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신사참배 거부운동 재조명 학술세미나
제3회 신사참배 거부운동 재조명 학술세미나에 참석한 주요 인사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장지동 기자

안병길·윤한홍·이채익·조해진·정점식 국회의원이 주최한 제3회 신사참배 거부운동 재조명 학술세미나가 13일 오전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독립운동이다’라는 주제로 개최됐다.

이날 먼저, ‘최덕지·안이숙·조수옥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발제한 이은선 교수(안양대 교회사)는 “일제 말 일제의 가혹한 탄압 하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면서 2000여 명이 옥고를 치렀고, 그분들 가운데 주기철·최상림 목사 등 50여 분이 옥사했다”고 했다.

이어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당시 일본 천황의 현실의 지위를 부정하고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기독교신앙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지만, 동시에 일본의 국체를 부정하며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분명한 항일운동이었다”며 “그래서 일본은 이들의 행위를 불경죄, 치안유지법, 국가보안법위반죄 등으로 처벌했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 국가는 이분들 가운데 주기철, 주남선, 손양원, 김두석 등 몇 분들만을 독립운동유공자로 인정했고, 나머지 분들읠 신사참배 거부행위를 신앙의 행위로만 이해하면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제3회 신사참배 거부운동 재조명 학술세미나
이은선 교수(왼쪽)가 발제를 하고 있다. 오른쪽은 최덕성 총장 ©장지동 기자

그는 “최덕지(1901~1956)는 1901년 통영에서 태어나 대화정교회에 다니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다양한 여성단체들에서 활동했고,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다가 해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고 했다.

이어 “최덕지는 수감되기 전까지 여러 방법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했는데 먼저, 경남부인전도회 조직을 통한 합법적인 각 교회 순회 활동을 했고, 둘째는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한 조직화작업이었으며, 셋째로 전조선으로 이러한 운동을 확대하여 나갔다”고 했다.

이 교수는 “안이숙(1908~1997)은 평안북도 박천에서 무역에 종사하는 부호 안중호의 넷째 딸로서 팔삭동이로 태어났다. 자라면서 총명이 남달리 뛰어나 박천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평양 서문여고를 졸업했다”며 “그후 일본 유학을 떠나 일본 교토여자전문학교와 1928년 귀족들이 다니는 동경가세이여학원(가정대학) 연구과에서 공부했다”고 했다.

이어 “안이숙은 21세가 되던 1929년 귀국하여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어 근무, 1936년 4월 평북 선천 사립 보성여학교에서 음악 및 일어교사로 교편생활을 했다”며 “1938년 전교생 합동 신사참배를 해야 하던 시기에 믿음의 절개를 보이며 거부, 일경에 연행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했고, 일본 형사의 눈을 피해 정주 언니 집에서 피신해 있다가 ‘평양성으로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평양으로 갔다”고 했다.

또 “이후에도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조직하려고 노력했고, 수감될 당시 그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 보안법 위반, 불경죄였다. 안이숙은 1940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수감되었다가 해방이 되자 1945년 8월 17일 평양형무소에서 조수옥 등과 출옥했다”고 했다.

그는 “조수옥(1914~2002)은 1914년 하동에서 부친 조원희와 모친 김태희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나 하동읍교회의 유치원을 거쳐 1927년 하동보통학교를 졸업, 어머니의 영향아래 교회를 다녔으나 모친 사후 교회를 떠났다”며 “20세가 되던 1934년 결혼을 했으나 남편의 외도로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어 파혼하고 고향을 돌아와 친구의 권유로 교회를 출석했다. 이후 1938년 최덕지의 소개로 삼천포교회에서 전도부인으로 부름을 받았고, 신사참배 거부로 삼천포를 떠나 1938년 11월 부산 초량교회에 전도사로 초빙됐다가 또 신사참배 거부로 더 이상 시무할 수 없어 12월에 사임했다”고 했다.

