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진만은 본보 4월 26일과 27일 연재된 기고문에서 1899년 발행된 『The Korean Repository』 발굴 사실과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도 여행이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첫 번째 제주도 방문임을 밝힌 바 있다. 오늘 마지막으로 연재하는 글 앞부분에서 리진만은 지금까지 피터스의 제주도 방문기 기술에 관한 오류에 대해 지적한다. 이어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The Korean Repository』에 관한 새로운 사실과 피터스 선교사가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에 끼친 공로와 헌신을 기억하고자 하는 일에 각계의 관심과 협조를 촉구한다. <편집자 주>

Ⅴ. 피터스의 켈파트 섬 방문기(A Visit To Quelpart) 기술에 관한 오류의 문제점

5-1. 박용규는 위 자료 3-2. 132쪽에 하단 글에서 “이것은 1898년 하반기로 예견되는 대영성서공회 책임자였던 켄뮤어(Kenmure)와 가졌던 자신의 제주도 선교여행을 글로 승화시킨 것이다”라고 했고, 133쪽 중간에는 “그의 문학적인 재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제주도 기행문 서두에 그대로 나타난다”라고 기술했다. 그렇지만 피터스와 켄뮤어의 제주도 여행을 1898년으로 본 것은 1899년의 오류이며, 또한 그의 각주 63)은 Alexander A. Pieters, “Early Experiences of Korea,” KMF(August 1930), 176.가 아니라 The Korean Repository, 1899 또는 The Korea Review(May & June 1905)로 수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가 소개한 제주도 기행문 서두는 133쪽에 인용해 소개한 내용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켄뮤어와 나는 켈파트(제주섬)를 향해 한국 증기선 창녕호(Chang Riong)를 타고 2월 18일 제물포를 떠났다”9).

위 자료 3-3. 211쪽 하단부의 각주 25) 역시 4-1과 마찬가지로 피터스의 제주도 방문기가 게재된 잡지는 『The Korea Mission Field』가 아니라 『리포지터리』 또는 『코리아 리뷰』로, 제주도 방문 시기는 1898년이 아니라 1899년으로 수정됨이 마땅하다. 이와 함께 212쪽에 기술한 “아마도 당시 제주도가 전라도 행정구역 관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전라도와 충청도를 담당했던 권서인으로 제주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라는 추측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1898년 대영성서공회 부총무로 임명받은 피터스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담당한 것이 아니라 대영성서공회의 권서 사업(Field Work)을 맡아 ‘매서전도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1899년 2월 말에서 3월 하순까지 4주간 제주 방문을 마친 이후에도 금강산을 돌아보고 원산을 거쳐, 압록강을 넘어 만주 지방에 있는 한국 이주민들을 방문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10).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 섬 방문기’(A Visit To Quelpart)가 실린 『코리안 리포지터리』 1899년 4월 13일 자. ‘제주 섬 방문기’는 1899년 4월 13일, 20일, 27일 3회 연재됐다.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 섬 방문기’(A Visit To Quelpart)가 실린 『코리안 리포지터리』 1899년 4월 13일 자. ‘제주 섬 방문기’는 1899년 4월 13일, 20일, 27일 3회 연재됐다.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영자는 위 자료 3-5. 2013년 제주 우당도서관에서 발행한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 견문록』을 편역 후 2014년에는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 항해·탐사기(1787~1936)』, 2015년에는 『구한말 불어·영어 문헌 속 제주도(1893~1913)』를 출간하는 등 매우 귀중한 제주도 관련 옛 자료들을 소개했다. 『코리아 리뷰』에 게재된 피터스의 “켈파트섬 방문” 편역 글 앞의 해제에서 고영자는 몇 가지 흥미로운 기술을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시기 미국성서공회 한국 책임자로 내한한 그는 유대계로서 히브리어에 능통했고…”라고 설명했는데 1895년 피터스가 내한할 당시 그는 미국성서공회 책임자가 아니라 일본에서 활동하던 “루미스 목사(Rev. Loomis)의 권고로 미국성서공회 매서인(권서)으로 임명받아 한국에 오게 되었다”11).

