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선 교수
▲서광선 교수(이화여대 명예교수·평통기연 고문)

나는 15살 중학교 3학년 1학기 방학 때 만주에서 8.15를 맞이했다. 만주, 내가 살던 도시는 일본 제국주의가 개발한 탄광과 철강 제철소 등이 있어서 일본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이 많이 와서 살고 있어서 일본 중학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 학생은 잘 받아 주지 않는데 좁은 문을 뚫고 어렵사리 입학해서 일본 아이들과 공부했다. 1945년 봄, 태평양 전쟁이 일본 패망으로 끝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 중학생들은 학업을 전폐하고 학교 근처의 제철소에서 허드레 일을 하면서 "구국봉사활동"이랍시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8월 초, 소련 군대가 만주 국경선을 넘어 조선을 향해서 침공해 들어온다는 소식이 퍼졌다. 우리 중학생들은 학교 근처의 산언덕에 삽과 곡꽹이를 들고 올라가서 방공호 크기의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소련 군 탱크가 내려오다가 우리 중학생들이 파 놓은 구덩이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나를 포함한 일본 중학생들은 대충 삽질을 하면서 소련 탱크가 우리가 판 구덩이에 떨어져 움직이지 못한다는 말을 농담으로 돌리고 우스개거리로 삼고 있었다. 그러니 하루에 구덩이 한 두 개 정도 밖에 파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8월 15일 12시 직전에 담임선생이 우리 학생들을 자기 둘레로 모여 서게 하였다. 12시 정오 정각에 12시를 알리는 시보(時報)와 함께 차려 자세 명령이 내렸다. 우리는 담임선생이 들고 있는 단파 라디오에 차려 자세로 귀를 기울였다. 일본 황제의 목소리였다.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감기에 걸린 목소리 같기도 한 늙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본이 전쟁에 패망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군에 무조건 항복을 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일본 학생들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고, 담임선생도 무릎까지 꿇고 앉아서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조선 사람인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랐다. 항일 운동, 신사 참배 거부로 조선에서 목회를 못하고 만주로 망명 와서 개척교회를 하고 있는 목사의 아들이 일본 패망에 대해서 울기는커녕, 만세를 부르고 싶은데, 그랬다간 일본 아이들한테 맞아 죽을 것 같은 분위기여서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만 있다가, 담임선생이 "자 이제 그만 해산하고 집에 가서 짐 싸고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자. 사요나라 (안녕)"하는 말이 떨어지자, 나는 산 언덕을 숨차게 뛰어 내려 왔다. 나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문 앞에 나와서 만세를 부르며 나를 환영하고 계셨다.

그리고 우리는 이삿짐 보따리를 지고 메고 이고 만주를 떠났다. 38선이 생기고 남과 북이 분단 되었고, 남과 북이 갈라져서 서로 왕래할 수 없게 되는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소련군대가 진군하고 김일성 장군이 평양에 입성 했고,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승전가를 불러 대면서 남침했고 통일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큰 소리 치고 있었다. 8.15 해방과 분단, 그리고 6.25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53년 7월에 미국과 중공군 그리고 북한 인민군 사이에 체결된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자는 운동을 NCCK가 주동이 되어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평화협정"은 커녕, 핵무기에 장거리 미사일을 쏘아대고 있고, 미국은 중국을 견제한다고 한국 땅에 "사드"를 배치한다고 야단법석이다. 우리 어린 중학생들이 만주 땅 언덕에서 남침하는 소련 탱크를 막는다고 힘들게 판 구덩이가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처럼, 핵폭탄도 "사드"도 평화와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사드" 보다 핵폭탄 보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평화와 한반도의 안보를 진정으로 이야기하는 8.15, 개성공단이 다시 열리고, 금강산에 백두산에 남과 북,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관광객이 모여 들고, 우리 KTX 기차로 휴전선을 넘어 평양에로, 그리고 압록강 철교를 타고 넘어서 만주로 몽고로 시베리아로 여행 가고 오는 날, 이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날, 우리는 다시 태극기를 들고 해방을 노래하며 춤추게 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다음 8.15를 기다린다.

/글·사진=평통기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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