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외무성이 소장한 1902년 1월 30일에 체결된 영일동맹 문서
    [안보칼럼 55] 한일 경술국치 5가지 조약, 영일동맹(1)
    영국과 일본이 맺은 1902년의 동맹은 일본의 경제,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결국 대한제국을 일본의 속국화로 이끄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경제적 영향력이 증대되었지만, 국제적으로 정식 지위가 인정되지 않았다. 제2차 영일동맹의 전문은 한국의 독립, 영토보전 보장이 삭제되고,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이익을 보호하고 증진할 권리를 인정하게 되었다. 일제는 러일..
  • 1895년 철거하기 전 영은문. 조선이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상징적 관문이었으나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철거됐다. 그 자리에 1897년 독립문이 세워졌다.
    [안보칼럼 54] 일본의 한국침략을 위한 5가지 조약(2)
    불과 한 세대 만에 서양식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국주의로 성장한 일본의 힘은,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국정개혁과 서양식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할 수 있는 정신적 뿌리가 선견자를 길러낸다는 요시다 쇼인이다. 야마구치현 하기시에 쇼카 손주쿠라는 학당을 1830~1859년에 걸쳐서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타카요시 등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을 가르치..
  • 이범희 목사
    [안보칼럼 53] 일본의 한국침략을 위한 5가지 조약(1)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인한 막부와 농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고자 ‘정한론’을 내세워 교활하고 철저하게 조선 정복을 계획하고 실시했다. 1873년 정한론을 시작으로 1874년 대만정복, 1875년 강화도 조약, 1894년 조선 침략과 청일전쟁, 1895년 명성황후 시해, 1904년 러일전쟁으로 류큐 왕국과 대만과 조선을 병합시키고 지배하기 시작했다. 5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조선을 강제로..
  • 이범희 목사
    [안보칼럼 51] 일본의 침략과 한민족의 독립운동(1)
    모세는 그의 유언 설교에서 기억하고, 생각하여, 물으라며 국가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힘 있는 국가안보가 경제발전이고, 국민 인권이자 민생이며, 국가 번영, 국민 행복이다. 국가보훈은 국가의 존립을 위하여 희생한 분들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 보상이며 국민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켜서 국가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국가보훈의 목적은 기억을 통한 연대와 국민통합이다. 서울 국립..
  • 1919년 3월 1일 조선인들이 남대문(숭례문)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안보칼럼 52] 일본의 침략과 한민족의 독립운동(2)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은 평화적인 시위였지만 일제는 무자비하게 총칼로 진압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고무되어 있던 한국인에게 일제의 탄압적인 무단통치와 고종황제 독살설에 대한 확산으로, 1919년 3월 1일 이후 국내와 해외 한인 지역에서 한국은 일본의 속국이 아님을 선포했다. 탑골공원에서 경신중학교 정재용 학생이 대독한 민족 ..
  • 대한민국 초대 내각(이승만 정부)
    [안보칼럼㊿]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下)
    종북주의자 세력은 대한민국을 미군정이 이승만을 내세워 친일파 정권을 세웠기에 정통성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1948년 9월 22일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법이 제정되어 박흥식 외 7000여 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당시 1948년 4월 3일 제주반란사건이 심해져서 1949년 10월 19일 제주반란 진압을 명령받은 14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14연대 반란군 진압을 명령받은 대구의 6연대..
  • 1950년 12월 29일, 한국전쟁 기간 북한군이 수도권을 점령하면서 대구역까지 밀려 내려온 피란민 행렬
    [안보칼럼㊾]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上)
    6.25 한국전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동란의 주범): 북한의 가짜 김일성(본명 김성주)이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아서 남한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불법 무력 남침을 ‘폭풍’이라는 신호로 개시했다. 2. 어떻게 대한민국을 지켰는가?: 불과 2년이 안 된 신생국가 대한민국을 지켜내기 위해서 정부는 총동원령을 내리고 국민은 전 ..
  •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
    [안보칼럼㊽] 6.25 한국전쟁의 진실, 반성(2)
    한국전쟁이 잊히면서 미국과 소련의 군비 경쟁이 가속화된다. 핵의 위협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재래식 무기 개발과 기술이 크게 혁신되었다. 미국은 1950년의 원자탄보다 200배 강한 수소폭탄을 개발했다. 소련도 1950년 똑같은 실험을 성공하고 수소폭탄을 보유했다. 1955년 중거리 유도탄을 수없이 개발해서 미국과 힘의 균형을 이룬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한국인이었다. 남북 2,500만 ..
  • 1950년 12월 13일, 장진호 탈환 작전 이후 함흥의 제1해병사단 묘지에서 열린 추모식 모습
    [안보칼럼㊼] 6.25 한국전쟁의 진실, 반성(1)
    1953년 7월 27일, 6.25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났다. 한국전쟁은 남과 북의 군인과 민간인을 합해서 4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 국토의 4분의 3이 전란에 불타고 산업시설은 잿더미가 됐다. 한국전쟁은 이 땅에 무엇을 남겼는가? 전쟁이 끝난 후 양측은 서로가 이겼다고 자축한다. 김일성은 평양에서 승전식을 한다. 북침을 저지했고, 미국과 싸워서 이겼다는 이유다. 그리고 미..
  •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상장으로 쓰던 판문점 목조건물에서 휴전협정이 진행됐다. 왼쪽 책상에 윌리엄 해리슨 유엔군사령부 중장, 오른쪽 책상에 남일 조선인민군 대장이 앉아 서명했다.
    [안보칼럼㊻] 6.25 한국전쟁의 진실, 휴전(2)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양측 대표는 악수도 없이 인사도 없이 협정문서에 서명했다.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예비회담을 시작해서 159회의 본 회담과 179회의 분과위원회 회담 등 총 756회의 회담을 치르는 진통 끝에 성사되었다. 그러나 휴전회담 2년여 동안 3.8선 상에서의 능선고지, 단장의 능선고지, 펀치볼전투, 고양대전투, 백마고지, 저격능선, 금성전투 등 ..
  • 1953년 6월 18일, 마지막으로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 사진을 들고 나오고 있다.
    [안보칼럼㊺] 6.25 한국전쟁의 진실, 휴전(1)
    1952년 11월, 중부 전선의 3번째 겨울이 왔다. 판문점 회담은 포로 문제로 진전되지 못하고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전선의 장병들은 전투 의욕과 사명감을 다 잃었다. 유엔 병사들은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소원뿐이었다. 무엇보다 죽기가 싫었다. 전쟁에 대한 염증과 혐오감이 크게 생겼다. 휴전을 한다고 했지만 고지 전투는 멈추지 않았다.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 장군은 대통령..
  • 징집된 국민방위군
    [안보칼럼㊹] 6.25 한국전쟁의 진실, 후방전쟁(2)
    195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야제에 이방인의 잔치에 한국인이 초대되었다. 이들은 한국의 승리와 안정과 번영을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하고, 믿음을 잃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부족한 결핍의 시대에 헐벗고 굶주리는 전쟁 속에서 무엇이든 손에 잡고 입에 넣어야만 죽지 않았다. 그러나 중공군이 연속적으로 퍼붓는 대공세에 서울을 다시 내주는 1.4 후퇴 속에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로 인..