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국 교수
최창국 교수 ©유튜브 영상 캡처

최창국 교수(백석대 실천신학)가 28일 복음과 도시 홈페이지에 ‘용서의 세 지평’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최 교수는 “용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단순하지 않다. 성경에서 용서는 매우 복잡하고, 피상적으로 보면 용서를 다루는 많은 본문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는 항상 같은 의미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경에는 서로 다른 지평의 용서가 묘사되어 있다”며 “바로 사법적 (또는 영적) 용서와 심리적 용서와 관계적 용어이다(스티븐 트레이시, 영혼을 만지다, 301-12). 용서의 이러한 세 가지 지평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 안에 있지만 서로 다른 구조와 특징을 지닌다”고 했다.

그는 “사법적 또는 영적 용서는 하나님에 의한 죄의 용서와 관련된다”며 “사법적 용서는 죄책감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며, 가해자와 다른 모든 범주의 죄인에게 해당한다”고 했다.

이어 “하나님에 의한 사법적 죄의 용서는 구원 경험과 관련된 용서이다. 사법적 용서는 죄에 대한 고백과 죄의 인정과 회개를 조건으로 한다”며 “죄에 대한 사법적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베풀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사법적 또는 영적 용서를 베풀 권한이 없다. 인간은 사법적 용서를 베풀 수 없지만 가해자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법적 용서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역할이 모두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죄에 대해 충분한 책임을 지도록 충고하지 않고 묵인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라며 “왜냐하면 인간 피해자가 가해자의 잘못을 묵인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와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결국 주님의 용서는 용서와 소명으로 이어지는 확장성을 지닌다는 것을 암시한다”며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용서는 단지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데 있기보다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여기서 새로운 시작이란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방향 전환을 뜻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는 이웃을 위한 존재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눈다는 의미에서 이웃을 향한 새로운 방향 전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며 “여기서 이웃이란 교회 안과 밖의 사랑의 대상만이 아니라 분노와 심지어 증오의 대상까지 아우르는 말”이라고 했다.

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가르치신 용서의 의미는 하나님을 향한 뉘우침으로부터 이웃에 대한 소명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며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베풂(for giving)과 남을 위함(for others)이라는 신의 부름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 193). 결국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를 위한 기초이자 소명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심리적 용서 또는 정서적 용서는 개인적이고 내적인 용서로서 두 차원으로 설명될 수 있다”며 “하나는 부정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 차원이다. 심리적 용서의 부정적 차원은 피해자의 분노와 분개 등과 관계되고, 긍정적 차원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과 관계된 것”이라고 했다.

이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의미가 있다”며 “회개하지 않는 가해자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가해자가 저지른 악을 방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했다.

또한 “심리적 용서의 부정적 차원인 분노와 같은 반응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분노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분노가 무조건 나쁘거나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악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건강하고 적절한 반응일 수 있다”며 “성경에서 금하는 분노는 개인적으로 복수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마음속에 품는 분노다. 바울은 인간은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지만, 그 분노가 죄가 되지는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엡 4:26)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용서는 단순한 분노 관리 그 이상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정당한 분노, 즉 불의에 대한 정당한 반응인 분노를 극복해야 함을 의미한다”며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의 기억을 바꾸는 것과 관련이 있다. 피해자는 자신의 분노와 같은 내적 상태나 행동을 부인하거나 왜곡시켜도 안 되지만, 가해자로부터 받은 상처만을 기억하기보다는 가해자의 곤고한 상태도 생각해야 한다. 피해자의 긍휼의 마음이 용서로 이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이러한 마음은 분노를 극복하도록 도와 심리적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돕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심리적 용서의 긍정적 차원은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가해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과 관련이 있다. 피해자가 자비와 사랑을 베푼다는 의미가 가해자에게 다시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자유를 준다는 의미는 아니”라며 “그보다는 피해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초하여 가해자가 스스로 회개하고 치유될 것을 기대하면서 사랑을 베푼다는 의미이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분노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그분의 도우심으로 분노와 증오를 극복하고 가해자에게 적절한 자비를 베푸는 법을 배울 때 심화된다”고 했다.

