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 인식론의 구조분석

교회교의학(KD) 제2권1부(II/1), '하나님에 관한 교리'는 제5장 "하나님 인식Die Erkenntnis Gottes"과 제6장 "하나님의 현실(성)Die Wirklichkeit Gottes"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해를 위해서는 제6장 "하나님의 현실(성)"으로부터 제5장 "하나님의 인식"을 읽으면,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인식'의 한계를 논함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식됨(Gott wird nur durch Gott erkannt)"(§27)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현실(성)'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면, 그 하나님의 인식의 가능성과 한계점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바르트는 하나님의 '현실(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우선 제6장의 목차에 따르면, 하나님은 '행위을 통하여 자유롭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28)이시다.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29)이시고, 더 자세히 말하면, '은혜와 거룩함과, 긍휼을 베푸시는데 있어서, 인내하시고, 지혜로우신' 분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행동을 통하여 자유롭 게 우리를 사랑하신 일'에 있어서 '항상 통일되고', '전능함으로 항상 준비되어 있으시며', 그래서'영원히 영광 받으시길'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인간으로 하여금 인식하도록, 우선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 주신다(계시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 인식'의 출발점( terminus a quo )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현실(성)',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계시'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신적 현실 (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Diese göttliche Wirklichkeit ist eben Jesus Christus selber)"(284)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인식론적 구조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25,1)과 "인간 앞에 있는 하나님"(§25,2)로 구분하여 기술한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인간', 곧 구원의 경륜적 역사 속에 계신'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대상성'과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 사이'에 있는 '내재적 삼위일체적 대상성trinitarische innerliche Gengenständlichkeit'이라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참조 요 17:5,23, II/1, 313) 전자는 2차적인 대상성이고, 후자는 1차적인 대상성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는 인간과, 인식하도록 자신을 내어주는(계시하는) 하나님의 두 대상 사이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태 혹은 정황을 '계시하는 자'와 '계시된 자', 바꾸어 말하면, '인식대상'과 '인식 하는 자'의 대칭구조로 기술한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 편에서, 인간이 당신을 인식하도록 항상 준비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준비(Die Bereitschaft Gottes)"(§26,1)를, 그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심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숨어계심(은폐성)"(§27,1)에 관한 한 절을 하나님 인식론에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다른 한편, 바르트는,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해서,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지를 기술하기 위해서 "인간의 준비"(§26,2)와 그에 따른 "인간의 하나님 인식의 진실성"(§27,2)을 목차에 배분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하나님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하나님의 현실(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2. 하나님의 현실성(現實性: Wirklichkeit: 활동하심)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활동하심(활동하심: Wirklichkeit)'은, 한 마디로 말하면, '역사 속 에서 실제도 활동하심으로 항상 자유롭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점을 바르트는 제6장 "하나님의 활동하고 계심"의 §28("자유 안에서 사랑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 명제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시 행동(Tat) 속에 살아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과 우리의 교제(공동체: Gemeinschaft)를 추구하고, 그런 식으로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바로 이렇게 사랑하시는 분(Liebende(r)은 - 우리 없이도 계실 수 있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시고 - 당신의 생명을 당신 자신으로부터 가지시는(취하시는), 주님의 자유 안에 계시는 분이시다"(§28 명제) 이러한 명제에 상응하게, 바르트는 "하나님의 존재(Gottes Sein)"을 '행위 안에서', '사랑 안에서', 그리고 '자유 안에서'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목차 구분(Gliederung)에 따르면, '하나님의 존재'는, 추상적으로 그리고 피안(彼岸, jenseits)의 세계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철저히 역사 속에서 우리들과의 관계 속에서 '활동하시면 서', 바꾸어 말하면, '자신을 드러내시면서' 실존하시는 분이시다. 한마디로 말하면, 바르트에게 있 어서, '하나님의 존재는 당신의 행위 속에 있다.(Gottes Sein im Akt)',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존 재는 하나님의 자기계시 속에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 님의 말씀'을 곧바로 일치시킨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살고, 하나님 말씀을 위하여 산다. ...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고, 그것에 매임으로써, 그리고 그 말씀 때문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 ...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존재를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289)

