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복음통일전문 선교컨퍼런스
글로벌복음통일전문 선교컨퍼런스 둘째날 탈북 신학생들과 대회 관계자 및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미주 기독일보

제3차 글로벌복음통일전문 선교컨퍼런스 둘째 날 전해진 탈북 신학생들의 간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북한의 동포들이 굶주림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휴스턴한빛교회(담임 정영락 목사)에서 16일(현지 시간) 진행된 간증시간을 통해 그들은 각자 북한에서의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고백했고, 고난이 극심했던 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 또한 더욱 큰 눈물의 감격으로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간증 도중 하나님이 처음으로 마음에 다가왔던 순간이나 예수님을 처음 영접하던 감격을 떠올리던 탈북 신학생들은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보였다.

다양한 학생들이 간증을 전한 만큼 이들의 출신 배경과 탈북 동기 및 한국으로 오게 된 과정은 제 각각이었다. 하지만 현재 신학생이 되어 북한 복음화를 위해 온 생을 바치겠다는 각오는 모두 동일했다.

올해 대회에 참석한 총 13명의 탈북 신학생들 중 총 7명이 이날 간증을 전했다. 이들은 현재 감신대, 침례시내, 서울신대, 총신대, 장신대 등에서 공부하고 있다.

가장 처음 간증을 했던 허○○ 전도사는 양강도 출신으로 한반도 최북단 지역에서 태어났다. 6.25 당시 포로 귀환병이었던 친할아버지로 인해 그의 집안은 당국으로부터 평생 동안 불이익을 받아야 했고, 공부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은 모두 막히고 평생 노동자로만 연명해야 하는 환경 속에 자라났다.

집이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마주한 곳이었기에 철조망이 없던 시절 아버지가 식량을 구하러 자주 중국을 왕래하면서 한국의 소식을 자주 접했고 이를 계기로 아버지가 언젠가는 탈북을 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2016년에 아버지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보위부에서 뇌물을 요구한 것을 거부하자 없던 죄목을 씌워 감옥에 가게 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감옥에 가 있는 동안 보위부는 매일 집을 감시하고 수시로 방문을 두드려댔다. 출신 성분이 안 좋기에 한 마디 반항도 못하고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인식하고 살아야 했다. 탈북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생겼다.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잠들었는데 너무 피곤해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못 들었던 것임에도 자고 있었다는 이유로 모질게 욕하고 핍박을 했다. 아무 죄도 없음에도 이렇게 못살게 굴어도 그저 참아야 했던 어머니 모습을 본 이후로는 하루하루 탈북할 방법만 찾아보게 됐다. 마침 가까운 친구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게 됐는데 그 친구의 오빠가 한국으로 탈북했던 사실을 알게 됐고 이것을 계기로 가능성 있는 탈북 루트를 확보하게 됐다.

2019년 3월 여전히 얼음이 떠다니는 바라보기만 해도 두려운 그 언 강을 건너면서 중국 땅을 밟았고, 브로커를 소개받고 산을 넘어 동남아 지역으로 갔다. 열대밀림 지역을 오랜 시간에 거쳐 겨우 가로지르며 도움을 줄 선교사를 만나게 됐다. 그 선교사는 자신들을 정말 반갑게 맞아줬고 마치 친자식처럼 돌봐주면서 성경공부도 하게 했다. 북한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성경책이기에 무척 궁금했는데 그 내용은 북한에서 선전했던 내용과 달리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쓰여있었고 사랑으로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있었다. 또 찬양을 통해 성경 말씀을 통해 나를 사랑하는 분이 계시다는 것이 점점 믿겨지게 됐다. 이내 마음이 녹아 내렸고 우리는 사랑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

허 전도사는 이러한 감격을 하루 빨리 북한에 전하고 싶은 소망을 밝혔다. 비록 빈손으로 탈북했지만 지금은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것이 그의 간증이다. 비록 얼마 전 어머니가 가족 중에 마지막으로 탈북하다 최근에 북송됐다고 들었고 지금까지 소식을 전혀 알 수가 없지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만을 믿으며 매 순간 기도로 북한 사역을 묵묵하게 준비하고 있다.

두 번째 간증을 전한 탈북 신학생은 북한에서 일주일 동안 소금물만 먹을 정도의 극심한 굶주림 속에서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먹지 못해 칭얼거리며 안기려던 1살짜리 막내를 밀쳐냈던 9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막내의 살아 생전 마지막 모습이었고 마지막 접촉이었다. 간증 내내 북한에서의 극심한 고난의 상황을 전했던 그는 고난이라는 선물은 결국 엄청난 소명으로 이어졌다고 간증했다.

