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 목사.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일보] 내 백성을 위로하라

2014년 강림절, 이사야 40: 1- 11

1. 시작하는 말; 역사적 배경

제2 이사야 책의 배경은 주전 6세기 중반경 페르샤 제국 고레스 왕의 등장과 급격한 역사적 변동이 일어난 때였습니다. 고레스 왕은 다른 고대의 정복자들과 달리 그는 매우 자비롭고 인간미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앗시리아와 바빌론의 피정복민들을 이주시켜서 외국에 정착시킨 정책을 폐지하였으며,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려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인류역사상 가장 의식 있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릴만 했습니다.

이사야 40장부터 55장까지를 '위로의 신학'이라 하여 제2 이사야로 구분하여 부릅니다. 제2 이사야는 처음부터 끝까지 위로와 격려의 말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제2의 출애굽운동을 기대하면서 고향에로의 복귀라는 역사적 임무를 일깨워 줍니다. 사죄와 해방에서 그는 새로운 출애굽을 상상합니다. 여호와의 영도 하에 환국하는 그의 백성과 광야를 통한 여호와의 대로를 준비하며 노래합니다.

제2 이사야는 바빌론 포로말기(540 B.C.)에 예언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포로민들을 위한 목회자로서 처음부터 동족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조상들이 출애굽 하였듯이 바빌론 탈출의 새 역사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굴레에서 해방시켰다는 이스라엘의 고대신앙고백처럼, 여호와께서 '능력의 손과 펴신 팔'을 다시 한번 드러내실 것입니다. 제2 이사야, 무명의 예언자는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 구원의 출애굽전승과 시온산(다윗)의 선택이라는 다윗 왕조의 전승인, 이스라엘의 주된 두 신학적인 전승을 하나로 융합시키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2.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사40:1-2).

위 말씀이야말로 기다리다가 지쳐있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연합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쁨에 상응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인은 결코 백성들의 죄를 경시하지 않습니다. 조상 때부터 지은 그들의 죄를 낱낱이 고발합니다(사42:18-25; 43:22-28). 그러나 그의 강조점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손에서 죄값을 곱절이나 받았고, 이제는 그 복역기간이 끝나서 풀려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제 앞으로 될 일을 위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이제부터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이야말로 영원하신 하나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 힘이 솟구쳐 피로를 모르시고 슬기가 무궁하신 분,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는 뛰어도 달음박질하여도 고단하지 않은 힘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사40:28-31). 그가 이제 이스라엘과 영원한 계약을 맺을 것이랍니다(사53:3이하).얼마나 신나는 소식입니까.

그러나 여호와가 이스라엘백성과 맺는 새 계약은 단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새 계약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만방을 여호와께로 이끌어 오는 그의 종이 되게 하는 계약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지난 세월 우리는 일제의 억박 통치하에서 36년간을 보냈습니다. 또 8.15해방이란 것도 우리의 의도와 아무 상관없이 남북분단은 현실화 되었고 그 비극을 아직도 겪고 있습니다. 둘로 나누인 채 골육상쟁의 6.25전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내년이면 70년이 되는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으로 동족 서로의 가슴에 총칼을 겨누고 대량 살상 최신무기를 만들며 사들이고 세계최대의 미국전술 핵폭탄기지 한 가운데 있습니다. 주권국가 국민으로서 자존심 상하게도 한.미 방위조약 관련해서 '전작권' 환수 시기를 정부가 쉽게 연기해 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8.15해방을 제1의 출애굽으로 상정하고, 분단의 벽을 깨뜨리고 평화통일을 제2의 출애굽으로 희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남과 북의 백성들은 무명의 예언자 제2 이사야의 선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하나님, 우리민족을 긍휼히 보시고 주님의 크신 위로와 한반도의 복역의 때가 찼으니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 주옵소서.

3. 고난의 종, 여호와의 종은 누구인가?