이와 함께 고영자는 “그는 선교사 유젠 벨(Eugene Bell)과 함께 1897년 2월 말에 제주도를 방문, 약 1주일을 섬에서 보냈다”라고 했는데, 필자가 발굴해 가지고 있는 피터스의 제주 방문기 영인본과 『리포지터리』의 내용을 보면 피터스의 제주도 여행 시기는 1899년 2월 하순에서 3월 하순까지 4주간이었다.

피터스와 함께 제주도를 다녀온 대영성서공회 총무 켄뮤어(A. Kenmure)12)는 1899년 3월 30일 『The Bible Society Reporter』에 ‘Pioneering in Korea’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선교소식을 보냈다.

“피터스와 나는 2월 18일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조그마한 섬 켈파트(제주도)를 향해 이곳(서울)을 출발해 3월 25일 돌아왔으며, 섬에서는 4주간을 보냈다. …우리는 돌아오며 그 섬에 많지는 않지만 60~70권의 성경책을 두고 왔기에,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치유되고 빛을 가져다줄 수 있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코리아 리뷰』 1905년 5월호 표지.
『코리아 리뷰』 1905년 5월호 표지. ©대한성서공회 성서학도서관

『한국기독교와 역사』에 실린 위 자료 3-6. 186쪽에서 박정환은 “1899년 피터스는 켄뮤어와 함께 제주도를 다녀온 후, 그의 선교여행을 글로 남겼다”라고 기술했다. 이에 관한 각주 11)의 인용은 위의 자료 3-2와 3-3과 마찬가지로 『The Korea Mission Field』가 아니라 『리포지터리』 또는 『코리아 리뷰』로 수정되어야 한다. 박용규와 박정환이 인용 소개한 “Early Experience of Korea”는 피터스가 1895년 처음 한국 도착부터 1930년까지 그의 한국 입국 동기뿐만 아니라 초기 매서인 활동과 선교사 사역을 회고록 형식으로 1930년에 정리한 것이다.

1930년 8월 KMF 176쪽에 소개된 피터스의 제주 방문 내용은 피터스의 한국 여행 경험 중 일부분일 뿐이며, 제주도 방문기는 “A Visit to Quelpart”라는 제목으로 1899년 4월 13일 『리포지터리』에 처음 소개되었다. 이어서 1905년에는 같은 제목으로 1899년 4월 20일과 27일 『리포지터리』에 연재되었던 피터스의 제주도 여행기 후반부를 『코리아 리뷰』 편집부에서 재수록한 것이다.

Ⅵ. 맺음말

늦은 감이 있지만 최근 피터스 선교사를 잊지 않겠다는 움직임을 한국 기독교계에서 보였다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박준서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피터스 목사는 한국인들에게 구약성경을 한글로 읽을 수 있게 해 준 공로자요, 우리 민족과 한국 교회의 은인”이다.

그의 헌신과 공헌을 기억하고 널리 알리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며, 이왕이면 그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더 많이 발굴하여 수집하고 그의 헌신에 감사하는 데 누를 끼치는 일은 없어야겠다. 필자는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우선 지금까지 발표된 피터스 선교사 관련 자료들을 분석해 보며 몇 가지 오류를 발견해 정리해 보았다.

