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균 목사
홍석균 목사

본문 : 사도행전 5장 12-26절

성경은 드라마틱한 반전의 서사시이다. 하나님이 직접 기획하시고 연출하시고 감독하시기 때문에 더욱 박진감이 넘친다. 특히 사도행전은 예상치 못한 반전을 거듭하는 역사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사도행전의 내용을 보면 불의가 기세등등하여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이 즉시 개입하셔서 정의가 승리하게 하신다. 그러다 또다시 세상 권세가 교회를 무력화시킨다. 하지만 절묘한 순간에 하나님의 큰 팔로 당신의 백성을 다시 구해 내신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의 기적이 백성 가운데 일어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솔로몬 행각’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솔로몬 행각은 집회장소로 쓰이는 곳인데, 사도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 사람들은 점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병든 사람들은 베드로의 그림자만 덮여도 치유된다고 믿었고, 실제로 예루살렘에 근방에 있는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이 나음을 받았다.(16절) 그러자 종교지도자들이 시기했다. 그들은 종교의 힘으로 사리사욕을 취했는데, 사도들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자신들의 입지가 사라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각적이고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는데, 사도들을 옥에 가두어 버린 것이었다.(17-18절) 언제나 복음의 역사에 대한 반응은 항상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환대인데,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면 철저하게 죄를 회개하고 예수만이 참 구주요, 생명이라고 받아들인다. 둘째는 거절인데, 반대로 죄를 지적하면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늘 종교지도자들은 가득 찬 시기심으로 사도들을 적극적으로 대적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성은 스스로 ‘무생명’과 ‘무능력’을 증명했다.

몇 년 전에 한 청년이 신천지에 빠졌다고 해서 구출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소위 ‘복음방’에 들어가서 신천지에게 신앙생활 잘하던 우리 청년을 왜 데리고 갔냐고 따졌다. 그러자 신천지가 오히려 그 청년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네가 우리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내가 해준 게 얼마나 되는데, 내 눈을 똑 바로 보라며 겁박하는 것이다. 이 목사를 따라가겠는지 여기 남겠는지 결정하라는 것이다. 네 결정에 따라서 친구의 인연을 끊을 수 있다고 쏘아붙이는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그 청년을 찾아오긴 했지만 그 신천지의 살벌한 눈빛은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에는 항상 사단의 역사도 있다. 사단은 시기와 분열을 일삼는다. 거짓과 술수로 공격한다. 오늘날 교회를 깨뜨리는 자들의 특징이 공격성이다. 항상 교회를 향해 비판하고 비방한다. 그러나 믿음의 역사는 자기 맡은 사명에만 충실한다. 타인을 공격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것이 진짜라는 것만 증명한다. 분별력을 가지고 보면 금방 성령의 역사와 악한 영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에 위협과 공격성을 뛰며 접근해 올 때 의연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법과 불의가 갖은 위협과 방해를 가해 온다 할지라도 복음은 더욱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19절)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21절) 이 말씀의 뜻은 사람은 가둘지 몰라도 복음은 가둘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착한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이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시편 23편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하시고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하나님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복음을 위해 사는 자들을 절대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실 것이다.

4세기 때에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교리논쟁이 있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서 아리우스는 하나님과 예수는 동일 본체가 아니라고 했고,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과 예수는 동일 본체라고 주장했다. 이때 주목할 것은 아타나시우스는 수도사에 불과했다. 쉽게 말하면 오늘날로 평범한 집사였다. 반면에 아리우스는 당시 세계가 인정하는 신학학자였다. 둘은 경쟁구도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불가능할 것 같은데 니케아회의(325년)에서 놀랍게도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이 채택되었고,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다수가 아리우스를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지지를 받은 아타나시우스의 교리가 결국 이기게 되었다. 짧은 시간으로 볼 때, 진리가 지는 것 같은 순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반드시 이긴다. 사람은 가둘 수 있어도 진리는 가둘 수 없는 것이 복음이다. 오늘도 복음의 여정에 때로는 핍박과 공격이 있어도 주님 붙들고 가므로 최후 승리를 얻길 축복한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 종합일간지 '기독일보 구독신청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