그러므로 바르트는 §28,1 "행위 속에 계신 하나님(Gottes Sein in der Tat)"에서 하나님의 존재 는 철저히 그의 계시 행위를 통하여 인식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행동과 일하심은 그 자체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즉 그 어떤 창조, 그 어떤 화해, 그 어떤 구원 그 자체로 선포되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 모두는, 즉 하나님의 행동과 일하심(Gottes Tun und Wirken)은, 예수 안에서, 성경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실질적인 계시'로 선포됨으로써 믿어지는 것이다."(290)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이 존재한다.Gott 'ist'"라는 것은,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은 누구이신가(Was oder Wer 'ist' Gott?)"라는 것으로부터 설명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292)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가?'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에 따르면, 신약성경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des lebenden Gottes)"으로 강조하 며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렘 2:13; 17:13; 시 36:10; 요 5:26; 14:6: 빌 1:21; 골 3:4; 요일 1:2: 5:20; 요 6:63; 롬 8:10)(295)4)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활동(일), 행동하고 계시다'는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생명'이라는 뜻이기도 하다는 것이다.:"우리가 출발해야 하는 규정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는 생명이시라는 것이다. 오직 살아계신 분이 하나님이시다.(daß Gottes Sein Leben ist. Nur der Lebende ist Gott)"(294) 그러나 바르트는, "여기서 우리가 곧바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분의 계시에 근거하여, 사건들로, 행위들로 그리고 생명으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일반적인 그 어떤 사건과 행위와 생명의 요약이나 총체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못을 박는다.(295)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 Deus dixit )'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하나 님의 말씀'은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행동과 사역(Tat und Wirken)'이며, 동시에 '창조, 화해, 구원' 사역으로서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로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계시와 그 분의 행동과 사역을 떠난 하나님의 존재'는 생각될 수가 없다. 이렇게 바르트가, 말씀을 통하여 계시된 내용은, 곧 '하나님의 창조, 화해, 구원의 행위'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는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행동을 통하여 인식된, '하나님의 속성들'은 온전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온전하심(Vollkommenheit)"은 다름 아닌, 그의 '속성' 의 '온전하심', 곧 '흠이나, 잘못이나, 부족함이나, 결핍된 것이 없다는 뜻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계시행위의 온전함'을 의미한다. 그가 기술하고 있는 "하나님의 온전하심(Gottes Vollkommenheiten)" 이란, 그 명제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온전한 존재(본질 Wesen)을 – 많고, 개별적인 그리고 구별되는 온전한 것들의 충만함 속에서 - 영위하신다. 이 온전한 것들의 각각의 요소들은, 그 자체로 그리고 모든 다른 것들과 연합하여 – 때론 하나님께서 자유로우신 사랑 의 형태로, 때론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계시는 자유의 형태로 - 하나님 자신과 전혀 다른 것이 아 닌, 바로 당신의 유일하고, 단순한, 하나님 자신의 본질 그 자체, 속에서 온전하다."(II/1, 362)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Eigenschaften)'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신적 본질'이 온전하듯이, 신적 속성들 또한 '온전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바르트가,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의 행위'에서 인식하고자 했던 것과 같이, 반대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속성들'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는 온전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Gottes Wesen)은 이러한 것이다: 즉 자유 가운데(자유롭게) 사랑하시는 분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온전한 본질이다. – 곧, 그 자체가 온전하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온전한 것들의 척도(기준)가 되는 존재(Wesen)이다."(II/1, 362) 따라서 "신적 온전하심에 대한 인식은, 오직 자유 가운데 있는 당신의 사랑의 온전함, 곧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인식하는 것 속에 있다"(362)고 한다. 이렇게 바르트는,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은,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의 본질에 기초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자유 가운데 있는 사랑의 행위'를 하나로 결합한다.(참조 롬 5:8, 312, 447) 즉 그는,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을 계시하시는, 바로 그 삼위일체론적 구원행위 속에 담겨진 '성품(속성)'으로 계시된 것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시기 때문'이라는,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은 자유 가운데 살아 계시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저 각각의 온전하심(Vollkommenheit)이 본질적으로(wesentlich) 당신의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II /1, 363). 왜냐하면 '하나님 그 자신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란 있을 수 없다'고, 그는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계시 안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이러한 온전성들 속에 실존하시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이러한 온전하심은, 그분 안에 그리고 오로지 그분 안에서만, 곧 당신이 자신의 계시와 영원 전부터 동일하신, 바로 그분 속에만 실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관성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 속성에 관한 교리'의 과제이다."(364)