제2 이사야는 포로민들이 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고난을 체험하여 고난의 의미를 넓고 깊게 알고 있는 포로민들 이야말로 하나님의 참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증인이란 뜻은 세계만방에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구원과 사랑과 평화와 영광과 심판을 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전능한 분임을 증거하는 증인이란 것입니다. 시련을 당해 본 사람이 시련의 의미를 알고, 고난을 당해 본 사람만이 고난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을 겪어 본 사람, 고난을 통하여 희망의 삶을 얻은 사람만이,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증언은 삶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왜 그렇게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까? 그 지긋지긋한 고난의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역대 예언자들의 숙제였습니다. 죄의 벌이다, 더 좋은 것을 위한 훈련이다, 하나의 신비다 하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속 (代贖)을 위한 고난이란 단정은 제2 이사야에서 비로소 밝혀진 진리입니다. '고난의 종의 노래'는 구약의 복음서이며 그 절망에서 빛나는 구원의 봉화(㷨火)였습니다.

이 '고난의 종의 노래'는 네 개의 독립된 노래로 나타나 있습니다. 1) '그는 만방에서 공의를 나타낼 것이라'(42:1-4). 2)'여호와께서 나를 태중에서 부르셨다'(49:1-6). 3)'그가 아침마다 나를 깨우치신다'(50:4-9). 4)'그는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사람이었다. 고난의 사람'(52:13-53:12).

마지막 시(詩)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그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묘사하는 것으로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바로 예언의 가장 깊은 의미이며 예언의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의 종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서 고요히 소리 없이 천하에 공의를 베풀 사람이었습니다. 페르샤의 고레스왕도 '하나님의 종'이라 하였으나, 그는 군사적으로 정복하는 회리 바람 같이 요란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 고요한 정복은 스스로의 고난을 통하여 달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53"3). 그러나 그의 고난은 스스로의 죄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그는 마침내 입을 열지 않고 잠잠히 죽음에 나아갔습니다. 세인은 그를 멸절 속에 던졌고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나, 그 몸이 속죄제물로 하나님께 가납된 때, 그는 영원한 존귀에 오를 것이라 하였습니다(53:7-12).

이 '여호와의 종'이 이스라엘로서의 종, 이스라엘 민족을 인격화한 것이냐 또는 어떤 특정한 개인의 출현을 예언한 것이냐 하는 것은 끊임없는 논쟁거리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종이라고 선포되는 경우, 종의 역할은 여호와의 선택된 백성으로 그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나의 종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41:8-10).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의 사명은 곧 종의 사명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또한 "나"라는 1인칭 화자는 개인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라는 이사야 53장의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묘사에서 더욱 강해집니다. 이 '고난의 종의 노래'가 그리스도라는 한 개인에게 응하여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전 역사(全歷史), 아니 전 우주의 경륜이 지향하고 걸어온 유일한 초점입니다.(장공전집 3 <성서해설> 108)

이스라엘 조상들 가운데 아브라함과 사라, 그 외의 경우를 살펴 보아도 그들은 분명히 개인으로 서술되지만 그들에 관한 많은 본문들은 그들의 생애가 전공동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개인과 공동체는 구분되지 않은 채 심리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혼합되어 있는 것입니다.(버나드 W. 앤더슨, <구약성서이해> 585)

4.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그 이를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도 그 '새길' 을 마주 뚫어야 한다고 제2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 길은 세상의 군사력에 의한 정복의 길, 불의한 폭력의 채찍으로 노예를 괴롭히여 뚫는 길이 아니라, 평화의 임금이 오시는 길, 평화를 소망하는 이들이 즐거이 노래 부르며 기쁨에 벅차서 신명을 내어 새로 만든 길입니다. 그래서 불의의 길이 아니라 정의의 길이며, 전쟁과 살육의 길이 아니라 평화와 구원의 길이며, 거짓의 길이 아니라 진리의 길이고 해방과 자유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막에 정의의 길을 내고, 벌판에 평화와 통일의 길을 훤히 닦아야 하며, 부패한 쓰레기의 골짜기를 깨끗하고 좋은 새 흙으로 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그 영광된 모습을 드러내실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영화를 볼 수 있게 되리라고 무명의 예언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외칩니다.

이것은 포로생활로 절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오실 때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모두 그 앞에 무릎 꿇게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는 울퉁불퉁한 것, 구부러진 것, 죄악이나 정욕, 악한사상이나 이데올로기, 우상숭배나 음란한 것, 세상적인 모든 것들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5. 나는 누구인가?

