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

오늘 하루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시작하고, 반복적이며 단순하지만 우리의 일상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예배의 4중 구조의 ‘만남’과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경배하며 찬양으로 영광 돌리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일상의 삶은 순탄하지 않으며, 어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불명확한 삶이다. 평온했던 일상의 삶을 깨뜨리는 슬픔과 고통, 어려움은 우리 예배자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4중 구조의 예배 형태에서 ‘만남’과 ‘말씀’ 이후에 ‘성찬’이 이어진다. 성찬은 빵과 포도주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 생명과 호흡이 있어 예배 드릴 수 있음을 감사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의미를 더 강하고 깊게 한다. 포도주와 빵을 함께 나누는 성찬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은혜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붉은색의 포도주를 마시며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생각하고, 빵을 뗄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예배 공동체의 소중함을 몸소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를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열고, 나의 일상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교제하는 삶이라면, 나에게 주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배에서의 성찬과 같다. 예배에서의 성찬은 말씀의 선포를 통해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게 경험하는 상징적인 예식이다. 일상에서의 성찬은 깊은 교제의 시간이다. 일상의 삶에서의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깨달음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일상에서의 성찬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특별한 메시지’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자로 인정하시고,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시려는 상징적인 계획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가 우리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간음하므로 하나님의 법을 위반했다. 그의 일생에서의 이 사건은 성찬과 같다. 우리 일상에서의 성찬은 특별한 사건이다. 우리는 다윗이 이 사건을 통해 침상이 젖도록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후 다윗의 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에 대한 깊이가 느껴진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1-7) 이 성찬의 사건이후 다윗이 이전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음이 분명하다.

한편 엘리야의 성찬의 시간을 살펴보자. 열왕기상 18장은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신 850명과 갈멜산에서의 싸움이 기록되어 있다. 이 싸움에서 엘리야는 승리했으나 이세벨의 분노로 죽음의 위협을 느껴 광야로 도망치듯 달아난다. 이곳에서 엘리야의 죽기를 간구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바알과 아세라 신 850명을 무찌른 용맹의 선지자가 죽음을 간구하는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왕상 19:4-5) 엘리야는 이 사건 이후에 다시 힘을 얻고 하사엘을 아람왕으로 예후를 이스라엘왕으로 기름 부어주고, 엘리사를 후계자로 세우는 중요한 과업을 완수하게 된다. 엘리야에게 로뎀 나무는 ‘성찬’의 시간이다. 그가 이 시간을 통해 자신에게 주신 새로운 사명을 깨닫고 힘을 얻어 훌륭하게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오늘의 성찬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사랑이자 관심이다. 헨리 나우웬은 우리의 고통과 삶의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겠다는 우리를 향하신 선언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나의 짐을 지라. 나의 짐은 온 세상의 짐이지만 가볍다.’ 여기 그리스도인의 신비가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오신 목적은 우리의 짐을 없애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보다 더 진진하게 대하신다. 하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를 초대하여 우리의 짐을 하나님의 짐과, 우리의 고난을 하나님의 고난과 연결시키게 하기 위해서다.”(Henri J. M. Nouwen, 귀향의 영성(A Spirituality of Homecoming), 75.)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여러 고난과 고통, 어려움의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된 축복의 시간인 것이다.

린다 딜로우(Rinda Dillow)는 우리 일상 가운데 고통의 시간이 찬양의 시간으로 바뀌어야한다고 말한다. “주님께 예배를 드리면 주변 공기가 달라진다.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혔을 때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의 예배 정신이 대적들과 맞서는 무기가 되었고, 두 사람이 갇혀 있던 옥문이 활짝 열렸다.”(Rinda Dillow, 일상의 예배(Satisfy My Thirsty Soul), 262.) 이렇듯 성찬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 일상에서 상징적 계획을 나타내준다. 그렇다면 우리의 하루에 있어 성찬의 시간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는 날마다 다람쥐 채 바퀴 돌리듯 반복된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보면 몸과 마음의 집중력이 흐려지고, 영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도 느슨해진다. 일상의 성찬은 하나님과 예배자인 우리 사이에 새로운 관계로 세우시려는 계획이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싶은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사랑하고 보호하시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이루고 싶은 계획들이 있으며, 더 크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고 싶으신 일들이 분명 있다. 하나님은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신다. 그리고 늘 우리 곁에서 속삭이고 싶어 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집중하지 못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너무 분주한 일상의 삶으로 인해 하나님의 관심과 눈길을 지나쳐버린다면 말이다.

