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대화를 하다가 제가 "하나님께서는 공정하시므로 신자들을 동일하게 사랑함과 동시에 자신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도 안타까운 마음을 우리 같은 신자에게처럼 동일하게 사랑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는 인간과 비교해서 하나님의 우월성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형님이 "아니야.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약자들을 더 사랑하신다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하나님은 차별적인 사랑을 하시는 분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의 몇몇 글에서 저 역시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공정은 이래야한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밖에 없지만 제게 당시에 '공정'의 개념은 곧 '동일한 사랑'의 개념이었고, '편애'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박하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스마엘과 이삭에서 하나님의 주권하심으로 선택하여 구별하셨으며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도 야곱이 딱히 에서보다 더 '사랑받을 만한' 이유가 없음에도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음을 나중에 알게 되면서 제 생각이 틀린 것이구나..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그네와 고아, 과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을 엄청 강조하시고, 예수님께서도 가장 작은이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하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를 더 사랑하시는구나 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다만 이게 제 기존의 '편애하지 말아야한다' 라는 생각과 충돌해서 아직 완전히 정리는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인간사에서 사람끼리의 편애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긴 합니다. 분명 내 가족이나 내 친구를 나는 타인보다 더 사랑하니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받아들이지만, 리브가의 야곱에 대한 편애가 에서의 반감을 만들었고 이것이 결국 리브가의 잘못된 믿음으로 이삭을 속여 야곱에게 축복을 주게 한 것으로 에서의 분노가 폭발하여 골육상잔의 비극을 일으킬 뻔한 것을 보면 (제가 봤던 성경 밑의 주석에 나왔습니다.) 자식들에 대한 사랑에서도 특정 자식만을 편애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고는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동일하게 모두를 사랑하시는가 아니면 불신자와 약자를 더 편애하시는가 동일하게 사랑한다면 혹은 편애한다면 어느 쪽의 사랑이 좀 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우월성을 드러내는지, 인간 사이에서 사랑을 할 때도 편애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 정당화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이 주제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정리되지 못한 교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죄송하지만 목사님들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 큽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기독교 신앙을 기본적으로 도덕적 종교적 차원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단순히 착하게 살고 구제와 선행에 열심을 내는 것으로 한정하는 신자들이 꽤 됩니다. 누구라도 조금이라도 선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하나님을 거역한 죄라고 비판합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신자가 자칫 잘못하면, 대부분이 기독교적 관습과 의식을 잘못한 것임에도, 손가락질하기 바쁩니다.

신앙이 결과적으로는 도덕적 종교적 양상을 띨 수밖에 없지만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닙니다. 현실 삶에서 하나님과 실제로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과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깨달아서 그대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의로움도 도덕적 종교적 차원으로만 판단하려 듭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가 되었든 인간이 보기에도 반드시 선해야 하고 사랑이 많아야 한다고만 여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사실은 종교생활임에도, 열심을 내고 하나님을 더 뜨겁게 섬기는 자들에겐 복을 더 내려주셔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상기 의문은 이 잘못된 두 가지 인식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가난하고 비참한 자들을 더 사랑하고 더 많은 복을 주셔야 하고 그런 자들 위주로 택하여 구원을 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은 선하시고 공평하고 사랑이 많은 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행하신 사역의 모습을 보면 그것이 진리임이 입증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사역을 크게 오해했습니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당시로선 재산 권력 지성 모두 최상위에 속한 자들입니다. 사역 초기에는 주님은 바리새인 서기관들과도 교제했는데 그들은 부자였습니다. 나아가 베드로의 장모는 자기 집을 주님이 사역하는 본부로 제공할 만큼 부자였고 세리인 마태도 당연히 부자였습니다. 주님은 로마의 백부장, 유대인 회당장 등에게도 큰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주님이 이방인, 세리, 불구자, 불치병자, 귀신들린 자, 창녀 등을 자주 만나 위로 치유해준 정확한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당시 유대교 교리와 관습에 따라서 아예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았다고 정죄되어서 유대사회의 일원이 절대 될 수 없었던 자들입니다. 주님이 사랑을 많이 베푸신 과부와 고아는 당시의 사회의 구조적 환경 때문에 가난을 스스로는 극복할 수 없는 자의 대표였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따르면 유대사회가 책임지고 구제를 해주어야만 하는데도 유대인들은 그들을 외면하여 비천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고 사랑한 것은 세상의 도덕과 종교로 사람의 구원을 절대로 나누고 차별해선 안 된다는 진리를 보여주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데 나라, 인종, 문화, 교육, 종교, 성별, 건강, 외모, 재산, 권력 등등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아무런 장애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안타까이 여기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세상사람 앞에 분명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현실 상황이 비참하니까 더 사랑하신다는 뜻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자 제자인 가룟 유다가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불평했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라고 답하면서 오히려 마리아는 당신의 장례를 기념했다고 칭찬해주었습니다. 주님이 가난을 없애려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4,5)

물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똑같이 불쌍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현실 상황이 비참해서가 아니라 모든 자연인이 사탄에 미혹되어서 죄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찾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자들마저 종교라는 멍에로 묶어서 사람들을 차별했고 인간인 주제에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해 같은 인간을 정죄 심판했습니다.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을 거역 대적함으로써 온갖 불법과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고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로마서1-3장)

요컨대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처한 상황은 어폐가 있는 표현이지만 하나님 쪽에서도 누구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거기다 인간들 스스로는 그 죄를 씻을 길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으로 구원해줄 자를 택하시는 것입니다. 그 택함의 기준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사회적 약함과 강함의 구분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심판 받아 마땅한데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를 당신만의 기준으로 택합니다.

