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4대 임금 세종대왕은 인재를 양성하고 의례제도를 정비하는 등 화려한 문화정치의 꽃을 피운 성군이었다. 집현전을 설치하고 젊은 학자들로 하여금 제도와 역사를 연구하게 했다.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된 집현전에서는 농업, 의학, 음악, 법제 등 다양하고 방대한 사업을 펼쳐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지만 그 중에서도 ‘훈민정음’의 창제는 우리 민족사 뿐 아니라 세계사에 길이 빛나는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지배층인 양반이 사용하던 한자가 우리말의 구조와 체계가 달라 백성들이 쉽게 사용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1443년 우리 민족의 문자체계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이것은 20세기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세종대왕이 이룩한 업적 중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빼놓을 수 없지만 그에 못지않게 뛰어난 업적은 국방을 튼튼히 하고 국경을 확장한 일이다. 세종대왕은 이징옥, 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국경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나라의 지도자로서 세종대왕의 위대한 점은 그가 엄격한 군신관계를 대화와 타협의 관계로 승화시킨 지도력에 기인한다. 때로는 신하들과 장시간 논쟁하며 정책을 수립하는데 있어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세종대왕이 관료들과의 적극적인 협력과 타협을 통해 이루어낸 정치철학은 한국 정치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었다. 세종대왕이 집권한 32년간은 정치·경제·군사적인 안정 속에서 다방면에 발전을 이룬 조선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세종대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9년 한글날을 맞아 서울시가 광화문광장에 세종대왕 동상을 건립했다. 높이 6.4m, 폭 4.5m, 무게 20t의 금색으로 덧입혀진 거대한 세종대왕 동상을 중심으로 앞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에는 광화문과 경복궁이 있어 서울시민 뿐 아니라 수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의 단골 포토존이 되어왔다.

세종대왕 동상은 건립된 지 10여 년간 이곳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최애’ 명소가 되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많은 수난을 겪었다. 어느 때부턴가 광화문광장이 각종 기습시위와 집회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한복판이라는 상징성에다 지리적으로 청와대와 가깝고, 바로 앞에 주한미국대사관이 있어 주로 진보 단체의 반미시위 장소로 변했다.

세종대왕 동상이 기습시위의 단골 명소가 된 사례는 한 두 번이 아니다. 지난 2017년 8월 통일선봉대 소속 회원 10여 명이 세종대왕 동상 기단 위로 올라가 미국을 규탄하는 기습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폭력을 행사한 1명이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연행됐다. 그보다 한 달 전인 7월에는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 4명이 동상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다 집시법 위반으로 연행되기도 했다.

2016년에는 알바노조 조합원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호소하며 기습시위를 벌였고, 2014년에는 감리교신학대 도시빈민선교회와 사람됨의신학연구회 소속 학생들이 세월호 특검을 요구하며 동상 위로 올라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세종대왕 동상에 화염병을 투척한 김 모 씨는 공용물건손상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지난해 개천절에는 보수단체가 주최하는 반정부 집회에 광화문 광장 뿐 아니라 서울시청 광장과 대한문, 서울역에 이르기까지 1백만 만 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지난 8.15 광복절에는 코로나19 확산 우려에도 불구하고 전광훈 목사 등이 이끄는 보수단체를 중심으로 수천 명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올해 개천절부터는 이곳이 집회나 시위 뿐 아니라 일반 시민조차 접근이 불가한 ‘금단의 땅’이 되고 말았다. 경찰은 1만1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서울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 90곳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광화문 과장에 경찰 버스 3백여 대로 거대한 차벽을 만들었다. 이를 두고 야당과 일부 진보 진영까지 ‘재인산성’이라며 공권력에 짓밟힌 국민의 기본권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백성을 사랑해 한글을 창제하고 우리만의 과학 시스템을 발전시킨 세종대왕의 업적은 역대 조선의 어느 왕도 하지 못한 일이다. 또한 4군6진을 통해 국방을 튼튼히 하고 국경을 넓힌 업적만 가지고도 위대한 임금의 자격은 차고 넘친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진정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되는 것은 그가 신하를 향해 언로를 열어 자기를 반대하는 세력까지도 대화와 타협의 대상으로 존중했다는 점이다.

요즘은 ‘내로남불’에 이어 ‘아시타비(我是他非)‘라는 사자성어가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내로남불‘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란 뜻이고, ’아시타비‘는 나는 옳고 남은 틀리다는 말이다. 세종대왕은 군주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열고 반대의 목소리까지 귀를 기울였다. 지도자가 내 사람과 남의 사람을 구별하여 차별하면 국론은 분열되고 국민 간에 갈등은 끝이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개천절에 이어 한글날에도 버스로 성벽을 쌓아 세종대왕 동상을 고립무원의 금단지대로 만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코로나19 확산을 저지하고 불법집회를 막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를 통치하는 지도자가 듣기 싫은 소리는 듣지 않겠다고 차벽보다 더한 성벽을 쌓는다 하더라고 스스로 국민으로부터 고립되는 것은 버스장벽에 겹겹이 쌓인 세종대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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