이상 간략하게 요약한, "하나님의 온전성"을 바르트는 §30("신적 사랑의 온전성")과 §31("신 적 자유의 온전성")에서 보다 자세히 전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바르트는 제6장 "하나님 의 현실(성)"(§28-31)을 전제하고, 제5장 "하나님의 인식"(§25-27)을 기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전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행동(행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은 – 대별하면, 사랑과 자유 속에서 – 바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고, 그 본질에 대한 인식은, 곧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인식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행위'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인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행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곧 성령을 통한 하나님 말씀 안에서 인식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이제 제5장 §25에서 먼저 '인식론적 전제'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인식 방법"을 취급하고, 그 다음에 '인식론의 본론'에 상당하는 §26 "하나님의 인식"을 다루고, 그 다음에 "하나님 인식의 한계"(§27)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바르트의 '하나님-인식론'의 핵심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인식(§25-27)

바르트는 자신의 '하나님 인식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나님 인식은, 성령을 통하 여 하나님 말씀이 계시되는 가운데서 일어난다. 즉 하나님의 인식은, 그 말씀을 순종하고 신앙하는 현실 속에서만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하나님 인식의 내용은 -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아주 명백하고 확실하게 계시하셨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또한 우리에게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는 그분(예수 그리스도)을, 우리가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또한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해야 하는 - 바로 그분(예수 그리스도)의 실존(Existenz) 이다."(KD II/1, §25 명제)

이러한 명제에 의하면, 우선 '하나님 인식'은 성령을 통한 말씀의 계시 안에서 일어난다. 그 런데 성령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로 하여금 인식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하게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선포'를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 말씀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가능하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 인식의 내용'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die Existenz)'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25,1 "Der Mensch vor Gott")에 있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 앞에 계시기(§25,2 "Gott vor dem Mensch")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대면對面'해 있다는 '대상성'에 근거하여, 곧 '하나님은 인간 앞에' 그 리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에 근거하여, 바르트는 §26,1에서 "하나님의 준비"를 그리고 §26,2에서 "인간의 준비"로 '하나님의 대상성'과 관련하여 세분하여 다룬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영 원히 '숨어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은폐성(Verborgenheit Gottes)"(§27,1) 때문에, 인 간의 하나님 인식에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인식한 '하나님의 인식'은 결코 부족한 점이 없는 온전한 것이라고, "인간의 하나님 인식의 진실성"(§27,2)을 확정한다. 결과적으로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대면해 있는 '상호 대상성'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서 발견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의 내재적 삼위일체론적 '대상성'과, 구원의 경륜 속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의 역사적 '대상성'을, 성령의 사역 안에서 연결시킴으 로써, 인간의 하나님 인식 혹은 인식가능성을 전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이를 간단히 도표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참조 §26 명제):

● 성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앞에 서 계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숨어계시는 분'이시다. - 하나님 인식의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근거한다.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자기 계시'가 없이는 '인간의 하나님 인식은 불가능' 하다.

●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한다. 그래서 '하나님 인식'의 내용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이다. -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한 분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에 대한 인식은 곧 '하나님 인식'과 다름이 없다.

●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대면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서로 대면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로하여 서로 하나님은 인간 앞에,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힐 때, 참 하나님의 인식이 일어난다.

● 그러므로 바르트는 "하나님의 인식 가능성"(§26)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 하나님 인식 가능성은, 하나님 편에서(von Gott her) 보면, 하나님 자신이 '진리'라는 점에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진리를 인식하도록,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내어 주신다는 데 있다. 그리고 하나님 인식 가능성은, 인간 편에서(vom Menschen her)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신적인 만족의 그리고 또한 하나님 진리의 대상에 참여하신다는 점에 있다."(§28 명제) 이 명제에 의하면, 하나님 인식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 편에서의 계시와 인간 편에서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믿음의 인식'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25에서 언급한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대상성'이 전제되어 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인식'은 결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에 대한 인식이요 믿음이다. 이 점은 여전히 하나님 계시와 인식의 '중재자'(딤전 2:5, 511f)로서의 '화육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요 14:6, 45, 194, 199)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 인식에 관한 이해와 전제와 해석의 장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경청되는 교회"라고 단호히 교회론적으로 제한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교회 공동체에서 설교자에 의해서 선포되는 화육된 말씀'이 하나님 인식의 출발점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인식'이 일어난다. 이것으로 바르트는, '하나님 인식'에 있어서, 인간적 그 어떤 가능성을 배제한다. 즉 자연적인 인간의 그 어떤 이성적 활동과 지성적인 활동도 결코 스스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말씀의 계시 없는 하나님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다. 그런데 그 계시는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된 말씀이 성령의 도움으로 설교자의 입을 통하여 선포될 때,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날 설교자들의 입을 통하여 선포되는, 자기에 관하여 기록된 말씀(성경)을 통하여, 성령의 도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Deus dixit ). 이것을 바르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증거der Selbstbeweis Gottes"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전제하지 않은 하나님 인식론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셨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죄악된 인간은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먼저 하나님을 알고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참조."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이밖에 요 1:18; 10:14f. 등등)(KD II/1, 54)