물론 그 기준이 너무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것 아닌지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 택함의 구체적인 기준은 우리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에 드러난 그 분의 택하심을 면밀히 살펴보면 두 가지 절대적 원칙은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의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를 설립하는 데에 꼭 필요하고 그 일에 충성 헌신할 수 있는 자를 택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분이 태어나기 전부터 택했음에도 기계적 강제적으로 당신의 일을 시키지 않으시고 자유의지를 온전히 허락한다는 것입니다. 택함 받은 사람은 자기 뜻과 계획대로 인생을 설계 진행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광대하고 완벽한 계획대로 그분의 택하신 목적을 잘 수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택하심과 택함 받은 신자의 인생길이 전혀 서로 모순 상충되는 점이 없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성삼위 하나님은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실현하려고 창조하시고 그렇게 되어가도록 주관 통치하십니다. 당연히 그 일을 감당할 주인공들을 택하시고 그 인생을 보호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판단하는 도덕적 종교적 관점과 기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유일한 분입니다. 따라서 오직 당신의 뜻이자 계획이 바로 당신의 의로움이자 공평입니다. 엄밀히 말해 그분의 구원으로의 택하심에 대한 인간의 조건과 자격을 따지는 것 자체가 인간인 신자로서 행해선 안 되는 불경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더 착한 자를, 더 연약한 자를 택할 것이고 그런 자에게 더 은혜를 많이 베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기대일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모습을 일부 드러내긴 해도 여전히 그런 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택함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최고의 대적이자 원수인 바울을 택해서 당신의 열렬한 옹호자 전파자로 세우시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도덕적 종교적 잣대를 하나님에게마저 갖다 대는 것은 사실은 자신은 남보다 더 착하고 더 경건하니까 자기는 더 많은 복이나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인간적 바람이, 이는 아주 큰 교만이자 죄임, 작동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악인들에게 하나님처럼 회개할 것을 기다려주지 않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천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분노와 증오마저 개입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택함이나, 리브가의 편애도 단순히 표면적으로 판단할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상기에 말씀드린 두 가지 원칙이 적용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저의 ‘야곱을 바로 알자’ 강해에서 자세히 밝혀 놓았고 E-book을 무료로 받아볼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인간사회에서 편애는 당연히 무조건 잘못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선택에는 다시 말하지만 편애는 없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기준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작은이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마25:40)라고 말씀하신 의미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종말의 심판에 대해 가르치는 비유에 나오는 말씀이므로 그 비유 전체의 주제와 의미에 비춰서 해석해야 합니다.(마25:31-46) 주님이 심판 때에 구원할 양은 오른 편에, 심판할 염소는 왼편에 두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 양과 염소로 나누는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충성했느냐 여부였습니다.(35,36절)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양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37-39절) 그러자 주님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40절) 그와 정반대로 염소는 하나님을 위해서 아주 많은 일을 했다고 항변하자(44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 했기에 당신께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45절)

결국 무슨 뜻입니까? 위에서 설명 드린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하나님을 도덕적 종교적으로 섬기는 데는 아주 열심이었으나 자기들이 정한 기준으로 세리, 이방인, 불구자, 불치병자, 귀신들린 자들을 자기들이 하나님의 구원 밖으로 내몰고 천대했던 자가 염소입니다. 인용하신 말씀이 단순히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선대하고 구제해주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면에 양은 도덕적 종교적으로는 일부 하자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세상적으로 전혀 별 볼일 없는 이웃 한 명이라도 진정으로 사랑했던 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은 도덕적 선과 종교적 경건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예수 십자가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는 물론 개인의 인생도 오직 예수 십자가로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분의 택하심의 기준도 오직 그것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평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실현됩니다. 다른 방안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지금 나의 신자 됨의 의미, 과연 내가 하나님의 공평하고 의로운 택함 가운데 있는지 재 점검해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현재 현실적으로 연약한 모습에 처해 있지만 기도 많이 하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면 그분의 복을 많이 받으리라 쉽게 기대해선 안 됩니다. 반대로 내 현실적 형통함이 나의 도덕적 종교적 의와 경건을 보시고 그분이 베푸신 복이라고 자만해서도 결코 안 된다는 뜻입니다.

2021/8/25/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 종합일간지 '기독일보 구독신청 바로가기'

#박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