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오늘 부족한 사람이 평택에 있는 작은 교회인 송화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그리고 한종희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제가 개척해서 29년 동안 목회하던 강변교회에서 2008년 1월 13일 은퇴한 후 지난 7년 7개월 동한 주일마다 전국의 작은 교회들 한 두 곳을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오늘 여기 송화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난 7년 7개월 동안 한 주일만 설교를 하지 않았고 매 주일 국내외의 교회들 한 두 곳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여기 와서 무슨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한종희 목사님에게 물었더니 “신앙생활의 기초”에 대한 설교를 하면 좋겠다고 해서 오늘 “신앙생활의 기초”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작년과 금년에 이와 비슷한 제목으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하는 교회가 제일 많았습니다.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부탁을 자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11살 때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왔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들을 북한 평양에 두고 1948년 8월 캄캄한 밤에 38선을 넘어서 남한으로 달려왔습니다. 같이 오던 어른들은 모두 인민군에게 붙잡혔지만 저는 혼자서 남쪽을 향해서 달리고 달려서 남한으로 왔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11살 때 38선을 넘은 사건은 저의 운명을 바꾸어놓았습니다. 평생 고아와 나그네로 외롭게 살았지만 하나님만을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종으로 평생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신앙생활의 기초” 다섯 가지에 대한 말씀을 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신앙생활의 기초”는 “회개”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처음에 전파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도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7,48).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하시면서 회개하라는 말씀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5).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계3:19).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제일 먼저 전파한 말씀도 “회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2:38).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선교지에서 전파하고 증거한 것도 회개와 믿음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18,21).

“회개”는 “신앙생활”의 입문이고 과정이고 출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는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고 자기를 부인하고 항복하는 것인데 “회개” 없는 믿음은 가짜 믿음입니다. “회개”는 한 번 크게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데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울면서 돌이키고 또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을 “참회”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회개”와 “참회”를 계속해서 가장 많이 가장 처절하게 한 사람이 다윗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밤 낮 울면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56:8).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윗의 뒤를 이어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평생토록 계속해서 드렸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귀중한 종으로 사용하셨고 순교의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의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고백을 본받아서 성 어거스틴과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께서도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귀한 종들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의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고백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길선주 목사).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이기풍 목사). “이 놈이 주님이 차지하여야 할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습니다”(주기철 목사). “나는 어릴 때부터 범죄를 계속한 불의하고도 불충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큰 죄인임을 깨닫고 두렵게 떨며 울었습니다”(손양원 목사).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티끌 같은 미말의 존재입니다”(이성봉 목사). “나는 고멜과 같은 음녀입니다”(김치선 목사). “나는 신사 참배하는 죄인입니다”(한경직 목사).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박윤선 목사).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회개”하고 “참회”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회개”와 “참회”가 없는 믿음은 형식적인 믿음이고 위선적인 믿음이고 거짓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회개”와 “참회”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7).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다윗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모두 평생토록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면서 살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교회와 우리들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은 다윗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앙의 선배님들의 처절한 회개를 본받아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고백과 제사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셔서 날마다 “회개”와 “참회”의 고백과 제사를 드리면서 살아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신앙생활의 기초”는 “예배”의 제사를 정성껏 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목적은 우리 죄인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눈물과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다 쏟아 바치며 하나님께 “예배”의 제사를 드리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애굽의 목적도 하나님께 예배의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8:1). 예수님께서 “예배”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요4:23).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우리 제일 먼저 힘써야 할 일이 몸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기독교는 “제사”와 “예배”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 드리게 하셨고, 신약시대와 교회 시대에는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것이 기독교의 중심입니다. 주님께서 주일 날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날은 모두 주일 날 새벽과 주일 날 저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안식 후 첫날인 주일 아침부터 밤까지 드린 예배의 모습이 사도행전 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행20:7-11). 청교도들이 가장 강조한 것은 주일 성수와 예배였습니다. 한국교회도 그 초기부터 주일 성수와 예배를 강조해 왔습니다. 주일에는 온종일 모든 세속적 업무를 중단하고 예배와 전도와 봉사에 바쳐야 할 것을 엄격히 가르쳤습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 제 6부 예배모범은 주일성수의 원리를 엄격히 규정했습니다. “이 날은 주일인 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 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 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예배”의 제사를 정성껏 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의 제사를 바로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들이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정성을 다해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들을 축복하십니다. 우리들의 삶이 변화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의 축복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은 앞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권면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일에 모든 정성을 쏟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신앙의 선배님들이 물려준 주일 성수의 영적인 유산을 점점 저버리고 세속화와 인간화와 편의주의로 치닫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배가 너무 시끄러워졌습니다.