이어 “이후 조수옥은 1940년 1월부터 호주장로교회 한국선교회의 순회 전도사 일을 하면서 주로 이혜수 선교사의 일을 도왔다. 그러다 1940년 9월 20일 신사참배 거부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며 “이후 1945년 8월 17일에 석방되었고, 석방될 때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수감생활을 견뎌내며 신앙으로 승리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첫째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신앙 운동이며, 둘째로 일본의 탄압 속에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민족운동이며, 셋째로 일본에 대한 저항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천황 중심의 대동아공영권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이라며 “넷째로 신앙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건설운동이다. 최덕지와 안인숙, 조수옥은 한상동과 더불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세력들을 규합하여 조직화하려고 했던 점에서 이들의 행위는 중요한 독립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이러한 저항은 신앙에 기초한 것이지만 정치적 사건이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얻으려는 철저한 몸부림이었다. 이것은 신앙의 차원으로만 격하하는 것은 우리들의 사고가 너무나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라며 “인간의 행위는 다면적으로 연결된 종합적인 행위이다. 일제의 탄압 하에서 그들은 온 몸으로 탄압을 받으면서 독립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신앙의 행위를 통하여 철저하게 독립을 외쳤던 것”이라고 했다.

이어 두 번째로 ‘주기철 목사 복권과 교회교 전통’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최덕성 총장(브니엘신학교)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신사불참배운동)은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 기독교 신앙 운동이면서, 애국애족적인 항일운동이었다”며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저항한 운동자이자 민족정신을 기리는 신앙운동이었다”고 했다.

또 “일제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국체변혁운동으로 규정하여 관련자들을 붙잡아 여러 해 옥살이시켰다. 이들을 악질 민족주의자로 규정하고, 치안유지법 위반죄·보안법 위반죄, 그리고 천왕에 대한 불경죄 등의 죄목을 씌워 처벌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항일운동으로 지금까지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그 까닭은 우리 사회의 명확한 과거사 청산의 부재와 친일파 전통의 우세라고 여겨진다. 친일파 전통은 지금도 한국 기독교계를 장악하고 있다. ‘교회교’라는 특성을 지니고 지금도 횡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교회는 사회를 지도하는 양심의 교사이다. 그러나 현 한국교회의 주류 세력은 역사 왜곡, 역사 날조, 사실 호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양심결핍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며 “한국교회의 불순한 기질, 전통, 의식, 정신적 유산은 의식·무의식적이든 일제 말기의 불행한 과거사와 직결되어 있다”고 했다.

이어 “주기철에 대한 릴레이 목사 복권, 목사 복직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참회의 기미가 다소 엿보인다. 교회의 장래와 역사의식을 소중히 여기는 동기도 엿보인다”며 “다시는 신사참배와 같은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일 수도 있다”고 했다.

최 총장은 “주기철 목사 복권 릴레이는 배교, 우상숭배, 백귀난행 등의 과거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음을 웅변적으로 시사한다”며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과 교회교 전통이 가져다준 불행한 해프닝이다. 교회교 사고방식은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의 민낯”이라고 했다.

아울러 “대한민국이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항일투쟁 정신과 공적을 인정함은 공정하고 합당한 일”이라며 “한국기독교의 친일파 전통, 교회교 전통의 민낯을 드러낼 수 있다. 교회의 과거사 참회를 촉구할 수 있다. 한국기독교로 하여금 다시 양심의 교사로 우뚝 서게 할 수 있다. 교회의 사회적 신인도 회복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했다.

한편, 발표회 이후에는 오지원 소장(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을 좌장으로 진정희 편집위원(국민일보 쿠키뉴스), 최수경 발행인(모닝포커스) 참여 토론이 진행됐다.

제3회 신사참배 거부운동 재조명 학술세미나
발표회 이후 토론이 진행 중이다. 왼쪽부터 이은선 교수, 최덕성 총장, 오지원 소장, 진정희 편집위원, 최수경 발행인. ©장지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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