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누가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언제나 대답할 말을 마음속에 두며 하루를 시작한다. 성경에 사도 베드로는 누가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항상 대답할 것을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한 것처럼 늘 하루에 새벽을 열고 성전 문을 열 때마다 그렇게 묻는다. “왜 오늘 너는 성전문을 여는가?”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그리고 어떻게 이 하루를 열고자 하는가?” 무슨 동굴의 철학자도 아니면서 괜히 그렇게 새벽바람이 머리를 쓰다듬을 때 본능적으로 머릿속을 휘어 저으며 신선한 질문을 던진다.

어느 록 가수가 술 취한 듯 부르는 노래의 가사가 떠오른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있겠지 흐린 날도 날이 개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어떤 때는 설령 목사라 하더라도 이런 유행하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을 때가 있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인생에 관하여, 그리고 신앙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반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은 내일(來日)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내일은 막연한 것이다. 내일 일을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일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오늘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고, 어제의 일에 얽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힘을 내어 살아가야 할 말은 “도전”이라는 말이다. 도전은 단순한 욕망과 욕심에 이끌리는 허영이 아니다. 없는 것을 위장하기 위해서 분수처럼 뿜어대는 허풍도 아니고 있는 것을 과장하기 위해서 포장하는 허세도 아니다. 단지 그 도전은 있는 그 자신의 모습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움직이는 성실함이다. 성경에서 요셉은 꿈을 꾼 사람이었다. 그 꿈은 내일을 향한 자기설계였고, 장래에 있을 일에 대한 비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꿈을 꾼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신분이 노예라고 하더라도 그 노예의 신분에 성실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 성실함이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고, 자기의 형제들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을 힘들어도 버티는 사람이 도전이라는 그 어려운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믿음은 상식이나 지식이나 평범한 것을 넘어선 세계의 영역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미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 신약성경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게 되면 서도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세상에서 얻은 지식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다. 이게 미친 일이 아닌가? 왜 그렇게 필요하고 좋은 세상의 지식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반전(反轉), 그리스 말로는 패러독스이다.

가능하지 않는데 가능하고, 있을 수 없는데 있고, 볼 수 없는데 보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히브리서11:1)라고 말씀하고 있다. 어찌 물위로 예수님이 걸어오실 수 있으며, 어찌 남자가 아니고서 성령으로 예수님이 잉태가 되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신앙인들은 달라야 한다.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는 안 된다. 성공과 지식과 권력도 전혀 다른데 있다. 그것은 마음에 있다. 겉으로 부자가 아니라 마음의 부자가 되어야 한다. 자랑하듯 사랑해서도 안 되고, 충성스런 봉사자로 나타내서도 안 된다. 죽도록 미워도 죽도록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반전이다. 일반과 다른 범상함, 보통을 넘은 특별한 세계의 사람, 그 사람들이 신앙인들이다. 그 사람들이 인생을 도전할 수 있다. 오늘의 성실함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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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