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규 목사
▲이선규 목사ㅣ금천교회

[기독일보 이선규 목사] 요즘 시리아 내전으로 촉발된 난민들로 인해 나라마다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합니다.

받아 주자니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고 안 받자니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체면이 안서고 그래서 우리 나 라도 난민을 찾아서 일정 숫자를 받아 드린다고 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최초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는 행복의 에덴을 떠나 동쪽으로 옮겨와 밭을 갈고 곡식을 가꾸느라고 이마에 땀이 흘리는 일이 있었지만 바로 거기서 부터 활발한 농경문화가 싹트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인간은 하나의 주사위에 던져진 존재라고 말했듯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엄마에게서 모성애를 발견하지만 차차 엄마 품을 벗어나서 다른 이성을 찾게 됩니다.

성서에 보면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야곱의 이야기나 요셉의 일생 모세의 삶이 잘 말해줍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갈대아를 떠나 하란으로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할 때 갈바를 알지 못했으나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나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고향을 탈출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밟은 것이 미국역사의 시작이었고 유그노들은 불란서의 국경을 넘어 오늘의 유럽의 공업 지대를 형성하였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첫째로 안정의 상태 정착의 상태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전진하는 것이요 비록 힘이 들고 어려운 길을 가지만,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창출해 내는 삶인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보배를 발견한 사람이 아낌없이 나의 삶이나 젊음도 나의 시간과 재능을 투자하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값싼 안일 동굴 속에 갇혀 있는 달팽이처럼 파묻혀 사는 사람은 동굴 입구로 비쳐오는 조그만 공간을 바라 볼 수는 있어도 찬란한 빛이 내려 쪼이는 더 없는 세계 저 광활한 세상이나 창공을 바라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성서에는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였고 믿는 자에게 확실한 미래가 보장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이 믿는 순간부터 우리 인생행로는 탄탄대로가 보장 되어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실 문제가 생길 수 있고 더 험해 질수 있으며 좁은 길을 가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정의 상태에서 미지의 세계로 무감각의 세계에서 감각의 세계, 깨달음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이 이렇게 정든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난 것은 <10절>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설계 하시고 지으신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한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영 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그 종착역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약속인 영원한 도성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 하기에 아브라함 이후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향햐는 역사였습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라고 하였고 이스라엘은 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출애굽의 긴 여정을 행진 하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이면서 동시에 약속 장입니다. 믿음은 곧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나 세상을 믿는 것은 바라는 것의 허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거짓이다”라는 것 입니다.

오늘의 본문 <11절>에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 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 하신 이를 바라보았으니 이는 약속 이를 미쁘신 줄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사라는 약속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쁘심을 믿는데 따라 그 사람의 행동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약속만 하시는 분이 아니고 그 약속을 철저히 준행 하시는 분이십니다.
미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바른 믿음인 것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가진 사람들은 고향을 만들며 사는 존재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아벨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 모세, 사사, 선지 자들의 이름 앞에는 ‘믿음으로’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것이 그들의 동력을 이끌어간 동력이 되었음을 말씀 하였습니다.

이 “피스데이”가 그들로 하여금 창조적이며, 역동적이며, 적극적인 삶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향의 건설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었는가를 <빌립보서 3:13>에서 잘 보여줍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13~14)

신앙이란 미래에 대한 희망이요 기대라고 볼 때 내가 이렇게 하면 반드시 축복해 주시리라는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25>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서 만일 주인이 이자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하면 10달란트 가지고 온 종과 4달란트를 가지고 온 종에게 각각 다른 상급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이 두 사람에게 똑 같은 칭찬과 축복을 내려 주었습니다.

주인이 관심 있게 본 것은 한 달란트 그대로 가지고 온 종에게 책망한 것은 곧 신앙의 부족 곧 나태와 게으름 인색을 책망한 것입니다.

주인에게 칭찬 받은 종은 말씀을 받은 즉시 용기를 가지고 일에 착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받아 믿고 있는 바를 테스트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실험해 보려고 하 면 실천하고 적응해 보는 길 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많이 아는 것만으로 참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문제 앞에 직면 했다 면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고 말씀대로 것이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성경의 원칙대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상이 참 위대합니까? 내 일을 위한 사상 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일 때문에 용기가 나고 그 믿음 때문에 나의 보배로 여기는 것까지도 포기 할 수 있고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 참 신앙인 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과거의 신앙의 위인들을 소개 하면서 그들의 신앙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사자의 입을 틀어막기도 하였으며 불의 세력을 면하기도 하였고 믿음으로 연약한 중에도 강해지기도 하였으며 믿는 진리 때문에 핍박과 순교 까지도 기쁘게 감수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세계의 영향력 있는 애급의 공주의 아들 이라 칭함을 거절 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급의 보화보다 더 큰 보화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모세가 판단이 부족해서 이였습니까? “믿음으로 장성하여” 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결과를 <히11:24>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믿음의 위대한 증거를 남기고 갔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대한 산 증언을 남기었으니 믿음으로 아벨은 죽었으나 오히려 믿음으로 말하는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에녹은 내세를 부인하는 자들을 향하여 천국이 분명히 있음을 보여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11:5>에 에녹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옮기 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하는 증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가장 불의했던 시대에 살면서도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천국이 있음을 몸소 보여준 산 증인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을 증거 하는 일이나 영광 돌리는 일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때와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모세는 광야에서 바로 왕 앞으로 엘리야는 가멜 산에서 아합 왕에게로 베드로는 공회 앞으로 나갔으며 바울은 이방 총독과 임금들 앞으로 초막이든 궁궐이든 사람이 알아주든 몰라주던 상관치 않고 하나님의 명령만 내리면 어떤 경우도 개의치 않고 나갔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하여 인류 역사는 변화되어 왔고 또한 변화 되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하나님이 십니다. 여기 미쁘신 하나님 이라는 말씀은 믿을 만 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큼 신실 하십니까? 하나님은 그 외아들을 주시기로 약속 하 신 대로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미쁘신 하나님 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신실해야 합니다. 얼마나 신실해야 할까요? 아브라함처럼 신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자세가 신실 할 때 그 사람이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여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시하는 곳으로 나아가 역사를 창조하고 자신은 물론 가정과 교회 나아가 민족의 역사를 변화 시키는 역사의 주역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역사의 주역으로 쓰임 받는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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