성찬의 시간은 깊은 교제의 시간과 같다. 우리 일상에서의 변화의 시간으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수 있는 터닝 포인트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 민감성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로렌스 형제의 편지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닥친 고난이 일상의 삶에 얼마나 유익인지 알 수 있다. 성찬은 감사이자 축복의 시간이다. “이 시련의 한복판에서도 자네에게 힘과 인내하는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그것이야말로 그분께서 자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완벽한 증거 아니겠는가. 그분의 사랑을 생각하며 힘을 내게나. 범사에 그분께 감사드리고.”(Brother Lawrence, 하나님의 임재 연습(The Presence of the Practice of God), 79.)

일상에서의 성찬은 좋은 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어떤 상을 받았거나, 승진을 했거나 어떤 사람으로부터 원하던 금전적인 도움을 받은 일들은 좋은 일에 속할 것이다. 반면 자녀가 많이 아프다거나, 갑자기 넘어져 다친다거나, 또는 친한 친척이 갑자기 병에 거릴거나 혹 죽었다거나, 또는 금전적 손해를 많이 본 경우들은 안 좋은 일에 속할 수 있다.

이 모든 상황들은 우리 일상의 삶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일일 것이다. 이들은 오늘이라는 일상 예배의 성찬과 같은 시간들이다. 이 특별한 일들을 통해 조금 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경건의 시간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방법들은 분명 많은 제약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분명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시고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시는 창조주 아버지시란 것을 분명히 믿음으로 인식한다면, 이런 일들은 분명 하나님의 사인인 일상의 성찬이라 볼 수 있다. 참된 예배자는 성찬의 시간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감사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취한다.

성경의 많은 예배자들도 하나님의 사인들을 분명히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 사람들임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말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삭을 제단에 바친 일,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일, 노아가 산에 방주를 지음으로 세상 사람들의 비판을 받은 일 등 너무나 많다.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순종(Yes)했으며, 하나님의 음성으로 믿고 기쁘게 나아갈 수 있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히 11:6).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한 것은, 예배자가 아닌 자에게 성찬의 시간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모든 성찬의 시간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말씀 속에서의 교제가 있고나서의 다음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우리 예배자에게 일상의 성찬은 축복이며 감사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에서의 성찬은 어떤 의미인가? 일상에서의 성찬은 첫째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평상의 삶에서 자칫 잊고 있었던 의미들을 되살리는 시간이다. 사람의 속성은 평안할 때에는 감사하기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나의 생각과 뜻대로 흘러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는 더욱 어렵다. 또한 우리가 슬픈 일을 당하거나 힘든 일로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언제나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고 싶어 하시는 선한 목자시다. 우리의 일상이 평탄치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 원하신다. “나, 너와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온전한 예배자로 하나님께 민감한 영성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저 무덤덤한 일상으로 휩쓸려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새로운 변화는 더 깊은 교제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미건조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서로 다른 모양으로 창조하시고 빚으셨다는 의미는 우리 모두를 각 달란트대로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둘째, 일상에서의 성찬은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시고자할 때 우리에게 보내시는 사인(sign)이다.

하나님은 그의 예배자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하나님은 본래 좋으신 분이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시다.“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잘못되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삶이 어그러지거나 힘든 길로 들어설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이와 같은 신뢰의 관계는 예배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자들의 기본자세를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 선언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예배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믿음 위에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믿고, 더 나아가 어려움과 핍박, 고통, 슬픔까지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하루 일상에서의 성찬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일들이다. 평상적이지 않은,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일들이 있다. 갑자가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프다든지, 자동차 사고가 난다든지, 심지어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보다 보이지 않는 내적인 일들도 많이 있다.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일어나거나 가족 간의 불화가 있거나 여러 관계 속에서 오는 마음의 고통들은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사인들은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바라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우선적으로 기억해야한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새로운 일들이 우리를 예배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축복의 간섭임을 인정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자.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었던 수많은 어려움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되어 열매로 맺혔음을 증거 한다. 요셉이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거치면서 승리하여 가족을 구하고 민족을 세웠던 고백을 우리는 기억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애굽으로 팔렸을 때의 요셉의 상황은 마치 하나님이 버리신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원대한 큰 그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의 고난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어떤 열매를 맺혔는지도 마찬가지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들의 미시적인 눈으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선한 분이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축복의 계획임을 알게 된다.

가진수 교수
가진수 교수

또한 바울의 고백은 그가 참된 예배자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고백인가! 이 같은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고난이 축복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서만 가능함을 느낀다. 하나님과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교제하면서, 믿음의 관계가 된다면 우리에게 당면한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임을 인정하게 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하는 축복의 길임을 기억하자. 주님의 피와 살을 함께하는 ‘성찬’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라.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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