그런데 우리가 여호와의 영광을 뵙기 전에 먼저 그 분을 만나야 하는 우리자신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자기정체성(identity)의 확실한 규명 없이는 나를 일깨우시고 새롭게 하여 함께 일 할 목적으로 내게 오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무엇이며, 어떤 존재이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절대적으로 필요하신 분인가? 나의 하나님이 되셔야 하는가에 대하여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만남의 기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은 인간자신의 생각이나 규명에 의해 그 실체를 명확하게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인류역사가 이 땅에서 시작된 이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 무엇이냐'라는 명제를 가지고 몸부림치며 해답을 얻으려고 애써 왔지만 드러난 그만큼 오히려 불확실하고 모호한 존재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누가 '이것이다!'라고 말하면, 다른 쪽에서 '아니다 저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여호와께서 말하는 자의 소리여 '외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르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40:6)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명확한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대답이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40:6-7).

하나님, 우리 인간이 한낱 풀 포기 같은 존재란 말씀입니까. 우리가 그처럼 과시하고 싶은 우리의 영광과 영화가 들에 핀 꽃과 같단 말씀입니까. 우리는 경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제한적인 존재이고, 인간은 죄의 존재이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고,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종교의 한계입니다. 종교창시자들은 모두 인간을 구원하러 왔다지만 사실 그들마저도 구원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죄인을 구원할 수 있으며, 유한한 존재가 어떻게 무한한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어떻게 신이 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아름다움은 구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6.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40:8). 이것이 인간론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영원하다', '하나님의 존재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입니다(요1:1).말씀이 육신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영광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요1:14). 하나님이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영원합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을 통째로 다스립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유한성을 깨달으십시오.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으십시오. 개혁할 수 있다는,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을 개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섭니다. 이런 고백과 선포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때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인류의 역사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역사인 '일반역사'와 하나님의 역사인 '구원의 역사'가 그것입니다. 인간은 역사를 만들기 위해 미움과 시기 질투, 명예와 욕망, 그리고 전쟁과 폭력, 테러, 서로 증오합니다. 이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 역사를 만들어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정의와 진리, 사랑과 화해, 자유와 평화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곧 하나님나라운동입니다.

우리민족의 화해와 통일은 하나님의 손과 그의 역사에 있음을 믿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의 과제를 최우선으로 자각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남북화해는 주변 강대국에 의존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남북 당사간의 신뢰와 인간애, 상생의 원칙과 민족자주성을 회복하여 교류하며 도우며 한반도 평화를 실현해 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권국가의 자주민이고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였습니다. 냉전체제를 풀고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핵전쟁의 위협을 제거하고 온 인류와 세계의 생존과 평화를 물려주는 세계사적 인류사적 사명도 동시에 가져야 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고, 더 이상의 전쟁연습을 중지하고,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하나님평화(샬롬)를 우리 한반도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과 함께 하시고 평화통일과업을 이룩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대편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는 것인데 인격적 성숙의 경지에 이를 때 가능합니다. 언더스탠드(understand)라는 영어단어가 의미하듯이, 상대편 자리에 내려가 아래에 설 때 이해가 가능합니다. 역지사지는 상대방에 관한 정보지식만으로는 안됩니다. 열린 감성과 소통의 의지, 타자 존재성과 차이의 존중, 생명의 연대성 자각, 그리고 인간의 본능적 이기심에 대한 연민의 마음까지 총동원될 때 발현되는 능력이라 하겠습니다.

오래 전에 감명 깊게 읽은 책이 한 권 있습니다. A.J.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라는 책인데 잘 알려져 있고 성직에 봉사하는 이들에게 많이 읽혀졌습니다. 크로닌은 스콧트랜드 출신의 의사로 <성채>, <인생의 도상에서> 등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천국의 열쇠>라는 책의 주인공 프란시스 치셤 신부와 그의 친구 안셀모 밀리 주교의 대조적인 면이 상세히 부각되어 있는 책입니다. 프란시스 신부의 삶은 인내, 용기, 청빈으로 일관된 삶이었으며, 그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득 안고 일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조직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행적을 이단시하고 배척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길은 성실한 마음으로 양심의 명령대로 살려고 노력한 사람의 것이며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작가는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프란시스 신부와 대조적으로 안셀모는 출세지상주의자로 능란한 처세술을 통해 교회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현실주의자에게 천국의 문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작가는 암시합니다. 대조적인 두 모습의 지도자상 내지 그리스도인 인간상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우리의 주위에서 진정 프란시스를 만나고 싶어지는 충동을 갖게 됩니다.

