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한음, 일상을 말하다
 ©도서 「옥한음, 일상을 말하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양심을 따라 주를 섬겼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할 수도 있고 저것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두 가지를 놓고서 양심에 고통을 받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해야 합니다. 좋은 예로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상을 치르는 동안 안 믿는 친구들이 찾아오거나 부모님의 친구분들이 오셔서 술을 달라고 할 때 허용하고 안 하고는 양심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교회에서는 술을 사용하지 말라고 율법화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것을 사용하면서 양심에 계속 고통을 느낀다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신앙적입니다. 양심에 고통을 받으면서까지 남을 위해 희생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사치스러운 장례식도 양심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제해야 할 대상인 헐벗고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해서는 돈 쓰기를 몹시 꺼리던 사람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는 장례와 매장 비용에 몇 천만 원을 들인다는 것은 그의 양심에 가책을 받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각자가 자기 신앙 양심에 따라 해결해야 합니다.

옥한음 – 옥한음, 일상을 말하다

정원사의 편지
 ©도서 「정원사의 편지」

말기 암 환자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에 상관없이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는 이상하게도 비슷한 고백을 한다 합니다. “좀 더 사랑하고 살걸….” 이제는 고통 많은 세상을 떠나 영원히 사랑만 하고 살아야 할 사람이기에 부족한 사랑으로 산 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기는 후회인가 봅니다. 가을인지라 반추되는 인생에 생각을 맡길 때가 많아집니다. 그러면서 2, 30년 후 나의 미래를 문득 문득 상상해보곤 합니다. 앙상한 가지처럼 모든 것 다 털어놓고 마지막을 기다리면서 남은 호흡만을 이어간다면 어찌할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불처럼 살다가 사그라지는 인생이고 싶지만,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기에 스스로의 몸을 간수할 수 있을 때까지만 욕심 없이 살 수 있게 하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잘 알듯이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원수를 위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악한 원수나 미운 사람들은 내 감정을 상하게 하며 상처를 듬뿍 안겨주고는 정작 자신은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죽이고 싶도록 미운 마음을 가지게 된 사람은 그 미움으로 인하여 상처를 되씹으며 평생 잊지 못할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억울한 일은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인 것이지요.

임종학 – 정원사의 편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
 ©도서 「김형석 교수의 예수를 믿는다는 것」

예수께서는 어린이와 같은 삶을 살라고 가르치셨고, 바울은 육신은 늙으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고 고백했다. 믿는 사람은 예수 앞에서는 언제나 어린애가 된다. 나이가 들수록 “이 철없고 어리석은 어린애 같은 저를”이라고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는 자신이 늙었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 믿음의 본질인 것 같다. 주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을 성취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해 그 일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다. 어떤 계기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사랑의 품으로 내던지고, 그 품에서 새로운 삶을 체험할 수 없다면 우리는 참다운 믿음을 얻을 수 없다. 봉사가 위대한 인물들에게만 주어진 과제는 아니다. 우리가 매일 하는 일,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 인간을 목적으로 수행되며 이웃과 사회에 대한 봉사의 정신으로 채워질 수 있다면 우리는 가장 값지고 위대한 삶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제3의 차원이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최후의 목적은 인간을 위한 봉사라는 대답 이상을 얻을 수 없다.

김형석 – 김형석 교수의 예수를 믿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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