그의 간증에 따르면 그가 9살이던 때에 삼촌은 어머니에게 미화 달러와 성경책을 건넸는데 그것을 이유로 어머니는 감옥에 갇히게 됐다. 당시 아버지가 집에 있었고 자신과 3살 아래인 여동생, 또 6살 터울인 남동생, 그리고 1살 짜리 막내가 있었지만 어머니 없이 극심한 굶주림 속에서 결국 막내는 아사하고 말았다. 자신이 일주일 동안 굶으며 겨우 수돗물에 소금만 타서 먹고 있었는데 젖먹이 막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고, 또 9살 당시의 자신도 너무 나약하고 어린 나이였다고 회고했다. 자신도 힘드니 귀찮아하며 안기지 말라고 손으로 밀쳐냈던 막내는 자기 앞에서 누웠는데, 그것이 막내의 최후였다. 아버지가 돌아오시고 싸늘한 시체가 된 막냇동생을 아버지는 말없이 담요에 안아서 나가셨다. 그제서야 막내가 죽은 것을 알았고 그럼에도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을 뿐이었다.

어머니 없는 생지옥과 같은 2년이 지나고 외할아버지는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간신히 31KG가 돼 뼈만 남은 어머니를 시체더미 속에서 건져내서 집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어머니는 오자마자 집에서 보이지 않는 막내를 찾았다. 혹시나 이불 속에서 잠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봤지만 결국 막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었다고 한다. 집에 돌아 온 어머니는 묵묵히 일을 하며 모진 환경을 견뎌내고 살았지만 항상 집에서 늘 벽을 멍하니 보고 있던 모습을 보인다. 당시 어머니가 가진 마음의 상처와 육신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탈북 신학생은 회고했다.

이런 북한에서의 극심한 고통을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그는 이러한 자신의 이야기를 이번 컨퍼런스에서 밝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예수님 때문임을 고백했다. 그는 “가장 신실하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평생을 숨기며 제 안에 큰 상처로 계속 안고 지내야 했을 것”이라며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옥살이가 집안의 수치라는 이유로 부모님이 강제로 이혼을 하게 되면서 그는 또 한번의 충격을 받게 된다. 이후 어머니가 삼남매를 모두 거두어 책임을 졌다. 그리고 13살이던 해에 외할아버지가 자살을 했고 이로 인해 어머니는 매일 같이 울면서 북한에서의 삶을 힘들어했다. 그리고 내뱉은 말이 ‘김정일 정부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말이 어떻게 신고가 돼 어머니는 물고문을 일주일 동안 당해야 했다. 자신은 전혀 기억을 못한다고 잡아 뗐고 증거도 불충분하니 겨우 어머니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북한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고 반드시 한국으로 탈북한다는 마음을 그 때 굳히게 됐다. 어머니는 마음만 먹었을 뿐이고 탈북에 대한 생각을 당시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눈치는 어느 정도 챌 수 있었다고 한다.

기회를 보던 차에 탈북을 실행할 때가 왔고, 그 때부터 매일 밤 국경을 건널 기회만을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도 마땅한 기회가 생기지 않아서 결국 압록강을 통해 건너기로 결단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혼자인 어머니로써는 아이들을 데리고 목숨을 걸어야 했던 과정의 연속이었다.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모두 중국으로 건너가는 것을 성공했다. 탈북 과정에서 산 속을 걸으면서 목이 마르면 눈을 한 웅큼씩 잡아 입에 넣고 또 발이 얼면 서로의 뱃속에 넣어 녹였다. 너무 배가 고플 때는 까마귀가 먹는 다 말라비틀어진 열매를 입에 넣어 달랬다. 또 중국인 인신매매단에 쫓기기도 했고 감시하는 눈을 피해 밤에만 다니느라 산속에서 얼어 죽을 위기도 수차례였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고비들을 넘기면서 결국 베트남까지 이르렀는데 잡히고 말았다. 그 곳에서는 무조건 한국 사람이라고 우겼고 드디어 한국 영사관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자초지정을 다 설명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미안하지만 자신들을 받아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그는 회고했다. 이후 다시 중국으로 향하기로 했다. 초소 경비병이 마침 졸고 있는 것을 보고 탈출했고 군견에 쫓기고 나뭇가지와 가시에 옷이 찢어져 가면서 결국 중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는 대한민국에 안 가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다. ‘같은 민족인데 그들은 우리를 환영해주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에 배신감과 슬픔을 느껴야 했다. 13살이었던 당시 중국 식당에서 밤새 일했다. 또 새벽4시가 되면 일어나 배낭을 메고 나가서 시장에 떨어진 음식들을 주워 집에서 씻어먹었다. 이렇게 악착같이 살았더니 주변에서 인정해줬고 많은 생활적인 도움도 받을 수 있게 됐다. 중국인 행세를 했기에 각기 성을 다르게 해서 살았다. 자신과 여동생은 각각 학교를 다녔고 남동생 또한 또 다른 기숙학교에 입학해 있었다.