7. 목자 같은 하나님

제2 이사야 본문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말씀이 또 있습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떼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40:11). 하나님은 목자와 같이 양떼를 먹이십니다. 양떼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하나님은 어린양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십니다. 어린양 병든 양을 꼭 안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젖먹이는 암컷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지만, 어떤 때는 약자에게 은혜를 더 베푸십니다. 병든 자에게 사랑과 관심을 더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간의 연약성을 고백하라고 말씀합니다. 연약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환자들의 위로와 소망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신자들이 병들었을 때 네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첫째, 회개하게 됩니다. (최근에 지은 죄, 과거에 지은 죄를 생각하고 회개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 죄까지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둘째, 병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이번 이병의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왜 나에게 이러한 좌절과 병을 주시는가?) 셋째,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죽음이란 먼데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가까운데 있구나.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구나). 넷째,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길을 생각합니다. (이왕 아플 바에야 이 병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길은 없을까? 신자와 불신자의 어디가 다른가?)

그러기에 병을 잘 앓으면 인간이 크게 성숙하고 잘 못 앓으면 영육간에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잠언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7:14). 그러므로 지금은 인생을 생각할 때입니다. 병석에 누워있을 때는 육체적으로는 비생산적 시기지만 영적으로는 창조적인 기간입니다. 병석은 인생의 좋은 학교, 사색에 좋은 도장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15년 동안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왕하 20:1-11). 그 후 그의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종신토록 조심하여 행하리이다"(사38:15). 죽을 고비를 한번 지나고 나서는 건강하다고 몸을 마음대로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권력이 있다고 함부로 남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돈이 있다고 마음대로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생명, 건강, 재산, 직위, 명예, 그것은 우리가 창조한 것이 아닌 주어진 것, 잠시 맡겨진 것입니다.

8. 맺는 말; 고난을 통한 승리

제2 이사야의 詩(시) 전체에 흐르는 주제는 이스라엘의 찬양입니다. 이런 찬양은 40장-55장에 이르는 제2 이사야의 글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 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는(사40:27)호소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에서 벗어나 왕의 대로(大路)를 따라서 새로운 삶이 주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향하여갈 수 있도록 초청됩니다. 제2 이사야의 중심 주제는 포로민의 구원에 관한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민족주의를 넘어서게 됩니다. 무명의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증거로 삼아 여호와의 나라가 땅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그 종의 고귀함은 곧 이스라엘의 고귀함이 됩니다.

제2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고난을 통하여 많이 성숙되었음을 단언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고난의 길'(via dolorosa)을 걷도록 선택하였다는 사실과 그 고난 끝에는 보상과 영광이 있을 것을 믿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것은 이 종의 고난을 통한 것입니다. 만방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전령이 외치는 "너희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즉 "여호와는 왕이시다" 라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52:7)

신약과 교회사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사명을 제2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의 詩(시)에 비추어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종의 소명이 예수에게서 실현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이스라엘인이었습니다. 그에게서 이스라엘이 한 사람으로 축소된 것입니다. 그의 대속적인 희생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이스라엘인들이 그의 주변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문이 모든 나라들에 활짝 열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이며, 그 안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앞으로 전개되는 이 세계는 민중의 세계로 역사의 무대가 바뀝니다. 미래역사는 민중의 무대로 되면서 그리스도교는 창조적 소수자가 된 사명감으로 열심히 주어진 본분에 신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 창조적 소수가 진정 창조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 이미지'(image)를 파악하고 민중에게 보여주며 민중과 그리스도가 일체감으로 하나되어 인간구원운동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점으로 개인과 사회를 저변의 두 점으로 한, 삼각형적 생명체로서의 생활신앙인 것입니다. 하향적인 권위주의가 아닌, 정의와 진리, 신실(faithfulness)함으로 교류하는 아가페적 사랑의 선교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 중산층과 서민경제의 위기, 남북관계의 위기'라는 3대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생명과 평화 위해 일하고 이 백성을 위로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2014년 강림절에 하나님의 위로의 은총이 온 누리에 함께 하소서.

글ㅣ이기영 목사(기장 총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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