여기에는 아펜젤러 순행일기 자료를 유니언신학대학(UTS, Burke Library)에서 발굴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피터스의 제주 섬 방문 일기’를 입수하게 되어 지금까지 전해오던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 섬 방문기’를 보완해 완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연세대학교 도서관에서 2002년 입수한 뒤 19년간 잠들어 있던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를 발굴할 수 있어, 그간 갖고 있던 피터스 선교사의 국내 사역과 여행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지금까지 피터스 관련 자료에서 발견되는 오류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제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코리아 리뷰』 5월호에는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 섬 방문기’가 후편만 실렸다.
『코리아 리뷰』 5월호에는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 섬 방문기’가 후편만 실렸다. ©대한성서공회 성서학도서관

『리포지터리』가 어떻게 종간되었는가에 대한 명확한 내용이 『리포지터리』 1899년 6월 1일 종간호 4쪽에 “FINIS”라고 조그맣게 나와 있다. 즉 『리포지터리』는 6월 둘째 주부터 독립신문(The Independent)에 경영권뿐만 아니라 기존 고객까지 독립신문으로 넘긴다는 것이고, 편집장은 영국 선교사 엠벌리(W. H. Emberly)가 맡게 된다고 고지했다.
이어서 6쪽에는 “BUSINESS NOTICE”에 새로운 편집장 겸 사장인 엠벌리 사장 명의로 모든 독립신문의 사업권은 엠벌리 자신에게 있음을 공지하고 있다. 계속해서 7쪽에는 당시 『리포지터리』의 사업책임자였던 코브(George C. Cobb) 명의로 “NOTICE”13)를 게재해 서재필(Philip Jaisohn)과 삼문출판사와의 계약은 6월 1일부로 폐지되며, 마찬가지로 삼문출판사는 독립신문 인쇄소와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공지한 내용이 있어 당시 『리포지터리』와 독립신문의 관계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좋은 사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새로 발견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 섬 방문기’ 전체 분량이 실린 최초의 잡지는 『The Korean Repository』이며 “A Visit To Quelpart”란 제목으로 『The Korean Repository』 Vol.1, No.10,11,12, 1899년 4월 13일 자, 20일 자, 27일 자에 3회 연재되었다.

지금까지 『The Korean Repository』가 1898년 종간되어 그 이후 발행되지 않았다는 기존의 연구 결과는 1899년 2월 9일 1호를 발행한 이래 1899년 6월 1일까지 주간으로 총 17회 더 발행된 것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월간으로 발행된 『리포지터리』 원본은 영인본 Ⅰ~Ⅴ로 엮어 있고, 이번에 발굴된 주간 형식의 자료는 Vol.Ⅰ. No. 1~17까지로 주간 총 17회 중 15회 자료를 확인하였다. 미확인 된 결본 No.2(2월 16일 자)와 No.16(5월 25일 자) 원본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당시 출판사 사정으로 발행을 못 했는지 아니면 이 자료를 발행했으나 지금까지 전해 오는 과정에서 분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할 과제로 남긴다. 『리포지터리』는 월간 때는 평균 40여 페이지였고, 1899년 주간으로 발행하면서는 No.8까지는 4페이지, No.9부터 종간까지는 8페이지 분량으로 발행되다가 독립신문으로 합병되며 종간되었다.

둘째,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 방문 시기에 대해 여러 연구자들이 서로 다른 시기를 기술하고 있다. 피터스의 제주 섬 방문 기간은 1899년 2월 18일 토요일 제물포를 출발해 3월 25일 토요일 서울로 돌아왔고, 그들이 제주도에 체류한 기간은 켄뮤어의 신뢰할만한 보고에 나와 있듯이 4주간이다. ‘제주 섬 방문기’는 피터스가 켄뮤어와 함께 제주도를 처음 방문한 후 남긴 ‘정탐여행기’라 할 수 있다. 피터스의 필사본 기록 자료는 유니언신학대학교 버크도서관 아카이브(UTS, Burke Library)에 보존되어 있다.