이렇듯 바르트의 신학에서, 어떠한 주제를 다루건 간에,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우선적 주도권적 행위(die initiative Souveränitätsakt)'이다. 따라서 '하나님 인식'에 있어서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자신의 우선적 주도권적 계시 행위'가 전제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도권적 행위'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폐성 속에 있는 개방성', 그리고 '개방성 속에 있는 은폐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중재행위'가 요청된다. 어쨌든 바르트 교의학에서'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를 증언하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이를 선포하고 증언하는 '설교자 의 선포된 말씀'은 언제든지 '해석적 공통 요소'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전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Gnadenbund)', 곧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결의(Gottes ewiger Ratschluß)'이 다.(참조 KD II/1, 114 각주) 이런 점에서,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모양의 '자연신학'도 있을 곳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신앙의 유비( analogia fidei )'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4. 영원히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의 은폐성과 인간의 하나님 인식의 진실성

우선 바르트는,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한계점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인식된다.(Gott wird nur durch Gott erkannt). 따라서 우리는 - 우리가 그분의 계시에 대하여 신앙으로 응답하려고 시도하는, [심리학적, 역주 첨부] 직관들 (Anschauungen)과 [신학적, 역자 첨부] 개념들(Begriffe)의 도움을 빌어서는 –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 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 우리가 그분의 허락에 의해서, [그런 직관과 개념들을, 역자 주] 사용하 고, 그분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는 –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 이러한 시도를 성공해서, 그래서 우리 인간의 하나님 인식이 참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가 직관하고 파악하는 일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은혜 가운데 수용되고, 규정되는데서 가능하다."(II/1, §27. '하나님 인식의 한계' 명제, S. 200) 이 명제에 의하면,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인식'되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그 어떤 직관이나 신학적 개념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의 은폐성(숨어계심)' 때문이고(참조. 1. 하나님의 숨어계심Die Verborgenheit Gottes), 둘째는 인간의 '체념(포기,Resignation)'이라는 '교만(Hochmut)'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숨어계심'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안 보여주시기 위해서 숨어계심이 아니라, 인간의 하나님 인식의 '체념'으로 인한 숨어계심을 뜻한다. 따라서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이 '숨어계심'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죄악된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다'는 것이다.(참조 롬 3:11,18, 인용 시 14:1이하, 114) 그는 분명히 말한다.: "체념은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역자 주) 교만이다. 체념은, 죄인을 의롭다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교만이다. 겸손은 결단코 체념이 아니다. 겸손은 심판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은혜에 매달리는 것이다."(240)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Anerkennung der Offenbarung Gottes)"해야 한다는 것 이다.(244)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것은 동시에 또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인식된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폐성'은 역설적으로 '하나님 인식'의 한 단면이다. 즉 참 하나님을 인식한 자는, '하나님은 온전히 알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폐성'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유한한 것은 무한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폐성'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의 "폐기될 수 없는 타자성(unaufhebare Andersheit)"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바르트는 강조한다.(212) 그러므로 '하나님 인식'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이 선물'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인식의 출발점, 곧 terminus a quo '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우리가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극복되고, 즉 '하나님과 인간의 대상성'의 거리가 극복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하나님의 계시'는 '계시 인식'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 인간의 하나님 인식이 참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가 직관하고 파악하는 일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은혜 가운데 수용되고, 규정되는데서 가능하다."(200)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믿음으로 수용하는데서만 '참된 하나님 인식'에 이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를 통하지 않고는, 다른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인식하도록 내어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참조 요 14:9f, S.45)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 인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 어져 있기 때문이다"(골 2:3, 285)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참 '인식'에 이른 자는 필연적으로 '하나 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인식한 '하나님의 온전한 속성'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심'으로 얻어진 하나님 인식의 결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인식하도록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식의 대상으로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성부, 성자, 성령의 내재적(혹은 1차적) 대상성에 상응한 역사적 경륜적(혹은 2차적) 대상성이다. 그런데 1차적 대상성에 상응하게 2차적 대상성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즉 '성령의 역사' 안에서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적 대상성'과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의 2차적 대상성 사이에는 '유비'가 있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두 대사성'은 종합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되는'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하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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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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