또 “피해자의 분노나 분개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일부이다. 특히 분노나 분개는 자아존중이라는 측면에서 피해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며 “하지만 이러한 감정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거나 일상에서 이러한 감정들에 익숙해질 경우 도리어 그 감정들이 피해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분노와 분개는 용서와 모순되는 감정이 아니다. 용서의 행위는 정당한 분노와 분개를 무시하거나 잊는 데 있기보다는 그러한 감정들을 품고서 무언가 창조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했다.

따라서 “용서하는 사람은 분노나 분개의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품고 있지만, 그 분노나 분개가 제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조용히 떠나보낼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자신의 내적 장벽을 극복하는 여정이기 때문에 용서의 시작일 뿐”이라며 “인간의 용서는 피해자의 내적 여정과도 관계되지만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적 용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관계적 용서는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의 변화와 관계되어 일어나는 용서이다. 즉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와 관련된 용서이다.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가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라며 “성경에서 ‘회개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메타노니아’는 ‘마음’과 ‘변화’를 뜻하는 두 헬라어를 합성한 것이다. 마음의 변화는 삶의 방향이나 행동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했다.

이어 “가해자의 회개와 사과(apology)는 같은 것이 아니”라며 “사과하는 것 자체가 회개의 확실한 지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사과는 자신을 ‘재구성하는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가해자의 사과는 가해자로 하여금 자신은 심각한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확신하게 만드는 방편으로 작동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가능하다”며 “관계적 용서는 특히 가해자가 범한 죄와 그 죄가 지닌 악하고 파괴적인 성질에 대해 충분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 가해자의 행동이나 삶의 변화가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피해자는 가해자가 회개할 때까지는 용서를 시작하거나 어떠한 용서도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관점도 있다”며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용서의 역동성에 대한 인식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용서는 단지 관계적 용서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법적 용서와 심리적 용서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심리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와 관련된 용서이기보다는 피해자의 내적 여정과 관계된 용서”라며 “심리적 용서는 가해자의 죄나 악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의 분노의 장벽을 극복하는 여정과 관계된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죄나 악으로 인해 발생한 분노와 같은 내적 장벽을 정화하는 여정과 관련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맥락에서 피해자는 회개하지 않은 가해자라 하더라도 심리적 용서를 해야 한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에게는 치유의 희망을 제공하고, 가해자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여정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나아가 피해자는 회개하지 않는 가해자를 하나님이 의롭게 심판하실 것을 믿고, 가해자를 치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용서는 새로운 우리를 탄생시키는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용서는 새로운 나와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방법이자 여정”이라며 “용서는 상처나 악행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의 분노와 분개와 같은 감정을 무시하거나 묵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넘어서는 일”이라고 했다.

이어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죄와 악행을 잊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기억이 남은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용서는 피해자가 상처의 황무지에서 공감의 강물을 건너 새로운 땅으로 들어갈 자유를 되찾는 여정”이라며 “용서는 공감의 프락시스다. 그것은 가해자가 느끼는 소외감과 비통함과 죄책감 등을 피해자가 공감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용서는 피해자를 위한 승리 게임도 아니다. 오히려 용서는 피해자로서 자신을 내어주는 선물이자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는 도리”라며 “용서의 결과, 피해자는 더 이상 피해자나 부당한 상처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니라 승리자로 거듭난다. 한쪽은 이기고 다른 한쪽이 지는 의미로서 승리가 아니”라고 했다.

아울러 “진정한 용서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되돌리는 반전의 제로섬 게임도 아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치유와 자유의 기회를 주는 선물”이라며 “진정한 용서는 악에 대한 자비의 승리이며 비정에 대한 공감의 승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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