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가 너무 많아졌는데 너무 불행한 일이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한국교회가 주일 저녁 예배를 점점 폐지하고 있는 것을 기가 막히는 일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총신대의 박용규 교수님이 최근에 한국교회의 영적 침체가 주일 저녁 예배를 폐지 한데서 비롯했다고 올바로 지적했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주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실 제가 11살 때 혼자서 38선을 넘어서 남한으로 오게 된 목적도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면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한 평생 주일에는 종일 집에 가지 않고 교회에서 예배 드리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강변교회에서 29년 동안 목회하면서 주일성수를 가장 중요하게 강조했습니다. 주일성수를 제대로 하지 않은 집사님들과 장로님을 책벌하기도 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정성껏 “예배” 드리는 일에 모든 정성을 쏟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를 정성껏 드릴 때 우리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충만하게 되고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와 본질은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면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 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신앙생활의 기초”는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도움이 필요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들도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10:17-19). 예수님께서는 이웃은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이 너무너무 귀중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39-44).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병자들과 죄인들의 몸을 만지시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8:3). 그리고 강도 만나서 매를 맞고 거의 죽게 된 사람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편 사람처럼 우리들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3-37). 사도 바울도 비슷한 권면의 말씀을 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17,20).

요사이 한국교회가 순수한 “회개”와 “예배”는 물론 순수한 “사랑” 실천을 소홀히 하고 그 대신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고 있는데 너무너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왜 교회가 학원처럼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냐고 책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왜 교회가 공연장처럼 시끄러운 음악에 치중하냐고 책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른 것들을 다 집어치워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회개”와 주일 성수의 “예배”와 함께 순수한 “사랑” 실천에 전력을 다한다면 한국교회는 교회다운 모습을 되 찾게 될 것이고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되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 프랜시스의 믿음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의 믿음은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히 이런 분들과 비교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탐욕적이고 배타적이고 비판적이고 위선적인 죄인이지만, 주님께서 지니셨던 그리고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이 지니셨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조그만 아주 조그만 부스러기라도 몸에 지니고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로, 방글라데시로, 북한으로, 중국 연변지역으로, 필리핀으로, 아프가니스탄으로 달려가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조금씩, 조금씩 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순수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펼 때 전도가 쉽게 또는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진리 선포가 아닌 순수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펼 때 저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고 전도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을 세계 곳곳에서 발견하고 저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큰 기쁨과 행복을 지니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참된 전도는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데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사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착한 사람들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착한 사람 도르가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에 의해서 욥바에 전도가 이루어졌고, 착한 사람 고넬료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에 의해서 가이사랴에 전도가 이루어졌고, 착한 사람 바나바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에 의해서 안디옥에 전도가 이루어졌고, 착한 사람 루디아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에 의해서 빌립보에 전도가 이루어졌고, 착한 사람 디모데의 “사랑”과 “도움”의 손길에 의해서 여러 곳에서 전도가 계속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와 본질은 불우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신앙생활의 기초”는 분노와 증오와 분쟁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울면서 에서와 화해한 이야기를 전해주시면서 우리들도 “화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화려하고 대단한 예배를 드리기 이전에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화해”를 이루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엡2:16). “화해”와 “화목”은 진리의 깃발을 휘두르므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몸과 마음에 지닐 때 이루어집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성 프랜시스도 손양원 목사님도 한경직 목사님도 장기려 박사님도 원수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와 증오와 저주를 쏟아내는 대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뿜어내면서 “화해”의 손길을 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와 본질은 분노와 증오와 분열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 “화해”의 손길을 펴며 “화해”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것인즉"(레26:6). 그리고 독생자를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사9:6).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과 함께 “평화”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우리의 “화평” 또는 “평화”라고 선언했습니다(엡2:14).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화평”과 “평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9). 사도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8)고 권면했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와 본질은 분노와 증오와 분열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 “평화”의 손길을 펴며 “평화”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통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선지자 에스겔에게 “통일”의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37:17).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피를 흘리신 것은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그리고 서로 원수가 되었던 우리들을 “하나로” 만드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6, 갈3:28). 성령님의 사역도 하나되게 하시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2:3). 사람들뿐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 되는” “통일”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신앙생활의 기초”와 본질은 분노와 증오와 분열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인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염원을 몸과 마음에 지니고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신앙생활의 기초”는 세상을 바라보는 대신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8복을 말씀하시면서 첫째 복과 여덟 번 째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라는 복이었고 팔 복의 결론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2).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14:1,2).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요11:41).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요17:1). 사도 바울도 항상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기쁘게 살았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 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5:1-3).

