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존 맥아더 목사가 2015년 예수의 비유를 다룬 책 "Parables: The Mysteries of God's Kingdom Revealed Through the Stories Jesus Told"을 출간했다. 한국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번역서를 생명의말씀사에서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맥아더 목사는 12개의 비유를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어 해설한다. 이 책을 중심으로 하여 존 맥아더 목사의 비유에 대한 이해를 소개하고자 한다.

존 맥아더
존 맥아더 목사. ©쉐퍼드 컨퍼런스

예수께서는 그의 사역 중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비유'를 적지 않게 사용하셨다. 예수의 비유는 간결하고 뚜렷하다. 존 맥아더 목사는 예수의 비유는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광경, 농경 사회와 목가적인 은유, 집안에 있는 물건, 평범한 사람들에게 익숙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어, 청중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단순한 이야기 형태인데 '듣는 귀가 있는 청중'들에게는 영원한 신비를, 장엄한 진리를 알게 하였다.

그렇다면 비유는 무엇인가? 구약에서 '비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마샬(mashal)'이고, 신약 공관복음서에서 '비유'로 번역된 헬라어는 '파라볼레(parabole)'이다. '파라'는 '곁에'를 뜻하고 '볼레'는 '던지다'를 뜻하는 '발로'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물을 나란히 놓아 비교하는 의미를 지닌다. 맥아더 목사는 '비유'란 "심오한 영적 진리를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에 빗대어 말하는 표현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비유에서는 '평범한 현실'과 '초월적인 진리'가 병렬된다.

비유는 은유, 직유, 우화, 풍유 등과 구별된다. 직유는 '말처럼 건장한' 혹은 '토끼처럼 재빠른'과 같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도 그 뜻이 이해된다. 은유는 '내 마음은 호수요'와 같이 대상을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다. 풍유는 대표적인 예로 『천로역정』을 들수 있다. 맥아더 목사에 따르면, 비유는 직유보다 좀 더 긴 이야기나 좀 더 복잡한 은유로 확대되었고, 따라서 비유의 의미를 단 번에 명백하게는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설명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대부분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맥아더 목사는 신약성경 속 예수의 비유를 오늘날 우리가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몇 가지를 잊지 말자고 당부한다. 몇 개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예수의 비유는 사실적인 요소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의 비유는 숲속의 동물들을 의인화시켜 도덕적인 교훈을 가르치는 이솝 우화와는 전혀 다르다." 예수의 이야기 속 비유는 실제로 모두 사실일 수 있다. 예수의 비유 중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의 내용이 있는데, 누룩은 실제로도 가루 서 말 속에서 전부를 부풀게 할 수가 있다.

둘째, 비유를 해석하면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맥아더 목사는 예수께서 "교훈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도록 일부러 간결한 비유를 사용"하셨다고 표현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비유를 해석할 때,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이 나그네의 상처를 돌볼 때 사용한 '기름과 포도주'(눅10:34)에 대하여 기름과 포도주가 각각 어떤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아내려는 것은 적절치 않다. 마찬가지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돼지 먹는 쥐엄 열매'(눅15:16)에도 영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이러한 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각각 사마리아 여인이 이웃을 정성껏 돌보았다는 것, 탕자가 극한 가난을 경험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셋째, 독자반응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에 빠지지 말자는 것이다. 이것의 기본 개념은 텍스트의 의미를 발화자나 텍스트 자체보다는 '독자'를 주체에 두고 독자가 의미를 적극적으로 짓는 것이다. 맥아더 목사는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언어 해체주의의 맥락이라고 지적하면서, 이같은 해석학적인 접근 방식은 결국 텍스트의 의미를 명료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넷째, 모든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핵심 교훈"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예수와 우리 가운데 2천년 이상의 시간 간격과 공간의 거리가 있다. 또한 구전으로 전승되고 기록되고 편집되는 과정을 거쳐 오늘 우리 앞에 텍스트로 놓여져 있다. 우리가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단순한 묘사에 집착적으로 영적 의미를 부여하려 애쓴다던지, 혹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주의적인 해석으로 아전인수격인 해석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이미 해석된 것만을 일방적으로 고집하면 오늘날 적용에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성경의 독자들도 '이미'와 '아직' 사이의 균형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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