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34장 1~13절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단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강한 인물을 찾고자 하는 낙관적 수사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진정한 영적 지도자는, 가장 어두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되곤 했다. 오늘 우리는 역대하 34장에 등장하는 요시야 왕의 삶을 통해, 그러한 ‘영적 돌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목도하게 된다.
히스기야의 말년부터 시작된 남유다의 영적 침체는, 므낫세와 아몬의 시대를 거치며 더욱 짙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어둠을 뚫고 새로운 시대를 여실 요시야라는 한 사람을 예비하셨다. 여기서 ‘돌파’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히브리어로는 ‘페레츠(פֶרֶץ)’인데, 이는 단순히 빠져나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막혀 있던 것을 찢고 밀어내며 길을 트는 강력한 행동을 의미한다. 성경은 이러한 돌파의 역사를, 단지 과거의 일로 간직해 두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각자의 삶과, 교회, 그리고 이 나라 가운데도 여전히 이 돌파의 은혜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요시야는 겨우 여덟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이는 역대하 33장 후반부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의 아버지 아몬 왕이 신하들의 반역으로 살해된 후,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반역자들을 척결하고 아몬의 아들 요시야를 다시 왕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당시의 유다 백성은 단순히 정치적 정통성을 회복시킨 것이 아니었다. 히스기야의 부흥과 므낫세의 회개를 통해, 백성들 안에 다시금 살아난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성이 깨어 있었고, 말씀 위에 서 있었다. 이러한 백성이 있는 한, 나라도 교회도 여전히 희망이 있다.
그러나 돌파는 백성의 각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요시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핵심이다. 역대하 34장 2절은 요시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여기서 ‘정직하게’라는 말은 단순히 거짓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히브리어 ‘야샤르(יָשָׁר)’는 ‘똑바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요시야는 좌우를 기웃거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직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정직’은 성경이 평가하는 믿음의 핵심이며,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찾으시는 인물의 중요한 자질이기도 하다.
인생은 걸어가는 여정이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문제는 방향이다. 방향을 알지 못한 채 걸어가는 것은 방황일 뿐이다. 이 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지만, 방향 없이 분주할 뿐 떠돌고 있다. 이는 개인뿐 아니라, 가정, 교회, 국가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현실이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그 방향이 분명히 우리 삶 가운데 세워져야 한다.
또한 방향만 올바르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길을 걸어갈 힘이 필요하다. 요시야가 “정직하게 행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방향 감각만 좋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방향으로 실제로 달려갔다는 뜻이다. 시대가 아무리 무너지고 악해도, 믿음의 사람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 스가랴 8장 9절은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라고 명령한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무너지는 시대 속에서, 복음의 길을 향해 끝까지 달려가는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교회가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한가. 방향은 알고 있으나, 힘이 부족하여 무기력에 빠진 이들이 많다. 신앙이 점점 내면으로 파고들고,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며 도피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건강한 믿음이 아니다. 신앙은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 마치 고인 물이 부패하듯, 내면에만 갇힌 신앙은 결국 낙심과 절망을 불러온다.
이러한 시대에, 요시야는 거룩과 정결이라는 본질적 사명을 회복하였다. 본문 3절 이하에서 그는 우상들을 철저히 제거하고,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는 일을 단행한다. 이는 단순한 종교 개혁이 아니라, 영적인 결단이었다. 산당, 아세라 목상, 아로새긴 우상 등, 모든 형태의 영적 혼합주의를 척결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저항과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씀에 기초하여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요시야의 결단을 통해 국가적 영적 돌파를 일으키셨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우상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단지 외형적인 불상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더 의지하는 것, 더 두려워하는 것이 모두 우상이다. 특히 이 시대는 진화론, 인본주의, 뉴에이지, 공산주의 등 다양한 미혹의 메시지들로 가득하다. 이 모든 혼합주의와 미혹의 영들을 철저히 분별하고 제거하는 일은, 오늘날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사명이다.
요시야는 또한 여호와의 성전을 보수하였다(8절). 이는 상징적인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무너진 예배를 회복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참된 개혁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중도나 중립을 추구하는 회색지대가 아니다. 하나님께로 완전히 기울어지는 것이다. 요시야는 자신을 ‘하나님 쪽으로’ 치우치게 했다. 중도를 자처하지 않고, 말씀의 편에 서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가장 안정된 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위기 가운데 있다. 거짓과 왜곡, 불의와 무법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성도는 방향을 분명히 하고, 힘을 내어 걸어가며,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다시 세워야 한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 일터와 민족 가운데, 우상은 무너져야 하며, 성소는 재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러한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요시야처럼, 정직하게 행하고, 방향을 바로잡아 하나님께로 직진하는 그 한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오늘 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돌파의 통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나’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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