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Unsplash/Oskar Kadaksoo
2년 동안 누적된 코로나19의 여파로 회복되지 못한 교회가 늘고 있는 가운데, ‘죽어가는 교회의 5가지 확실한 징후’라는 칼럼이 미국 크리스천헤드라인스에 게재됐다.

이 글을 쓴 셰인 아이들먼(Shane Idleman)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웨스트사이드 크리스천 펠로십’과 ‘WCF 라디오 네트워크’의 설립자이자 담임 목사이다.

다음은 칼럼의 주 내용이다.

1. 기도는 뒷전인가 우선순위에 있는가?

기도와 예배의 밤은 종종 빙고와 기금 모금 행사로 대체된다. 우리는 서둘러 설교를 마치고 예배를 드린 뒤, 가장 가까운 식당으로 향한다. 이것은 죽어가는 교회의 확실한 징후이다. 교회가 너무 바빠서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분주하다. “신앙이 기도하기를 그치면, 그 신앙도 살기를 멈춘다” (E.M. 바운즈). 우리는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결코 용납해선 안 된다. “우리가 계속 성령의 능력 안에 거하려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R.A. 토리) 영적인 삶과 기도는 함께 간다. 당신은 하나만 가질 수는 없다.

2. 교회가 감정주의 또는 형식주의로 유명한가?

불행하게도 기독교인들은 부흥과 성령에 관한 한, 종종 두 가지 극단 중 하나를 받아들인다. 한쪽 극단에는 순수한 감정주의와 히스테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상한 느낌은 신이다”가 그들의 좌우명이다. 모든 이상한 행동이 용서받는다. 다른 극단은 공동묘지와 비슷하다. 살아있고 활기찬 영적인 삶이 일어나지 않는다. 교회는 죽고, 차갑고, 생명이 없다. 부흥에 대한 이야기는 무시되거나 조롱당한다. 두 극단 모두 죽어가는 교회의 특징이다.

3. 죄가 용서되고 거룩이 축소되는가?

한마디로 주님을 경외함이 사라졌는가? 얼마 전 우리 지역의 어느 큰 교회 목사는 잊을 수 없는 발언을 했다. “우리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말을 삼가야 한다. 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 문장을 쓰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와 명철의 시작이라는 말은 성경 곳곳에서 자주 언급된다.(시 147:11)

(동성 결혼의 경우처럼) 목회자와 지도자들이 하나님께서 진리가 삶에 유의미하고 존속하도록 진리를 바꿀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고 믿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다. 그분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크고 담대하지만, 은혜가 진리를 대신하진 않는다. 은혜는 진리를 강하게 한다.

경외는 사람이 회개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태복음 10:28) 예수님은 천국의 영광보다 지옥의 무서움을 더 많이 말씀하셨다. “그것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나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며, 나의 심판자이시기에 나는 그분을 경외한다(A.W. 토저).”

교회(그리고 미국)의 현재 상태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의 부재가 교회를 영적인 죽음 상태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한다.(계 3:15-17)

4. 사랑이 관념인가 현실인가?

진정한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기 위해 하는 “선택”이자 약속이다. 그것은 “감정”이 아니다.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면 우리의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의 개념이 하나님과 다를 때, 연합은 고통을 받게 된다. 다른 사람을 보호하고 지키는 사랑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라.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험담하거나 비하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자신을 멈추고, 만일 누군가가 당신을 그런 방향으로 끌고 간다면 대화를 전환하라.

성경은 분명하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 13:3). 성경 66권을 모두 잘 읽고, 화이트 필드, 무디, 스펄전 못지않게 설교하고, 신학 박사학위도 있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사랑, 용서, 화합을 최우선 순위로 삼으라. 그들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5.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 모든 것”인 교회는 동전의 다른 면을 잊는다. 심판이 언급되지 않고, 회개를 구하지 않으며, 죄를 쉽게 봐준다. 그들은 마음을 통회 하기보다 교회를 짓고, 성경적으로 올바르기보다 정치적으로 분명해야 한다. 단호하고 유죄 판결을 내리기보다는 애지중지하고 위안만을 주길 원한다. 이는 회개에 대한 예수님의 심각한 외침을 전혀 닮지 않은 십자가 없는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속게 만든다. 기독교는 죄의 결과에 비추어 볼 때에만 이해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은 나쁜 소식을 배경으로 해야만 알 수 있다. 성도들이 음식을 먹어야 할 때가 있고, 죄인들이 경고를 받아야 할 때가 있다(C.H. 스펄전).

목회자들은 균형을 찾아야 한다. 기쁜 진리뿐만 아니라 힘든 진리를 전파해야 한다. 십자가를 전한 다음 새 생명을 전하라. 지옥을 전한 다음 천국을 전하라. 죄를 전한 다음 은혜를 전하라. 진노를 전한 다음 사랑을 전하라. 심판을 전한 다음 자비를 전하라. 복종을 전한 다음 용서를 전하라.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설교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정의로운 분임을 잊지 말라. 우리가 듣기 힘든 것들이 포함된 모든 진리를 나누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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