2002년 6월 월드컵이 한창이던 당시 무장 경찰이 쳐들어 오게 된다. 어머니와 자신과 여동생이 잡혔고, 남동생이 기숙학교 있는 것이 알려지면 잡혀가서 죽게 되니까 남동생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들에게 정보를 주지 않았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들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데리고 있는 것을 보고 기구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래도 인간대접을 해주면서 북한으로 보냈다. 북송이 되면서 죽을 각오를 했었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죽지 않고 살 기회를 주셨다.

이후 극적인 과정을 통해 가족들이 또 한번의 탈북 기회를 맞게 됐다. 그 때 날짜가 12월27일인데 처음 탈북했던 날짜와 똑같은 날짜였고 장소 또한 똑같은 두만강이었다. 그 언 강을 뛰어드는데 수 만개의 바늘을 몸을 찌르는 고통이 몰려왔다.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들은 온 몸이 얼어붙은 상황에서 중국으로 건너갔고 무조건 베이징으로 향해 갔다. 1년 이상이 지난 2004년 6월 베이징 영사관으로 뛰어 들어갔고 그 길로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도 놀라운 일이 있었는데 영사관에 진입하는 것을 도와주는 브로커에게 갔더니 이미 17명이 자신들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 중 15명은 건장한 40-50대였고 2명은 국군포로인 80대 노부부였다. 사람들은 브로커에게 늙은 사람 때문에 자신들의 영사관 진입계획이 무산될 것을 원망하면서 팀을 두 개로 나누라고 요구했다. 결국 노부부와 함께 팀이 됐고, 40-50대의 건장한 팀은 다른 그룹이 됐다. 그런데 탈북 신학생은 중국어를 할 수 있었고 아침에 기회를 엿보던 중에 베이징 영사관에 출근하는 사람들에 섞여 들어가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가족들과 노부부도 그 뒤를 따랐고 아무 어려움 없이 영사관에 진입해서 한국정부와 연결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자신들이 용감하고 정의로워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이 가장 약한 자를 들어 쓰셨고 그것을 통해 오늘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를 주신 것임을 고백했다. 영사관에서 잠결에 예수님을 환상으로 만났다. 꿈에 예수님이 찾아오셨는데 너무도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빠라고 꿈에서 생각했다. 아빠하고 부르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꼭 안아주셨고 예수님인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할 것이라고 꿈에서 다짐하게 됐다.

그런 체험과 간절함 속에서 대한민국 도착했지만 나약한 인간의 다짐은 세상에 금세 찌들게 됐다.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타협하다보니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다짐은 뒤로 미뤄지고 대학교 곧장 들어가면서 자신의 동기들이 사는 대로 커리어를 쌓는 것에 더욱 집중하며 살게 됐다. 사회에서 잘나가는 것 같았지만 잘 나가면 잘 나갈수록 공허한 마음이 더했다. 교회는 주일만 나갔는데 현상유지하는 신앙은 점점 퇴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집안이 사기당해서 한국에서 벌었던 큰 돈을 한번에 다 잃어버리게 됐고 지금 당장 죽어도 아무것도 불만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절망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나는 왜 태어난 것인지 고민하게 됐다.

하나님은 늘 계획이 있으시고 적재적소에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었다. 14년 전에 하나님을 만나 거듭나게 했던 지도교수를 다시 만나게 됐다. 교수를 만나 펑펑 울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 교수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성경공부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제안이 싫지 않았다. 3개월 동안 교수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돼서 통일된 이후 북한 땅에 들어갈 때 예수님을 증거하고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다.

지금은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다. 신학교를 가서 북한 사역자가 되기로 결단을 한 시기에 여동생은 기도하면서 방언이 터진 이후 기도의 용사가 됐다. 지금도 하루 온 종일을 기도하고 말씀만 보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특히 어머니는 정말 악착같아서 도저히 복음을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니 또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됐다. 매일 가족 채팅방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아멘으로 끝나는 은혜의 장이 되고 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늘 뒤에서 기도하고 있으니 힘내라고 용기를 주고 있는데 천군만마와 같은 느낌이라고 그는 간증했다.