사도 요한이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기쁘게 살았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계4: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계5: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계10: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계12:1). “내가 또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계14: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계18: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19: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계20: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계21:1).

기독교 신앙의 중심과 목표는 새 하늘과 천국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이 세상의 본향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사모했다고 기록했습니다(히11:16).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근심 걱정 불평 불만 다 내어버리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잠시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밤의 한 경점”(시90:4) 같고, “아침에 돋는 풀”(사90:5) 같고, “없는 것” 같고(시39:5),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게”(약4:14)와 같다고 모세와 다윗과 야고보가 고백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마라나타” 라는 인사를 주고 받았는데 “마라나타” 라는 말의 뜻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만 독을 하고 암송을 하며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한국교회의 무디라고 불리던 이성봉 목사님은 밤에 자다가 옆집 방앗간에서 방아 찢는 소리만 들려도 주님이 오시지 않나 하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곤 하셨다는 간증을 저는 중학생 때 여러 번 들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세속화와 인간화로 치닫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과 돈과 자신의 명예와 쾌락을 너무 사랑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천국 신앙을 강조하지 않고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음악적인 유행에 정신이 빠져서 하늘대신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과 돈과 자신의 명예와 쾌락을 좀 무시하는 바보 같은 모습을 지니도록 힘쓰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지녔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부스러기를 조금씩, 조금씩 부어주셨습니다. 저는 참으로 부족하고 부족한 죄인이지만 “천국 소망”을 지니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즐겁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별했기 때문에 천국을 더욱 더 사모하게 되었고, 어린 아들 철원이가 네 살 때 저의 곁을 떠났기 때문에 천국을 더욱 더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2008년 8월 31일 밤 천국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섰을 때 나의 모습" 이란 제목의 글을 쓰면서 주님 앞에 섰을 때의 나의 모습 네 가지를 그려 본 일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흐느껴 우는 모습이고, 둘째는 무릎을 끓고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는 모습이고, 셋째는 반가움과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고, 넷째는 무릎을 꿇고 두 손 높이 들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하고 또 찬양하는 모습일 것이라고 그려보았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우리들이 힘써야 할 것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와 본질과 종말은 세상을 바라보는 대신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귀중한 것은 순수한 믿음을 지니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기초”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힘써야 할 것은 순수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와 우리들이 가장 힘써야 할 것은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이 물려주신 올바른 “신앙생활”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처절하게 “회개” 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둘째로, 주일을 종일 성수하면서 정성껏 “예배” 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셋째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넷째로,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다섯째로,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끄러운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올바른 “신앙생활”을 바로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에게 환난과 핍박의 채찍이 필요하시다면 우리들에게 환난과 핍박의 채찍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약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무식한 바보가 되는 것이 필요하시다면 우리들로 하여금 약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무식한 바보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기초”와 본질을 지니고 귀하고 아름답게 살아가시는 여러분들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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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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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