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재벌을 이렇게 유쾌하게 비튼 드라마는 없었다.

지난 29일 막을 내린 SBS 수목극 '보스를 지켜라'가 뚜렷하게 남긴 발자취다.

마지막회 시청률은 14.2%. 한때 20%를 뚫을 것으로 전망됐지만 뒷심이 달리면서 시청률에서는 하향곡선을 그린 '보스를 지켜라'는 그러나 막장 요소없는 착하고 귀여운, 그리고 엣지 있는 드라마로 기억될 전망이다.

◇허점 많은 재벌, '인간미' 철철 = 한국 드라마 속 재벌의 모습은 지극히 전형적인 게 사실이다.

동경의 대상으로 멋지게 그려지고 특히 재벌 2세남은 백마탄 왕자의 대명사로 언제나, 어디서든 등장한다.

하지만 동시에 대부분 격식과 체면을 따지고 근엄하고 위선적이다. 돈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 굴고 일반인들은 감히 근접하기 힘든 포스를 내뿜는다.

그런데 '보스를 지켜라' 속의 재벌들은 이와 달랐다. 기본적으로 코미디의 외피를 두른 때문이기도 하지만 드라마는 뉴스에서만 보는 갖춰진 모습이 아닌, 인간미가 철철 흘러넘치는 재벌의 모습을 그리며 이전 작품들과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이름에서부터 정감이 느껴지는 차봉만(박영규 분) 회장은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다혈질이다. 하지만 선대 회장인 어머니 앞에서는 나이를 잊어버린 철부지로 돌아가고, 공황장애를 앓는 외동아들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그는 우리 곁의 아들, 아버지였다.

어머니 앞에서 "엄마 때문에 간 떨어질 뻔 했잖아"라며 어리광을 피우고 "내가 10대 총수 중에서 가장 잘생기고 주먹이 세"라고 잘난 척하는 등의 모습은 박영규라는 배우와 기막힌 궁합을 과시하며 생생한 재미를 안겨줬다.

또 폭행 사건으로 180시간 사회봉사명령을 받고 이런저런 현장에서 몸으로 일을 하고, 검찰에 끌려갈 처지가 되자 '휠체어쇼'를 펼치는 모습 등은 마치 '뉴스 뒤 뉴스'를 보는 듯 흥미로웠다.

차봉만의 어머니(김영옥)는 깐깐한 카리스마를 견지하면서도 아들과의 관계에서 따뜻함이 흘러넘치는 여느 어머니와 같은 모습을 보여줬고, 차봉만의 아들 차지헌(지성)은 돈이 있다고 고쳐지는 게 아닌 공황장애를 세상 몰래 앓는 모습을 통해 재벌에 대한 대중의 일차적인 피해의식을 희석시켰다.

특히 차지헌은 '까도남'이나 '한량'으로 이분되던 기존 드라마 속 재벌2세와 확실하게 달랐다. 경영에 전혀 관심이 없는 허랑방탕하고 유치한 캐릭터인 차지헌은 절대 멋지지 않지만 귀엽다.

여기에 '재벌녀'인 서나윤(왕지혜)은 이보다 어리숙할 수 없었고, 또다른 재벌2세 차무원(김재중)도 평소에는 멋지지만 사촌간인 차지헌과의 관계에서는 체면을 벗어던진 20대 청년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보스를 지켜라'의 미덕 중 하나는 이 모든 인물을 희화화시키는 데 머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드라마는 극적 재미를 위해 마디마디 코믹함을 극대화시키기는 했지만 매순간 개연성을 유지하며 상황과 감정에서 발을 땅에 붙이고 있었다.

◇88만원 세대의 비애는 사라져 = 반면 드라마는 애초 기획의도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초보 여비서의 불량 보스 길들이기'라는 주제를 표방했던 드라마는 88만원 세대를 대표하는 노은설(최강희)이 재벌 3세와 '계급장 떼고' 맞붙는 이야기를 그리려 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그래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지방대 출신 88만원 세대로 취업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기세인 노은설의 모습은 펄떡펄떡 싱싱했고, 그가 유치찬란하고 심술맞은 보스 차지헌과 티격태격하는 상황은 합을 잘 맞춘 액션영화를 보는 듯한 재미를 안겨줬다.

노은설이 무도인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주먹깨나 쓴다는 설정은 이 88만원 세대의 유일하면서도 통쾌한 출구 역할을 하며 순간순간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다.

하지만 드라마는 너무 일찍 노은설과 차지헌의 마음을 연결시키는 우를 범하면서 뒷심을 잃어버렸다.

차지헌의 여자가 된 노은설은 더이상 88만원 세대일 수 없으며, 노은설의 됨됨이와 부족한 스펙 이면의 능력을 알아본 차봉만 회장의 혜안은 노은설에게 너무 일찍 신분 업그레이드의 사다리가 돼줬다.

그로 인해 드라마는 가장 큰 동력이자 드라마의 기획의도를 중반에 이미 상실해버림으로써 이후 스토리에서 힘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중반 이후는 재벌의 편법 승계와 후계구도 경쟁을 그렸지만 그렇다고 악인을 내세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긴장감은 떨어졌고 그 과정에서 장기였던 코믹함도 이어나가기 힘들어졌다.

◇깔끔한 연출, 배우들의 재발견 = 비록 뒷심은 달렸지만 '보스를 지켜라'는 여러가지로 의미있는 결과를 남겼다.

재벌을 엣지있게 비튼 점과 소재의 신선함에 더해 연출과 연기에 있어 탁월한 재미를 안겨줬다.

특히 연기에 있어서는 박영규, 지성, 최강희가 기존의 모습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재발견을 이뤘고 김재중과 왕지혜도 방점을 찍는 등 배우들이 고루 호연을 펼쳤다.

박영규는 출연진 사이에서 '영규 신'이라 불릴 정도로 코믹함과 진지함, 슬픔을 넘나드는 연기로 탄성을 자아냈다.

지성도 페이소스 짙은 코믹 연기에 도전해 성공했고, 최강희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초짜'인 김재중은 재벌2세의 모습을 무난하게 그렸고, 왕지혜는 '차도녀' 이미지를 말끔히 씻어내는 엉뚱한 모습으로 사랑받았다.

이와 함께 이 모든 재료들을 요리한 손정현 PD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그러면서도 섬세한 연출을 통해 드라마를 초지일관 산뜻하게 만들었다. 특히 장면전환의 매끄러운 편집이 눈에 띄었다.

'보스를 지켜라' 후속으로는 한석규, 장혁. 신세경 주연의 '뿌리 깊은 나무'가 다음 달 5일부터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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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를지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