또 간증을 전한 한 탈북 신학생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탈북하다 다시 북한으로 잡혀간 이후 지냈던 교화소에서의 악몽과 같은 시간들을 증언했다. 지금도 고향을 생각하면 좋은 추억이 떠오르기 보다는 탈북하다 잡힌 이후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보내야 했던 나날들로 인해 괴로움이 몰려온다고 했다.

교화소에서는 24시간을 힘든 노동으로 보내야 했고 밥은 터무니 없이 부족해서 배가 너무 고파 소 똥에 있는 강냉이 알을 손을 비벼서 먹을 정도였고, 개구리, 뱀 등 먹을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먹어 배에 넣어야 했다. 결국 열병과 영양실조까지 걸리게 됐다. 그곳에서는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은 따로 관리하는데 당시 환기시키려고 창문이 열렸을 때 파란 하늘이 보였고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데 만일 계시면 제발 자신을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이후 극적인 과정을 통해 2011년에 또 한 번 탈북을 하게 됐다. 중국에 두고 왔던 딸을 만나기 위해 찾았을 때 이미 딸은 두 살 때 헤어진 터라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더 이상 함께 할 수 있는 상황도 안됐다. 살 소망도 없고 우울증까지 왔던 2013년도에 성경을 진지하게 접하게 됐다. 결국 복음을 받아들였고 죽어도 안가고 싶었던 북한 땅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가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하나님이 북한의 많은 사람에게 이 복음을 증거하라는 마음을 주셨고 이것을 받아들여 결국 신학대학교를 진학하게 됐다.

서울신학대학교 입학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여러 방법을 시도했지만 신앙기간이 짧아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세 번이나 찾아가서 간증을 했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합격을 할 수 있었다. 이 탈북 신학생은 북한 성도들이 북한 땅에 여전히 예수님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복음통일을 위해서 3만5천명의 탈북자들이 준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향이 함경북도 청진이라고 밝힌 한 탈북 신학생은 성경책을 가지고 있다는 오해를 받고 감옥에 갔던 어머니가 결국 그곳에서 돌아가신 이야기와 북한 체제에 회의를 느껴 탈북했다가 다시 북송됐던 과정에서 몸무게가 27kg까지 빠졌던 경험들을 나눴다.

자신이 어린 시절이었던 90년대 말 주변에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직접 봤고, 그의 가정 또한 먹을 것이 없어 매일 굶기를 반복해야 했다. 어머니가 한번은 중국에 있는 친척집에서 큰 도움을 받아 큰 돈을 가지고 왔는데 당국에 모두 뺏기면서 처음으로 북한정권에 대한 큰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이후 밀수를 통해 또 큰 돈을 벌게 됐는데 2002년 우연히 길 안내를 했던 어머니가 성경책을 유입시켰다는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된다.

면회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에 열심히 일을 해서 오로지 면회에 모든 돈을 써서 한 차례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면회를 위해 교도소 철문을 열고 나오는 어머니의 모습은 더 이상 이전에 봐왔던 총기 어린 눈을 가진 어머니가 아니었고 몸도 감옥 가기 전의 반의 반으로 줄어 있었다. 그 때 어머니가 면회 내내 탈북 신학생에게 ‘내가 있어야 할 나이인데’라며 걱정하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고 그렇게 아쉽게 헤어진 것이 어머니의 마지막이었다. 다음 면회를 위해 중국에서 돈을 벌어 4개월만에 두만강을 건너 어머니 면회를 갔지만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셨다는 말만 들을 뿐 시신 확인조차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이후 2000년에 탈북했지만 내몽골을 넘지 못하고 결국 다시 북송되면서 보위부 감옥에 갇히게 됐다. 감옥 3년 동안 음식을 잘 먹지 못했고, 명절 정도나 돼야 밥에 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 줬다. 평소에는 건더기가 하나도 없는 양배추국만 6개월을 먹었다. 체중이 27kg까지 내려갔고 다들 죽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계속 생존해 나갔다. 2009년 감옥에서 우여곡절 끝에 나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을 보고 유령이라고 했을 정도로 마을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국으로 오게 되는 것은 친구의 도움이 매우 컸다. 한국 땅을 밟게 됐을 때 한동안 몸을 꼬집으면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항상 확인했었다. 하나원 기독교행사에서 들었던 ‘너는 내 아들이라’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됐고,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여호수아 말씀에서 큰 은혜를 받았고 삶의 원동력이 됐다. 한국에 있으면서 북한을 한동안 잊고 살았지만 ‘너까지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을 주셔서 엄청나게 울며 회개했고 북한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리고 신학생으로 결단하기 전 세 번의 사고가 났는데 마지막에 난 사고는 갈비뼈 5개가 부러지고 그것이 폐를 찌르면서 거의 죽은 상태가 됐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목숨을 걸었던 가치들이 다 허무한 것이고 세상에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가치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북한선교를 위해 신학생이 되기로 결단해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준비된 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은 통일 또한 우리가 준비된 상태에 이뤄주실 것”이라면서 “우리가 말씀으로 채워질 때 통일을 이뤄주실 것이라고 믿으며, 특히 이 사명은 3만4천 명의 탈북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또 그는 “탈북 신학생들이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북한 2천5백명을 책임지도록 하겠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은 탈북 신학생들을 키우는 일에 함께 기도하고 협력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만갑 출연으로 이미 널리 알려있는 탈북 사역자인 배영호 전도사는 꽃제비에서 복음의 사역자가 되기 까지의 과정을 간증했다. 그는 토론토큰빛교회가 북한에 파송했던 사역자를 만나 복음을 받아들였었는데 당시 그 사역자는 과수원에 땅굴을 파 배 전도사를 숨겨주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번에 배 전도사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비전트립을 하면서 토론토에 방문해 현재 97세가 된 당시의 북한사역자를 극적으로 만났다.

