌습니다. 종(히/에베드, 헬/둘로스)은 ‘한 주인에게 순종할 의무를 지니고 있는 남자나 여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성경 시대에 종은 그 주인의 재산이며 주인의 재량권 아래에 전적으로 놓였다는 점에서 거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신분과 위치와 사명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이 노예에게도 인간적인 예우를 하도록 가르친 것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합당하게 대우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종은 주인을 섬기는 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만 섬김을 받는다 하지 않으시고 우리더러 네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라“(빌 2:3)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정신은 섬김입니다. 이 섬김이 진정한 구제요 봉사입니다.

한 해 동안 이 섬김의 정신과 지세로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위상과 본질을 회복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최더함(Th. D, 역사신학, 바로선개혁교회)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email protected]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 종합일간지 '기독일보 구독신청 바로가기'

#최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