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사역글로벌네트워크(GNN) 주관 사역 포럼
김형석 박사(전 총신대 역사신학 교수, 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기독일보 DB

'정인이 사건'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 표명을 둘러 싼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문 대통령은 4일 정인이 사건과 관련하여 “매우 안타깝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입양 아동을 사후에 관리하는 데 만전을 기해달라면서 입양 절차에 대한 관리·감독뿐 아니라 지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보건복지부 등 관계 부처는 입양 절차에 있어 아동의 이익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입양특례법 4조의 원칙이 철저하게 구현되도록 해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전한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정부는 입양가정에 대한 방문 횟수를 늘리고 양부모의 양육부담감 측정을 위한 스트레스 검사 실시 등을 검토 중이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대통령의 발언이 있기 전 일부의 아동복지단체 관계자들이 홀트아동복지회로 몰려가서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인해 이번 사건의 본질이 아동 학대인지, 입양 제도의 잘못인지? 혼선을 빚고 있다.

2014년 미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2014년 2월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으로 입양된 세 살배기 현수 군이 양아버지 오캘러핸의 구타로 사망한 사건이다. 미 국가안보국(NSA)에서 한국 담당부서 책임자로 일하는 오캘러핸은 “현수를 샤워 시키려는데 현수가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는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다가, 이튿날 오후가 되어서야 현수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경찰에 신고했다.

공식 사망 판정을 내린 병원 측은 두개골 골절과 체내 출혈, 몸 전체에 걸친 타박상 등 구타에 의한 외상으로 사인을 확정지었다. 담당 판사는 양아버지 오캘러한에 대해 1급 살인 혐의와 아동 학대 혐의를 적용해서 구속했다. 이것이 ‘입양아 현수군 사망사건’의 전말이다. 이 사건으로 한국과 미국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지만, 양국의 반응은 차이가 있었다. 미국은 살인 혐의를 받은 오캘러핸의 형량에 많은 관심을 보인 반면 한국의 여론은 현수를 미국으로 입양 보낸 홀트아동복지회에 대해 책임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그때도 미국에서는 현수군 사망 사건의 본질을 아동학대로 인식했지만, 우리나라 언론들은 입양제도의 문제로 본 것이다. 이 같은 잘못된 인식과 입양에 대한 편견이 계속되는 한 우리나라는 오랜시간 입양아 수출 1위국이었다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심하게 말하면 자기 국민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무능한 정부와 국민이 그 동안 우리를 대신하여 수 많은 한국의 고아들을 살려 낸 홀트 가족과 입양 부모들을 비난하는 꼴이 된다.

해리 홀트는(Harry Holt, 1905-1964)는 미국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 주에서 밀 농사를 짓던 농부였다. 1927년 버다(Bertha Holt, 1904-2000)와 결혼한 후 소작농으로 일하다가 가뭄이 계속되자 오리건주로 이사하여 목재사업과 제재소를 운영한 것이 큰 사업으로 번창하였다. 이렇게 해리는 목재사업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1950년 심장마비로 죽음 직전까지 가는 체험을 한 후부터 신앙생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54년 12월 14일 오리건주의 유진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월드비전(World Vision) 창시자 밥 피어스 박사의 특별 강연에서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를 통해 본 전쟁고아들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우리 같은 가난한 농부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안타까운 마음만 남긴 채 집으로 향했다. 그날 한국의 고아들을 돕기 위한 구호금을 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이 들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다큐 속 아이들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홀트 부부 가족이 한국에서 입양한 아이를 한 명씩 안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홀트 부부 가족이 한국에서 입양한 아이를 한 명씩 안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홀트아동복지회

이들 부부에게는 이미 1남 5녀의 여섯 자녀가 있었지만 한국의 고아를 품기로 결심하고 농장의 일부를 팔아 자금을 마련하여 무작정 한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홀트는 한국의 고아들을 입양하고, 한국에서 아이들을 위해 많은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과 심장 수술을 한 쇠약한 50세의 농부가 어떻게 새로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가 한국으로 오는 도중에 들런 일본의 한 호텔에서 아침에 펼친 성경의 한 구절을 보고 자신의 인생을 입양하는 일에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이사야서 43:5-7)라는 말씀이었다.

