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 전경
    [안보칼럼 59] 한일 경술국치 5가지 조약, 헤이그 만국평화회의(1)
    1909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가장 큰 성과와 기대는 국제중재재판소이다. 만국평화회의를 기획한 러시아 국제법 학자 마르텐스는 문명사회는 갈등과 폭력이 아니라 중재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이것을 문명국가로 이루어진 국제사회에 적용하고자 했다. 국제적인 갈등을 전쟁이 아니라 상설 중재재판소를 통해서 해결하는 시스템은 재판소 설립 초기부터 동아시아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엄청난 변화를 ..
  • 일본과 러시아 대표들이 포츠머스 회담을 하는 모습
    [안보칼럼 57] 한일 경술국치 5가지 조약, 포츠머스 조약(1)
    1904년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이 벌어졌다. 고종은 전시 중립을 선언하고 중립화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중립화 외교선언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조선을 둘러싸고 일본과 러시아 등 열강들의 각축이 본격화되면서 1900년대 초반 고종의 주된 외교정책은 중립화였다. 특히 1900년 중국의 의화단 사건으로 열강의 한국 출병 가능성이 고조되었다. 고종이 그해 주일공사로 임명한 조병..
  • 1905년 9월 5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회담에서 러시아 전권대표인 비테 전 재무대신(왼쪽)과 일본 전권대표인 고무라 외무대신(오른쪽)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가운데)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안보칼럼 58] 한일 경술국치 5가지 조약, 포츠머스 조약(2)
    포츠머스시는 미국의 독립전쟁 유적지를 소개하는 보스턴의 프리덤 트레일을 모방해서 포츠머스 트레일까지 만들었다. 포츠머스의 교회와 학교는 매년 9월 5일 오후 3시 47분이면 해군조선소의 경적 소리에 맞춰서 10분간 종을 울려서 포츠머스 조약을 기념한다. 포츠머스 회담 이래 이어져 내려오는 소도시의 전통이다. 뉴햄프셔주는 이미 9월 5일을 포츠머스 조약의 날로 선포하고 주정부 차원의 기념행사를..
  • 제2차 영일동맹 체결을 기념하여 1905년 도쿄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발행한 엽서
    [안보칼럼 56] 한일 경술국치 5가지 조약, 영일동맹(2)
    이중플레이를 한 적이 없다는 이토의 말은 거짓이었다. 러시아에서 니콜라이 2세와 람스도르프 외무장관을 먼저 만나서 협상을 벌였다. 이토의 행적을 알고 있었던 랜스다운 영국의 외무장관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파였던 이토는, 이때는 영국과 동맹을 맺는 쪽으로 돌아서 있었다. 가쓰다 다료 총리, 고무라 주타로 외상, 하야시 나다스 주영 일본대사가 추진한 영일동맹에 메이지 일본 왕..
  • 일본 외무성이 소장한 1902년 1월 30일에 체결된 영일동맹 문서
    [안보칼럼 55] 한일 경술국치 5가지 조약, 영일동맹(1)
    영국과 일본이 맺은 1902년의 동맹은 일본의 경제,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결국 대한제국을 일본의 속국화로 이끄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경제적 영향력이 증대되었지만, 국제적으로 정식 지위가 인정되지 않았다. 제2차 영일동맹의 전문은 한국의 독립, 영토보전 보장이 삭제되고,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이익을 보호하고 증진할 권리를 인정하게 되었다. 일제는 러일..
  • 1895년 철거하기 전 영은문. 조선이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상징적 관문이었으나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철거됐다. 그 자리에 1897년 독립문이 세워졌다.
    [안보칼럼 54] 일본의 한국침략을 위한 5가지 조약(2)
    불과 한 세대 만에 서양식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국주의로 성장한 일본의 힘은,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국정개혁과 서양식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할 수 있는 정신적 뿌리가 선견자를 길러낸다는 요시다 쇼인이다. 야마구치현 하기시에 쇼카 손주쿠라는 학당을 1830~1859년에 걸쳐서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타카요시 등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을 가르치..
  • 이범희 목사
    [안보칼럼 53] 일본의 한국침략을 위한 5가지 조약(1)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인한 막부와 농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고자 ‘정한론’을 내세워 교활하고 철저하게 조선 정복을 계획하고 실시했다. 1873년 정한론을 시작으로 1874년 대만정복, 1875년 강화도 조약, 1894년 조선 침략과 청일전쟁, 1895년 명성황후 시해, 1904년 러일전쟁으로 류큐 왕국과 대만과 조선을 병합시키고 지배하기 시작했다. 5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조선을 강제로..
  • 이범희 목사
    [안보칼럼 51] 일본의 침략과 한민족의 독립운동(1)
    모세는 그의 유언 설교에서 기억하고, 생각하여, 물으라며 국가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힘 있는 국가안보가 경제발전이고, 국민 인권이자 민생이며, 국가 번영, 국민 행복이다. 국가보훈은 국가의 존립을 위하여 희생한 분들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 보상이며 국민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켜서 국가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국가보훈의 목적은 기억을 통한 연대와 국민통합이다. 서울 국립..
  • 1919년 3월 1일 조선인들이 남대문(숭례문)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안보칼럼 52] 일본의 침략과 한민족의 독립운동(2)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은 평화적인 시위였지만 일제는 무자비하게 총칼로 진압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고무되어 있던 한국인에게 일제의 탄압적인 무단통치와 고종황제 독살설에 대한 확산으로, 1919년 3월 1일 이후 국내와 해외 한인 지역에서 한국은 일본의 속국이 아님을 선포했다. 탑골공원에서 경신중학교 정재용 학생이 대독한 민족 ..
  • 대한민국 초대 내각(이승만 정부)
    [안보칼럼㊿]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下)
    종북주의자 세력은 대한민국을 미군정이 이승만을 내세워 친일파 정권을 세웠기에 정통성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1948년 9월 22일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법이 제정되어 박흥식 외 700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당시 1948년 4월 3일 제주반란사건이 심해져서 1949년 10월 19일 제주반란 진압을 명령받은 14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14연대 반란군 진압을 명령받은 대구의 6연대..
  • 1950년 12월 29일, 한국전쟁 기간 북한군이 수도권을 점령하면서 대구역까지 밀려 내려온 피란민 행렬
    [안보칼럼㊾]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上)
    6.25 한국전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동란의 주범): 북한의 가짜 김일성(본명 김성주)이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아서 남한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불법 무력 남침을 ‘폭풍’이라는 신호로 개시했다. 2. 어떻게 대한민국을 지켰는가?: 불과 2년이 안 된 신생국가 대한민국을 지켜내기 위해서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리고 국민은 전 ..
  •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
    [안보칼럼㊽] 6.25 한국전쟁의 진실, 반성(2)
    한국전쟁이 잊히면서 미국과 소련의 군비 경쟁이 가속화된다. 핵의 위협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재래식 무기 개발과 기술이 크게 혁신되었다. 미국은 1950년의 원자탄보다 200배 강한 수소폭탄을 개발했다. 소련도 1950년 똑같은 실험을 성공하고 수소폭탄을 보유했다. 1955년 중거리 유도탄을 수없이 개발해서 미국과 힘의 균형을 이룬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한국인이었다. 남북 2,500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