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아펜젤러 학술대회
제2회 아펜젤러 학술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왼쪽 두 번째부터 박경수·김인수·서종원 박사. ©장지동 기자

505주년 종교개혁 기념일을 앞두고 제2회 아펜젤러 학술대회가 25일 오후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진리로 거룩하게: 발도, 위클리프, 후스’라는 주제로 열렸다. 이날 박경수 박사(장신대, 종교개혁사)는 ‘얀 후스의 「교회」(De ecclesia)에 나타난 교회개혁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박 박사는 “종교개혁을 말할 때 우리는 보통 루터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루터보다 100여 년 전에 이미 로마가톨릭교회를 비판하면서 교회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어 올린 인물이 바로 체코의 종교개혁자 후스”라며 “일찍이 루터는 ‘우리 모두는 후스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자신이 후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았음을 천명하였다”고 했다.

이어 “로마가톨릭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화형을 당한 후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 해도 위험천만한 일인데 루터는 자신이 바로 후스주의자라고 고백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경수 박사
박경수 박사가 발제를 하고 있다. ©장지동 기자

그는 “얀 후스(Jan Hus)는 1371년 경에 보헤미아 남부지역에 있는 후시네츠(Husinec)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며 “1390년경에 그는 프라하대학(카를 4세에 의해 1348년 설립되었기 때문에 카를대학으로도 불린다)의 인문학부에 입학하였다”고 했다.

이어 “그 무렵 체코의 프라하와 잉글랜드의 런던은 정치적·사상적으로 대단히 두터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잉글랜드의 개혁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24~1384년)의 사상이 프라하에 널리 소개되었다”며 “프라하대학에서 가르쳤던 교수들 가운데 팔레츠의 스테판(Stephen von Palecz)과 츠나임의 스타니스라우스(Stanislaus von Znaim) 등이 위클리프의 사상에 매료되었고, 이들은 후스의 동료들이었다”고 했다.

또한 “후스는 자연스럽게 위클리프의 작품을 소개받았고, 그의 저서들을 직접 손으로 필사하면서 공부하였다. 후스는 1393년에 바칼라르(Bakalar, 요즘의 학사) 학위를 받았고, 1396년에는 마기스터(Magister, 요즘의 석사) 학위를 받았다”며 “1398~1399년 사이에 후스는 프라하대학에서 강의하는 한편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후스는 1403년 6개월 동안 프라하 대학의 학장을 맡았고 1409년 다시 1년 동안 학장직을 수행하였다”고 했다.

박 박사는 “후스는 1400년에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1401년부터 프라하에 있는 성 미가엘교회에서 설교하였고, 1402년부터는 베들레헴채플의 설교자가 되었다”며 “베들레헴채플의 설교자로서 후스는 향후 10여 년 동안 약 3,000번 이상 설교하였다”고 했다.

이어 “1406년 이후 위클리프 사상에 대한 찬반 논쟁과 시비가 프라하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났고, 위클리프의 사상을 따르던 후스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입장을 달리했다. 1411년 후스는 파문 당했다”며 “1414년에 독일의 도시 콘스탄츠(Konstanz)에서 공의회가 열렸고, 공개석상에서 주로 권위에 대한 문제가 논쟁의 주제로 부각되었다. 공의회의 결정이 궁극적인 권위를 가지며, 교황이 교회의 머리라고 강조하는 후스의 반대자들의 주장에 맞서 후스는 진리의 유일무이한 원천은 성서이며,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주장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결국, 1415년 7월 6일에 소집된 콘스탄츠 공의회 전체회의에서 후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고 했다.

그는 “후스의 「교회」는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책의 내용으로 인해 후스는 결국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고, 화형에 처해졌다”며 “어떤 점에서 이 책이 여전히 필요한 것인가”라고 했다.

박 박사는 “먼저,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말한다. 후스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시며,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반석이시다. 이것은 교회가 인간의 피조물이 아니라 성령의 피조물이라는 말”이라며 “행여 목사든 장로든 성도든 누구든지 교회의 주인 노릇이나 머리 행세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후스는 이 땅 위의 전투하는 교회는 알곡과 쭉정이가 섞여 있는 ‘혼합된 몸’(corpusmixtum)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은총을 따라 선택을 받은 예정된 무리라고 주장하였다”며 “그저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 아니라 좁은 길을 순전한 믿음으로 걸어가는 제자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덧붙였다.

박 박사는 “둘째로 실천하는 신앙의 중요성을 보여준다”며 “후스는 우리에게 단지 머리로만 동의하는 신앙으로 만족하지 말고, 경건의 진보를 분명히 드러내는 신앙, 삶으로 입증되는 신앙,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는 신앙, 열매 맺는 신앙을 가지라고 강력하게 도전한다”고 했다.

이어 “셋째로 복음이 가르치는 진리로 돌아가라고 말한다”며 “종교개혁은 다름 아닌 근본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운동이었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진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음으로써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고 했다.

아울러 “후스는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 얼마나 좁은 길이며 어려운 길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했다.

한편, 이후 김인수 박사(감신대 조직신학)·서종원 박사(감신대 교회사)의 논찬에 이어 이후정 총장(감신대)의 축사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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