셋째, 피터스가 처음 미국성서공회와 대영성서공회 매서인으로 근무를 마친 후 신학수업을 받기 위해 한국을 떠난 시기와 신학교 수업 기간에 대해서도 여러 추측과 주장이 있다. 여러 신뢰할만한 자료14)에서 피터스의 맥코믹신학교 졸업 년도가 1902년으로 나타나고 ‘New Albany Presbytery’에서 안수를 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가 한국에서 출발한 시기는 1899년 9월에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으로 갔으며, 맥코믹신학교에서 수학 기간은 1899년부터 1902년까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넷째, 현재까지 밝혀진 기록에는 선교·전교를 목적으로 제주도를 방문한 외국인은 피터스와 켄뮤어가 1899년 2월 말 제주에 도착한 해에 기록한 ‘제주 섬 방문기’가 제일 앞선다. 그러나 카톨릭교회 역사에는 제주도에 최초의 신부를 임명하기 이전에도 이미 카톨릭 신자들이 있었다고 하고, 뮈텔(閔德孝) 주교의 보고서에 의하면 “1866년 전에 몇몇의 신자들이 이 섬에 살았다. 그러나 페네(M. Peynet) 신부가 1899년 5월에 처음으로 이 섬에 선교사로 임명되어 갔을 때는 그들에 대한 흔적이나 자취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이 사라졌다”15)라는 기록도 있다.

1886년 프랑스와의 강화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카톨릭 신자들의 자유가 육지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1899년 5월 제주도 주재 신부 2명을 임명해 파견하기 이전에도 프랑스 신부들의 제주도 정탐여행 가능성 여지는 크다고 보인다.

따라서 필자는 피터스의 제주 방문에 관해 몇 분의 연구자가 “선교를 목적으로 제주도에 최초로 발을 디딘 최초의 서양인은 알렉산더 피터스와 켄뮤어로 보인다”라는 기술에 대해, 피터스와 켄뮤어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라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최초의 서양인’이라고 기술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를 추후 연구과제로 남기며, 새롭게 발굴된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의 연구가 활성화되어 빛을 발하기를 고대한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리포지터리』의 부분적인 자료만을 가지고는 보고(寶庫)에 쌓여있는 보석들을 가공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리포지터리』가 영문으로 출판되었고 고서라 쉽게 활용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기에 우선 이 자료들을 원문에 충실하도록 번역하여 데이터베이스화해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필자가 발굴한 1899년 『리포지터리』의 사례에서 보듯이, 이러한 귀중한 자료가 연세대중앙도서관에 20여 년 전 입수되어 있었지만 도서관 검색 시스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분류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희귀 자료들은 타 대학이나 다른 기관과의 공유 서비스를 제공해 연구자들이 쉽게 찾을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서강대 석좌교수이신 앤토니(Brother Anthony, 한국명 안선재) 교수께서 『리포지터리』 1~5권뿐만 아니라 『코리아 리뷰』 1~6권 전체를 오래전 PDF 작업을 마쳐 서강대 전자도서관에 공개해 연구자들이 쉽게 1차 자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라기는 『리포지터리』 및 피터스 선교사에 대하여 연구 시 유관 기관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의 협력, 협업이 절실함을 강조하고 싶다. <끝>

[미주]
9) ‘A Visit To Quelpart’, 『The Korean Repository』 Vol.1, No.10., Thursday, April 13, 1899, p.1.

10) ‘New Ground’, 『British & Foreign Bible Society, AR, 1900』, p.277.

11) 대한성서공회사 Ⅱ. 230쪽.

12) 켄뮤어(Alexander Kenmure, 慶有顯), ‘Pioneering in Korea’, 『The Bible Society Reporter, July, 1899』, p.168.

13) 연구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NOTICE” 원문을 소개한다. “From June 1st the contract formerly existing between Philip Jaisohn and Trilingual Press is abrogated, and from this time on the Trilingual Press has no connection whatever with the Independent Printing Office. George C. Cobb, Manager”

14) Robert Culver McCaughey (1940), ‘A Survey of the Literary Output of McCormick Alumni in Chosen’, B.D. thesis,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Chicago, 1940, 42-3.

리진만 선교사

15) 김옥희 (1987), ‘제주도 천주교의 수용 전개과정’,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탐라문화』 146쪽.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

※외부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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