당시 미국의 피난민구호법은 한 가정에서 입양 가능한 인원을 두 명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리건주 출신의 리처드 뉴버거 상원의원과 에디스 그린 하원의원의 도움으로 입양을 2명으로 제한한 규정을 개정한 ‘홀트 법안’을 통과시켰다. 1955년 6월 한국을 찾은 홀트 부부는 혼혈아 등 8명의 전쟁고아를 입양하고, 4명은 다른 부모들에게 입양을 주선했다. 10월 14일 홀트 부부와 입양아 12명을 태운 비행기가 미국 포틀랜드 공항에 도착했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여러 곳에서 돕겠다는 연락과 함께 입양 문의가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홀트 부부는 1955년 자신들의 이름을 딴 ‘홀트씨(氏) 양자회’를 한국에 설립하고 본격적인 입양사업에 나섰다. 홀트씨양자회는 단체 수용방식의 기존 고아원과 다르게 아이들에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선물해 줌으로써 아이들의 양육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입양 초기에 한 아이가 심하게 아파서 병원에 데려갔는데 의사가 유전병이라고 진단하자, 버다는 그 아이가 입양아라는 사실도 잊은 채 자신의 집안에는 그런 병이 없다면서 전력을 다해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았다. 이들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미국의 많은 가정에서 국제 입양을 문의하였다.

1960년 12월 재단법인 홀트해외양자회로 재설립되어 국내 혼혈아등을 초기에는 주로 미국에 입양시켰으나 점차 유럽·아시아 등지까지 입양시키는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처음에는 전쟁고아들을 입양하다가 그중에 아픈 아이들과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있어 직접 의사를 고용하여 아픈 아이들을 돌보았다. 1961년 무렵에는 장애아동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일산 탄현리의 농장 부지 7만여 평을 구입하였다. 새로운 집을 짓고 특수교육과 물리치료 등을 시작하여 홀트일산복지타운을 만들었다.

해리 홀트는 숨을 거두는 날에도 아기 두 명을 안고 와서 담요를 끌어당겨 덮어주고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최후를 맞이하였다. 버다 홀트는 1964년 세상을 떠난 남편 해리 홀트의 유업을 이어서 홀트 국제아동복지회를 이끌었다. 아흔 살이 넘은 나이에도 입양된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손수 축하 편지를 써서 보냈다. 버다 홀트는 2000년에 삶을 마감하였는데, 생전에 경기도 일산에 자신의 묘를 마련할 정도로 한국 사랑이 각별했다. 버다 홀트는 1995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키스와니 세계 봉사상을 받았다.

버다 홀트가 세상을 떠나자 셋째 딸 말리 홀트(Molly Halt, 1935-2019)가 그 뒤를 이었다. 1956년 오리건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말리는 아버지의 부름으로 한국에 와서 서울 효창공원과 녹번동 일대에서 고아들을 양육했다. 특히 버려진 장애아동에 대한 사랑을 쏟아온 그녀는 1975년부터 홀트일산복지타운의 '말리의 집'에서 중증 장애아동을 돌보다가, 2019년 5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대를 이은 홀트 가족의 봉사는 한국전쟁으로 고통당하던 고아와 장애인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안겨주었다. 홀트 가족의 품을 거친 입양아는 대략 1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2006년 말리 홀트가 함께 생활하는 장애 아동과 마주 보며 활짝 웃고 있다.
2006년 말리 홀트가 함께 생활하는 장애 아동과 마주 보며 활짝 웃고 있다. ©김형석 박사 제공

21세기 접어들어 해외 입양에 대한 반성과 함께 해외입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나타나고, 대안으로 국내 입양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국내 최대의 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보도들이 잇따르고 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가 운영자들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지 홀트 가족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할 사안은 아니다. 홀트 가족이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미국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희생하면서, 고아들에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통해 양육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던 정신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은 국내 입양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훈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정인이 사건에 나타난 아동학대라는 개인의 일탈을 마치 입양 가족과 제도의 문제처럼 오도하는 잘못은 즉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경우 현수 사건 때 검찰은 양부인 오캘러핸에게 1급 살인 및 1급 아동학대치사죄를 구형했지만, 재판에서는 플리바게닝을 통해 1급 살인 혐의는 벗고 1급 아동학대 치사죄 중 최저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과거 수감기간을 형량에 더하도록 판결했는데, 오캘러핸은 과거 2년간 수감된 기록이 있어 결과적으로 10년형을 선고받은 셈이다.

전국입양가족연대 오창화 대표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정인이 사건으로 인해 지금 당장 입양이 필요한 말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을 지키고 보살펴서 새로운 엄마 아빠의 품으로 보내야 한다.”고 안타까움을 호소한다. 그의 외침은 계속된다. “우리(크리스천)가 말씀대로 주변의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잘 돌봤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생명을 돌보는 일보다 더 큰 선교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시대의 사명 아닐까요.” 지금이라도 그의 말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홀트에게 진 사랑의 빚을 되갚는 것이다.

김형석 박사(전 총신대 역사신학 교수, 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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