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생으로 올해 나이 아흔이 된, ‘루터의 나라’ 독일에서 온 푸른 눈의 하 안토니오(Anton Trauner) 몬시뇰. 1964년 1월부터 교회 일치를 위한 기도모임을 시작해 수 년간 이끄는 등 신-구교의 에큐메니칼운동을 벌여온 그가 최근 회고록 ‘일치와 평화의 사도인 하 안토니오 몬시뇰’을 펴냈다.

▲ 하안토니오 몬시뇰.

하안토니오 신부는 1922년 10월 14일 독일 뮌헨 서쪽 조그마한 마을에서 테어났다. 남부에 있는 대도시 뮌헨에서 90km쯤 떨어지고 아름다운 도나우 강에서 10km쯤 떨어진 베르팅겐(Wertingen)마을이다.

그는 1958년 4월 27일에 천주교 신부로 서품을 받은 후, 잘 알지도 못하던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배를 타고 그 해 7월 5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그 때 한국 사람들은 6·25 사변을 겪은 다음이어서 가난하여 많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하안토니오 신부가 교회일치운동을 시작한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는 부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로 갈 일이 있어 부산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그에게 한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신부님,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예, 저는 독일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대뜸 “아, 마르틴 루터의 나라에서 오셨군요”라며 “신부님! 실은 저는 성당도 교회에도 다니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지 않는 제가 보기에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너무 많이 갈라져 있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그것이 하 신부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 한번은 하 신부가 부임한 성당에 나오던 할머니가 “아들이 위독하다”며 기도를 요청해 방문했는데, 먼저 도착해 있던 교회 목사가 “신부님, 이 형제는 우리 장로교 신자입니다”라고 냉담하게 말한 사건이었다.

이같은 일들로 안타까움을 느낀 그는 1962년 성령강림주일 새벽에 난생 처음 기독교 교회를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부활주일에는 성당 교우들과 달걀을 들고 이웃 기독교 교회에 나눠주는 등 ‘소박한’ 교회일치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964년에는 지역의 목사·신부들과 함께 교회일치기도회를 열면서 본격적으로 이 운동을 시작했다. 1975년 6월 23일에는 부산 구덕 실내 체육관에서 제2회 부산 신·구교 합동 기도회를 개최했고, 이날은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3,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참석했다.

물론 이같은 운동에 대해 반발도 적지 않았다. 특히 몇몇 보수 교단 목회자들은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일치기도회에 참석했다가 교인들에게 강한 비판을 받은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하 신부는 이에 대해 “가톨릭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특히 마리아에 대해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가장 복 받은 여인일 뿐 신격화하지 않는다”며 “가톨릭 내에 마리아를 지나치게 숭배하는 이들이 있지만 이는 잘못된 믿음”이라고 지적했다.

하 신부는 한국교회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한국은 매우 특별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나라”라며 “이렇게 선한 사람들이 많고, 또 짧은 기간에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나라는 세계적으로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이렇게 새벽 미명에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나라와 이 나라에서 믿음생활하는 성도들에게 준 은혜라고 생각했다”며 “옛날에는 독일이나 다른 유럽 국가의 수도원들에서도 수도자들이 그렇게 일찍 일어나서 새벽 기도와 묵상을 하는 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수도회의 수가 너무나 적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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