마지막으로 간증을 전한 탈북 신학생은 평양 출신으로 북한에서는 상류계급이라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를 비롯한 친척들도 당 간부이거나 군 고위 관계자였고 아버지는 자녀들을 모아놓고 항상 북한 제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충성하고 지킬 것을 강조할 정도였다. 그런 세뇌 가운데 김 씨 일가는 반드시 지키고 충성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17세에 북한 군대 중에서도 매우 명예로운 곳에 선발이 됐다. 어릴 때 배운 바대로 모든 것을 충성하고 군대에 충실했는데 어느 날 부대에 화재가 발생했고 사람보다 김일성 부자 초상화가 더욱 중요하다고 배웠기에 각 방에 있는 초상화를 떼려다 두 번째 방에서 화재가 겉잡을 수 없이 커져 정신을 잃게 됐다. 동료의 구조로 병원에서 눈을 떴지만 이미 오른쪽 귀는 반이 잘려 나갔고 손과 얼굴 머리에 큰 화상을 입게 됐다.

이 탈북 신학생과 같은 사례는 북한에서도 선전용으로 이용하기 좋기에 처음에는 자신의 사례가 매우 자랑스럽게 소개되고 주변에서도 크게 칭송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내부에서의 대우는 전혀 달랐다. 당연히 써줘야 할 증명서를 북한 군대에서는 발급해주지 않았고 이를 항의하는 과정에서 불에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김 씨 부자의 초상화를 건졌던 일을 정작 군 내부에서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정서인 것을 알게 돼 큰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 이후에도 평생 북한 제도를 지키고 희생했던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우하는 것에 큰 회의를 느끼고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됐다.

아버지에게 대한민국으로 탈북하겠다는 마음을 비쳤을 때 30년간 군복무 하시던 아버지기에 반대할 것을 예상했지만 ‘너희라도 이 체제를 떠나가서 살라’고 오히려 독려해 주시는 것에 놀라게 됐다. 이 탈북 신학생의 경우 북한 군대의 정보들을 알고 있기에 탈북하다 체포되면 무조건 살아남을 수 없다. 때문에 그는 장마당에서 유사시에 죽기 위해 먹을 약을 구하고 탈북을 준비했다. 이를 알게 된 아버지는 만일 탈북 신학생이 잘못돼 처벌될 위기가 오면 자신이 대신 죽을 테니 절대 죽지 말고 끝까지 살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집을 떠나서 10미터 정도 갔을 때 펑펑 우는 아버지의 울음소리를 처음 듣게 됐다. 마음은 당장 돌아서서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지만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그대로 떠나 한국으로 탈북했다.

소망하던 한국 땅에 왔지만 화상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우울증으로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항상 장갑과 마스크 끼고 다녀야 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매우 따뜻한 사랑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궁금해졌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됐다. 하나님이 육신의 상처와 정신적 트라우마조차도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 속에서 들려왔다. 지금까지 강한 척하고 살아왔던 삶이었지만 주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게 됐고, 소중한 존재에서 보잘 것 없고 버림받은 사람으로 떨어졌다는 자괴감 속에 있던 그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말 귀한 존재인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북한의 영혼들을 위해 자신을 불러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고 북한선교의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현재 침신대에서 아내와 함께 공부하고 있는 그는 자연농업을 배워 북한 고향 땅에 주님의 선교부지를 조성하는 것과 탈북민 2세를 섬기고 돌보는 사역을 소망하고 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