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존 맥아더 목사가 2015년 예수의 비유를 다룬 책 "Parables: The Mysteries of God's Kingdom Revealed Through the Stories Jesus Told"을 출간했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번역서를 생명의말씀사에서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맥아더 목사는 12개의 비유를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어 해설한다. 이 책을 중심으로 하여 존 맥아더 목사의 비유에 대한 이해를 소개하고자 한다.-

 

존 맥아더 목사 ⓒ그레이스투유
존 맥아더 목사 ⓒ그레이스투유

맥아더 목사가 다섯 번째로 다룬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누가복음 10장에 기록된 이 예수의 비유의 가르침은 일반 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사람이 혼자 험악한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거기에 더하여 강도들로부터 많이 맞아 생명도 위태로운 상태였다. 이 때 그 강도당한 자 옆을 제사장이 지나갔는데 제사장은 그를 돕지 않고 피하여 지나갔다.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렀는데 역시나 피하여 지나갔다. 이후 한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다가 이 강도당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 그를 치료해주고 안전한 주막으로 가서 주막 주인에게 자신이 없는 사이 이 강도당한 자를 보살펴주라고 적지 않은 금액을 지불하여 주었다.

이 비유가 가리키는 것을 보려면 이 비유가 나오게 된 배경도 함께 보아야 한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한 율법사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하신 내용이다. 한 율법사가 예수께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지 묻는다. 예수께서는 율법사인 그에게 '율법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라고 다시 물으셨고, 율법사는 이에 대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율법사의 모범적인 대답에 예수께서는 '너의 말이 옳으니 그 대로 행하면 된다'라고 하셨는데, 이 지점에서 율법사가 질문을 하나 더 한다. 율법사는 '누가 내 이웃인가'를 예수께 물었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께서 베푸신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맥아더 목사는 이 비유가 누구라도 다 알고 있는 유명한 내용인 만큼 독자들이 스스로 이 비유에 대하여 '안다'고 생각하여 가볍게 넘기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나 이 비유는 "단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우라는 권고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은 구약성서에서부터 전통적으로 강조되는 덕목이지만, 지금 이 비유에서의 초점은 단지 타인에게 긍휼의 마음을 갖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가르친 다른 비유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역시도 통찰한다. 무엇보다 이 비유가 예수를 '시험'하러 온 율법사에게 베풀어진 비유인 만큼, 이 비유는 율법주의의 한계를 날카롭게 짚는다.

율법사는 예수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지'를 묻는다. 맥아더 목사는 이 질문 자체는 훌륭했다고 밝힌다. 영생은 신자들에게 중요한 주제이다. 맥아더 목사에 따르면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그들의 혈통과 전통 그리고 종교적 의식 등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배웠지만, "그러나 여전히 죄책감과 불확실한 운명으로 인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 그들은 양심을 통해 자신들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예수께 영생을 묻는 장면은 여러 곳에서 나온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한 젊은 부자 청년도 예수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태복음 19장)라고 질문하였고, 한 밤 중에 은밀히 예수를 찾아왔던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 니고데모도 예수께서 거듭남을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를 적극적으로 알고 싶어했다(요한복음 3장).

맥아더 목사는 '영생'의 방법을 묻는 율법사에게 왜 예수께서 '복음'을 말씀하시지 않고 '율법'을 언급하시는지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그 율법사는 예수를 시험하려는 입장이었고 동시에 또 '자기를 옳게 보이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신은 스스로 율법을 꽤 잘 지켰다고 생각했으며, 율법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혹은 스스로가 충분히 의롭지 않다고 여겨진다 할지라도 사람들 앞에서는 의로운 모습으로 비춰지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당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해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종교인들의 문제"였다. 맥아더 목사는 만약 율법교사가 자기 스스로의 양심 앞에 정직한 사람이었다면, 그는 자신이 신봉하고 또 의지하고 있는 율법을 자기가 스스로 충분히 지키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즉 율법 앞에서 율법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못했고, 이웃을 자기의 몸같이 사랑하지 못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맥아더 목사는 율법사가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문제를 건너뛰고 바로 '이웃'의 문제로 넘어갔음을 주목한다. 율법사는 예수께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물었다. 그러나 예수는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인가"를 물으셨다. 어떤 이가 '나'의 이웃이 될만한 자격이 있는지, 어떤 이가 '나'의 도움을 받을만한 자격이 되는지의 문제가 아닌, 우리 자신이 타인의 이웃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자기중심주의적인 관점을 완전히 반대 각도로 접근하셨다. 그리고 강도당한 자의 이웃이 되는 이가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이 율법사의 입장에서 특정 '자격'을 갖춘 자가 아닌, '자비를 베푼 자'즉 사마리아인이라는 대답을 율법사로부터 이끌어내셨다. 그렇다면 이 대화는 율법사 입장에서 매우 당혹스럽고 거리끼는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영생을 얻기 위하여 행해야 하는 율법 중 하나 즉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을 합당하게 지킨 사람이 다름 아닌 사마리아인이라고 했을 때, 영생은 사마리아인에게 열려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율법사 입장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철천지원수와 같은 존재들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수세기 동안 서로에게 깊은 적대감을 품고 서로를 배척해왔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혈통과 종교를 섞은 자들이었다. B.C. 722년 앗수르에 의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이 포위 당하면서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포로로 잡혀갔는데, 그 가운데 일부 이스라엘에 남아있거나 되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방인 정착민들과 결혼해 살면서 이방 종교도 함께 흡수했고, 이들은 구약 종교 전통을 일부 유지했지만 이방 종교들과의 흡수를 피하지 못했다. "충실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종교를 성경의 하나님을 거역하는 부패하고 부정한 종교로 간주했다." 뿐만 아니라 두 집단은 서로를 공격하였다. 에스라 시대 남왕국 유다에서 잡혀간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하기 시작하면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사마리아인들이 도와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유대인들은 거절했고, 이에 사마리아인들은 성벽 재건을 방해하기 시작했다(에스라4장). B.C. 130에는 하스모니아(마카비) 왕가의 유대인 왕 요한 헤르카누스가 사마리아를 정복했을 때 유대인들이 그리심 산에 있는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했다. 성전이 이 이후로 재건되지 못했지만 사마리아 인들은 여전히 그리심 산이 합법적인 예배 장소라고 주장했고, 여기에 대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입장 차이가 요한복음 4장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예수의 비유 속에서 레위기 19장의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계명을 지킨 자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배척하던 사마리아인이었다. 예수의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가르침은 율법중심주의와 인간의 자기중심주의를 정면으로 도전한다. 인간은 율법의 강령들 아래서 결국 자신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공로로 인하여 의를 획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처절히 깨닫게 된다. 또 계명을 지키는 주체는 인간적 시각에서 특정 기준을 충족하는 자들이 아닌, 실제로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가능성이다. 율법 준수의 가능성이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것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시각을 절대화하여 타인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면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가 우리가 이웃인가 아닌가를 묻기 전에, 그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도 돌려, 내가 그의 이웃이 되어주고 있는가 아닌가를 스스로 질문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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